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은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이래, 60년 동안 수많은 무형유산을 발굴하여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이를 꾸준히 육성해 오고 있다.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2013년 개원 이래, 국가무형문화재를 중심으로 한 무형유산의 전승 환경 개선, 전수 교육 확대, 전시⋅공연⋅행사 등 세대 간 전승 활성화에 필요한 제반 업무 지원에 힘쓰고 있다.
이 중 국가무형문화재 기록화 사업은 무형유산 지원 사업의 가장 기초가 된다. 해당 종목의 연행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하기 때문이다. 즉, 해당 종목을 전승하는 보유자 또는 보유단체의 핵심 기⋅예능 실연 전 과정을 영상, 사진, 음반, 도서로 남겨 세대 간 전승과정에서 지속되는 무형유산 고유의 속성과 변화양상을 포착한다. 아울러, 기록화를 통해 종목의 소멸 위기가 닥쳤을 때 기록시점의 근거자료를 토대로 해당 종목의 소생 기반을 마련한다.
국가무형문화재를 기록으로 담는 데에는 사업 담당자와 전승자 모두에게 대단한 결심을 요구한다. 하나의 연행 속에도 수많은 기⋅예능이 있고, 각 과정에도 고도의 기량이 갖추어지지 않고서는 결코 실연할 수 없는 특수한 연행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예능 종목 보유단체의 경우, 수많은 인원들이 합심하여 단일한 기⋅예능을 표출해야 하므로 평소 단체 지도자와 구성간의 각별한 노력 속에 엄청난 연습량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농악은 상쇠를 중심으로 긴 세월 동안 전승 체계를 잡아가는 경우가 많고, 이를 통해 독자적인 해당 지역만의 색채를 이루어가는 곳이 많다. 상쇠는 농악단의 지도자로서 한 번 직책을 부여받고 나면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같이 길게는 수 십년 간 그 역할을 꾸준히 도맡는지라, 대개 상쇠의 지휘 속에 제각각 부여받은 역할에 따라 농악의 구성과 전승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농악의 기록화는 상쇠와 구성원의 호흡이 가장 무르익어 기량이 최고조에 올랐을 때가 최적의 기록 시점이 된다.
2022년 6월 11일. 국가무형문화재 남원농악 기록화 촬영이 있었다. 이 날 모든 일정을 마치고 김정헌 상쇠 선생님 인터뷰가 있었다. 소회를 말하려던 상쇠 선생님이 바로 눈물을 터뜨렸다. 선생님 앞에서 질문하던 피디님과 촬영감독님도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원래 본 촬영은 6월이 아닌 5월이었다. 3월 말, 국립무형유산원-남원농악보존회 간 전체 미팅 때, 남원농악의 상쇠를 맡고 계셨던 류명철 회장님이 보존회를 이끌고 계셨다. 이 날은 주요 전승자들이 함께 회의석상에 배석하여 구체적인 촬영 장소와 연행 내용을 긴밀히 조율하고서 ‘다들 5월에 봅시다’하고 웃으며 돌아갔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류 선생님이 급히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모두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류 선생님의 급보도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선생님이 빠진 보존회는 당시로서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은 시나리오였기에 기록화는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보존회는 류 선생님이 주도하여 일구어낸 주민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한 명의 상쇠 곁에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승 체계를 잡아온 전승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업 담당자로서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잘 할 수 있을까요" 노파심에 자문 교수님께 여쭈니 "남원농악은 실력이 탄탄한 집단이다. 곧 수습해서 할 수 있다"는 확신의 답이 왔다.
류 선생님의 장례가 수습되고, 차기 회장이 선출되었다. 류 선생님 곁에서 줄곧 부쇠로 활동했던 김정헌 선생님이 보존회를 이끌게 되었다. 국가무형문화재 기록화는 예정대로 진행되어야 했다. 5월 중순, 모두가 ‘비장한’ 마음으로 다시 만났다.
농악은 본디 야외촬영이기에 본격적인 여름으로 들어가면 악천후로 진행이 어려웠다. 보존회는 한 달 안에 연습을 완료하고 촬영에 임하겠다고 결심했다. 그 결과를 6월 11일에 종일 보았다. 그 사이 김정헌 선생님은 더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오전에는 마을굿, 오후에는 판굿으로 짜였다. 상쇠의 역할, 보존회의 열의는 대단했다. 마을 당산나무를 시작으로 마을 샘터를 돌아 김주열 열사 생가에서 지신밟기를 했다. 지신밟기만 해도 문굿-마당굿-고사소리-조왕굿-장독굿-샘굿-곳간굿-술굿 여덟 굿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류 선생님 생전의 고사소리를 받아 김 선생님은 실수 하나 없이 보존회원들과 주거니 받거니 호흡을 맞췄다.
열다섯 개의 굿으로 구성된 판굿에는 도둑잽이라는 연극도 포함되어 있다. 순서 하나의 혼선 없이 보존회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데도 물만 축이고 뛰었다. 판굿이 끝나고 이어지는 개인놀이에서도 전승자들은 유감없이 제 기량을 보여주었다. 엄청난 연습량의 뒷받침이었다.
"나이 서른에 시작해서 25년을 뛰었는데 아직은 할만 합니다"면서 웃으며 퇴장하는 분이 있었다. 잘한다 잘한다 박수소리가 나니 "아니 그럼 내 젊은 시절 여기 다 갈아넣었는데 이 정도 못하면 안되지"라며 너스레를 떠는 분도 보였다. 이 날은 동네 온 어르신들이 다 나와 농악 시작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코로나 이후, 실로 반가운 마을 행사였다. 이 날의 기록화는 참여한 전승자뿐만 아니라 담당 공무원, 촬영자, 마을 주민 모두에게 기억될 것 같다. 기록화 본연의 목적인 ‘세대 간 전승’을 어김없이 보여준 날이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강석훈 국립무형유산원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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