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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정유재란 속의 전북] 전세 뒤집은 이치전투

전투 이후 곡창지대 전라도 점령치 못하도록 완전 차단
1592년 9월 금산성 머물던 왜군 경상도 방면으로 철수
<선조수정실록> “왜적 조선 3대전 중 이치전투 첫 번째”
“전라도에서 군량, 물자 조달하려던 일본군 전략 무력화”
“일본 금산에 붙잡아 조선 재해권 장악할 수 있는 계기마련”

왼쪽부터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에 있는 이치전적지비, 이치대첩유허비, 황진장군 이치대첩비. /사진제공=완주군
왼쪽부터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에 있는 이치전적지비, 이치대첩유허비, 황진장군 이치대첩비. /사진제공=완주군

웅치전투(진안과 전주 경계)에 이어 금산과 전주의 경계지역에서는 전라도를 다시 침공하려던 왜군과 조선관군·의병 사이에 2차전이 벌어졌다. 바로 이치전투이다. 이 전투는 조선에 불리하던 전세를 역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승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전라도에서 군량물자를 조달하려던 왜군의 전략을 무력화해, 한반도 북쪽까지 뻗친 전선을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전라도 남부에 있는 조선 수군의 거점까지 사수해 이후 벌어진 해상전에서 우위에 점할 수 있는 계기도 마련했다.

당대 문헌사료에서도 왜군들이 이치전투를 조선 3대 전투 가운데 첫 번째로 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치전투 이후 왜군이 전라도로 침입하지 않은 관계로, 임란극복에 있어서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이순신의 한산도대첩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기사에서는 웅치·안덕원 전투 이후 전라도 상황과 이치전투 전개과정, 당대의 평가, 전투가 임진왜란사에서 가지는 의의 등을 재조명한다.

 

웅치·안덕원 전투 이후 전라도 상황

이치전투 관련 도면 /금산군 자료 발췌, 2019년.
이치전투 관련 도면 /금산군 자료 발췌, 2019년.

1592년 7월 8일 웅치전투가 끝난 뒤, 왜군은 금산성에 머무르며 인근지역을 노략질하면서 여전히 전라도를 위협했다. 특히 7월 20일에는 진산에 침입해 관사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에 전라도 관군은 대대적인 전투 준비를 했다. 전라감사 이광은 웅치전투 당시 남원을 지키던 전라도절제사 권율에게 관군 1500명을 이끌고 이치로 가서 주둔케 했다. 당시 안덕원에서 적을 격퇴한 황진도 소식을 듣고 이치에 가서 진을 치고, 휘하 장수인 공시억·위대기, 의병장 황박과 함께 전투에 대비했다.

전북대 사학과 하태규 교수는 “통상 웅치전투와 이치전투가 7월 8일 같은 날에 전개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며 “그러나 <선조수정실록> , <난중잡록> , <이치주첩서> , <쇄미록> 등 문헌사료를 보면서 웅치전투 이후의 전황을 분석하면 다른 결론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치전투는 8월 17일께 발발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이치전투

남원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 , 조선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편찬한 <연려실기술> , 관찬사서 <선조수정실록> 에 따르면, 웅치전투가 끝나고 금산성에 머물던 왜군 6번 대장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는 1592년 군을 이끌고 이치를 향해 공격해 왔다.

동복현감 황진은 공시억·위대기·황박과 함께 제일선에서 부대를 맞아 대접전을 벌였다. 전투 중 황진은 적의 조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이에 사기가 오른 왜군은 진채(陣寨)로 뛰어들었다.

공시억·위대기·황박은 이런 사태에 필사적으로 방어했고, 이 때 전라도절제사 권율이 장수를 독려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치고 나갔다. 황진도 상처를 움켜쥐고 다시 싸웠다. 결국 왜군은 크게 패해 무기를 다 버리고 달아났다. 다만 황박은 이 전투에서 순절했다.

 

이치전투에 대한 조선시대 평가

관찬사서 <선조수정실록> 은 이치전투의 성과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웅치·안덕원 전투에 이어 이치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둬, 이후 왜군이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침공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차단해서다.

