이 세상의 꽃과 나무들은 각자의 특성이 있다. 제 때에 피고 지며 자기 몫을 다한다. 그 가운데서 옛사람들은 특히 매화·난·국화·대나무, 네 가지 식물을 사군자(四君子)라 부르며 애호하였다. 군자(君子)란, 유교 문화에서 지향하는 이상적 덕목을 갖춘 인간상으로 곧, 선비정신을 간직한 고결한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유토피아를 꿈꾸던 때였다. 성리학의 이상을 실현해 낼 수 있는 지성을 갖춘 선비를 군자라 했고 이 군자를 상징하는 매·난·국·죽을 사군자라 했다. 사군자는 각 식물에 군자라는 최고의 수식어를 붙여 줌으로써 최고의 가치를 지닌 상징어가 되었다.
옛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삶의 이치를 배우며 살았다. 매화가 피는 것을 보고 봄이 오는 것을 알았고, 국화 향이 짙어지면 가을이 깊어 감을 느꼈다.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매화를 찾아 나섰고, 가냘파 보이지만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는 난을 사랑하였다. 꽃들이 지고 난 뒤 서리 속에 피는 국화를 찬양했고, 사시사철 푸르고 곧은 대나무를 선비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모진 계절의 변화에도 의연히 제 본분을 지키는 이들 식물에서 군자다운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매화는 겨울 혹한 속에서 망울을 맺고 있다가, 겨울이 가고 새봄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듯 이른 봄에 꽃을 피운다. 추위를 이겨내고 피어나는 매화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는 군자와 비유된다.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는 옛사람들이 봄을 기다리던 그림이다. 매화를 81송이 그려놓고 동지 다음날부터 한 송이씩 붉은색으로 칠해나간다. 그러면 9×9=81일 되는 날 즈음 봄이 온다고 하는데 대개 3월 10일 전후가 되고, 이때 매화가 피면서 봄이 오는 것이다.
난(蘭)은 잎이 늘 푸르고 곧으며 거름을 탐하지 않아 바위나 돌, 모래 틈에서 척박하게 살아간다. 그런데도 꽃이 피면 그윽한 향이 온 산을 진동시킨다. 그래서 난은 일찍부터 자기절제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군자로 지칭해 왔다.
가을이면 산야에 핀 국화만큼 수수하지만 멋있는 꽃도 없을 것이다. 국화는 매화나 대나무처럼 단단한 줄기가 있어 강인함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난처럼 빼어난 자태를 뽐내는 잎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선비들이 국화를 좋아한 것은, 소박한 모습이지만 가을의 서리를 이겨내는 의연함과 은은한 향취 때문이다. 모든 꽃이 지고 없는 계절에 핀 국화는 가히 가을을 대표할 만한 꽃이다. 옛 문인들은 국화를 인내와 지조의 상징으로 시문과 서화는 물론 장식미술의 소재로서도 국화를 사랑했다.
대(竹)는 속이 비고 껍질이 단단해 허심(虛心)과 불굴(不屈)을 자랑하니 일찍부터 군자의 표상으로 꼽아왔다. 당연히 경사시문(經史詩文)에 정통한 문사들이 여기(餘技)로 그리는 그림의 주제가 되고 매화, 국화, 난과 함께 사군자로 일컬어 왔다.
한낱 나무나 풀에 불과한 사군자에 대한 옛사람들의 지극한 사랑이 요즘 현대인들에게는 다소 낯설 것이다. 서구문화에 지나치게 편중된 나머지 우리의 전통미술 문화에 대한 단절에서 오는 일종의 문화적 이질감 때문이다. 인문학의 집약체라 할 수 있는 사군자화(四君子畵)는 과연 요즘 사회에 유효한 것일까? 사람 사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본질은 똑같다고 한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 평가되는 요즘 사회에서 사군자화가 상징하는 인문학적 가치는 밤하늘의 샛별처럼 더욱 빛날 것이다.
/이흥재 정읍시립미술관 명예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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