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기운이 깃든 ‘인검(寅劍)’은 의례용 칼이다. 12간지 중 호랑이를 뜻하는 ‘인(寅)’은 양기가 강하며 의(義)를 상징하는데, 양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인년, 인월, 인일, 인시가 네 번 겹쳐지는 시간에 맞추어 제작한 사인검과 삼인에 맞추어 제작한 삼인검이 있다.
조선 시대 인년은 총 43회였다. 태조 7년(1398) 무인년에 처음 인검이 제작되었지만, 전란과 흉년이 심한 해에는 만들지 못하기도 했다. 제작의 준비부터 완성되기까지 여러 복잡한 절차와 금기를 지켜가며 시기를 맞추어 선정된 장인이 특정한 장소에서 엄선된 재료로 의미를 담아 제작하였다. ‘사악한 것을 베고 나라를 지키라는 뜻’을 담아 왕실이 만든 인검은 ‘나쁜 기운을 막고 안녕을 기원’하는 상징이었다.
호랑이는 예로부터 재앙을 물리치며 잡귀를 막아주는 ‘영물(靈物)’로 여겼지만, ‘호환(虎患)’이라 불리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가축은 물론이고 사람까지 물어 죽여 호랑이가 먹고 남긴 시신 일부를 모아 장례를 치르는 것을 ‘호식장’이라 하였으며, 그 자리에 만든 무덤을 ‘호식총’이라 하였다. 호환과 맞서기 위해 호랑이를 사냥한 모습이 고구려 벽화와 조선의 화가 이인문의 그림 등에 남아 있으며, 고려 시기에는 호랑이 전문 사냥꾼이 존재했다.
조선 초부터는 농사를 위한 개간이 늘어 살 곳을 빼앗긴 호랑이가 인가에 출몰하면서 호환이 잦아지자 조정은 호랑이를 잡는 ‘포호정책’을 펼쳤다. 태조 1년 성안에 들어온 호랑이를 쏴 죽인 것을 비롯하여 궁에 호랑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기록이 있고 태종이 “범에게 상하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죄를 주겠다”며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호환에 대응하라고 지시한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진다.
포호정책에 따라 호랑이를 전문적으로 잡는 최정예 군사인 ‘착호갑사(捉虎甲士)’를 선발 운영하였고 세종 시기에 이르러 체계화되었다. 지방에도 호랑이를 잡는 ‘착호인’과 함정을 관리하는 ‘감고’등을 설치해 호랑이 가죽을 진상하게 하고 더러는 큰상을 내렸다. 왜란을 거치며 훈련된 조총 포수들이 호랑이 사냥에 투입되었고 산포수라 불린 숫자가 늘어 감에 따라 호랑이의 수는 점차 줄었다.
조선총독부는 피해 입히는 맹수를 퇴치한다는 구실로 해수구제를 정책으로 삼아 호랑이를 마구 사냥했으며, 부호 야마모토가 조직한 호랑이 사냥단 정호군까지 원정와서 ‘조선 호랑이 사냥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후 1922년 경주 대덕산에 살던 호랑이가 사살되면서 조선의 호랑이는 자취를 감추었다.
호랑이 왕국이라 불리던 조선에 그 많던 호랑이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는데, 임실 덕치면 약담봉에는 포수바위 전설이 있다. 마을을 공포에 떨게 하는 호랑이를 쫓아 달라고 정성껏 제물을 바치며 산신제를 올리자 감동한 산신이 마을을 내려다보는 약담봉에 세워준 게 포수바위이다. 이후 마을에는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약담봉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상류에 자리한 임실 신평면 호암리에는 특별한 호석(虎石)이 있다. 호랑이를 닮은 범바위가 있어 호암리인데, 그 모습을 두려워해서인지 확실치 않지만 사람들이 범바위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 후 범바위를 없애는데 주도한 사람의 집에 불이 나고 우환이 잇따르자, 수호신인 범바위를 없앴기 때문이라고 여긴 마을 사람들이 호석을 만들어 세워 놓았다.
이후 마을에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는데 만든 호석의 모습이 특이하다. 이빨을 드러내고 익살스럽게 히히 웃는 호랑이는 오금 저리게 하는 두려운 존재이기보다는 민화 속 친근한 호랑이 같기도 하고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며 흥정하는 동화 속 호랑이 같다. 공포를 해학으로 풀어 낸 친근한 상징이다.
남원에도 두리뭉실한 귀여운 모습의 호석이 있다. 광한루원을 비롯한 몽심재 고택과 고평마을 세 곳에 자리한 호석인데, 비슷한 형상이 마치 한 사람의 석공 솜씨처럼 보인다. 그 호석이 전해진 데에는 견두산(犬頭山)과 관련 있다. 견두산의 본디 이름은 호랑이 머리를 뜻하는 호두산(虎頭山)이었고, 그 고장은 호랑이가 들끓어 지명과 마을 이름마저도 호곡리(虎谷里)와 호음실이었다.
남원에 호환이 끊이지 않자, 풍수에 능한 전라감사 이서구(1754~1825)가 산 이름을 견두산으로 바꾸면서 호환이 사라졌다. 하지만, 견두산이란 이름을 얻자 성난 개가 남원 땅을 노려보는 모양새가 되어버렸고 들개와 늑대가 떼를 지어 나타나 피해를 줬다. 이에 이서구가 세 곳에 호석을 세우도록 하여 견두산을 바라보게 하자 들개무리의 피해와 호환도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호석이 있어 호석거리로 불렸던 남원의 옛 시장은 광한루원에 편입되어 사라졌지만 오작교 가는 길옆에 호석은 세월에 닳은 모습으로 서 있다. 그리고 명당으로 알려진 몽심재에는 호석과 더불어 호랑이 기운을 받을 수 있는 나무가 200여 년을 함께하고 있다. 나무줄기의 밑동이 호랑이 발을 닮아 ‘호족시’란 이름을 얻은 감나무가 특별하고 귀하다.
임인년 호랑이해를 맞으며 두려움을 넘어 벽사의 상징이 된 호랑이의 힘찬 기운을 받아 보자. 조선 왕실의 인검과 호랑이 물상에 기대어 삿한 것을 물리치고,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송림 깊은 골로 한 짐생이 내려온다.”란 노래로 한껏 흥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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