당시 왜군은 이치전투에서 금산성으로 물러났다. 이 때 충청도 의병장 조헌과 영규대사 승병은 이들을 공격했으나 패했다.

그러나 왜군은 이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분석된다. 전투 직후 전라도를 공격하지 못했다. 이를 기회로 전라도 관군은 금산성에 머무는 왜군을 간헐적으로 공격했다. 결국 9월이 되면서 전국적으로 전황이 불리해진 일본군은 경상도, 성주, 개령 반면으로 철수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25년 7월 1일 기사에서는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고 나와 있다.

33권 도원수 권율의 졸기(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에서는 “이치의 승리와 행주의 대첩은 비록 옛날 명장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보다 더하겠는가. 국가가 중흥의 업을 이룬 것은 실로 이에 힘입은 것이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고 평했다.

 

전투가 가진 의의

최근 역사학자들은 이치전투를 전세를 뒤집은 전투로 평가한다. 육상 승전을 계기로 수군이 재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데다, 호남에서 군량물자를 조달하려던 왜군 전략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하태규 교수는 “전쟁이 장기전에 접어들자, 왜군은 전라도에서 부족한 군량과 물자를 조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며 “그러나 웅치·이치 전투로 인해 전라도 점령이 실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왜군은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전선의 보급선을 유지할 수 없게 됐다”면서 “결국 평양과 함경도까지 뻗쳐있던 전선을 경상도 지역으로 축소했다.”고 부연했다.

국방대학교 노영구 군사전략학과 교수는 “왜군을 금산에 붙잡아 조선 수군의 거점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저지한 효과도 있었다”며 “이는 조선이 해상전에서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만약 “왜군이 계획대로 전라도를 점령해 식량조달과 부대관리를 원할하게 했다면 조선 전역이 위기에 처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치전 주역 동복현감 황진

황진을 동복현감에 임용하는 교지. 1591년(선조24년) 임금 선조가 황진을 동복현감에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사진제공=황진문중, 2012년 전라북도박물관미술관 연합회 도록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
황진을 동복현감에 임용하는 교지. 1591년(선조24년) 임금 선조가 황진을 동복현감에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사진제공=황진문중, 2012년 전라북도박물관미술관 연합회 도록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

황희 정승(1431~1449)의 5세손인 황진은 1550년 남원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장수다. 1576년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에 임명됐으며, 1583년 여진족 3만 여 명이 함경도 북부를 침입한 ‘이탕개(泥湯介)의 난’에도 참전해 공을 세웠다.

이후 황윤길·김성일이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갈 때 함께 했는데, 다녀온 뒤 일본의 침공을 예견했다. <선조수정실록> 에는 “일본에 다녀와 왜변이 장차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매일 공무가 끝나면 곧바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부지런히 익혔다”고 나와 있다.

1591년 동복현감으로 임명됐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을 맞았다. 당시 황진은 안덕원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권율과 함께 웅치전투의 주역이 됐다.

황진의 활약상과 평가는 사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려실기술> 과 <선조수정실록> 은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해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종일토록 교전해 적병을 대파했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고 기록했다.

1593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성 전투에 참여했고, 백성과 함께 토산을 쌓아 적을 격퇴시켰다. 그러나 격퇴한 성벽 밖의 적의 동향을 살피던 중, 시체 속에 숨어있던 왜군이 쏜 총에 이마를 맞아 전사했다. 당시 황진의 전사소식을 들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황진이 죽었으니, 나랏일이 어긋나게 됐다”고 했다.

사후, 조정에서는 좌찬성에 추증하고 정려를 내렸다. 진주의 창렬사, 남원의 정충사에 제향됐다. 시호는 ‘무민’이다.

노영구 교수는 “황진 장군은 공훈을 보면 역사적으로 크게 평가받아도 손색이 없다”며 “그러나 임진왜란의 많은 영웅들이 쓰러지던 1593년 4월~6월에 유명을 달리해 업적이 묻힌 경향이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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