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엄마가 왕홍합을 왕창 사와서는 솥에 모조리 넣고 삶아버렸다. 얼마나 지났으려나 다수의 홍합들이 꺼내달라며 하나 둘 입을 벌렸다. 오이를 썰고 있던 엄마는 홍합의 성화에 거실에서 자산어보를 보던 아빠와 나를 불렀다. 나는 보던 영화를 멈추고 아빠와 꼼짝없이 부엌 바닥에 앉아 홍합을 까기 시작했다. 갓 삶아진 홍합은 무지 뜨거웠는데 아빠가 홍합 껍데기로 홍합을 긁어내면 된다면서 간단한 노하우를 선보였다. 나는 창대와 정약전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식을 줄 모르는 홍합의 열기가 식을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던 터라 아빠의 노하우를 빌려 홍합을 까댔다. 아빠는 홍합을 까는 내 모습에 “오늘도 하나 배웠지!” 하고 몹시 뿌듯해했다. 다음 날 나는 “그게 그렇게 뿌듯할 일이야?” 마당에 자란 상추를 따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너 어릴 때 우리말 겨루기 보면서 아빠한테 물어보고 정답이면 대단하다고 했잖아, 아빠는 계속 그런 존재이고 싶은가 봐.” 라면서 “니가 보는 세상이 커질수록 아빠는 아쉬운 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아니 그건 아쉬운 게 아니라 대견한 건데‘라고 말하고 싶었다. 대신 “아빠가 점점 할아버지 같아"라고 말했다. 내가 11살 때 방과 후까지 마치고 집에 온 나를 조용히 부르던 할아버지는 뒷마당에서 은행 꼬치를 토치로 구워주면서 말했다.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어야 해. 네 아빠처럼.” 장남인 아빠는 그런 자식이었다. 자랑스러운 효자. 우리 집안에서 자랑스러움이란, 혼자만 잘 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을 끔찍이 생각하는 마음, 가족에 대한 책임감 하나로 희생하는 마음이다. 할아버지 역시도 그런 증조할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자식이었다. 할아버지는 내 나이 때 고향에서 부모를 여의고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자신의 가족과 여동생의 가족까지. 두 가족을 군산으로 끌고 와 무작정 돈을 벌었다. 토요일 새벽이 되면 시장에 나가 자신의 일주일 치 노동 급여를 두 가족에게 먹일 식량이 담긴 검은 봉지와 맞바꿨다. 일 년 후에는 처남 가족까지 세 봉지. 고모들이 시집을 갈 때도, 엄마가 가족이 되었을 땐 외가댁까지. 가족이 늘어갈수록 할아버지가 들고 오는 봉지도 늘어갔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46년을 가족들에게 검은 봉지로 존재를 표현했다. 그런 탓에 할아버지는 73세라는 나이가 되어서야 노동에서 은퇴를 했다. 그리고 은퇴한지 일주일 만에 농약을 드셨다. 농약을 게워낸 할아버지는 응급실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느꼈을 것이다. 자기 밑에 딸려있다고 생각한 자식들 밑에 어느새 자신이 딸려 있노라고. 죽지 못해 살아난 할아버지는 퇴원 후에 동네를 돌며 빈 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병을 모아 일주일에 한 번씩 슈퍼에 가서 빈 병과 맞바꾼 하드를 검은 봉지에 가족 수만큼 담아왔다. 내가 네 번째 하드를 먹었을 때쯤 할아버지는 해가 쨍쨍했던 초여름 날 뒷마당에서 예고 없이 숨을 거둔 채 발견되었다. 일평생 여름에는 땡볕 아래 온몸으로 더위를 맞고, 겨울에는 비와 눈을 맞아가면서 얻은 노동의 결실이 검은 봉지로 바뀔 땐 뭐가 그렇게 좋아서 발걸음까지 가볍게 만들었나요. 하드로 채워진 희생으로는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기엔 부족했었나요. 아빠는 내가 새로운 장애물에 부딪힐 때마다 아직은 그늘이 되어줄 수 있음에 안심한다. 나는 안심하는 아빠의 얼굴에서 할아버지를 본다. 나는 커질수록 햇빛 아래 땅바닥에 누워 보라색을 띠고 있던 할아버지를 본다.
/백지은 우석대 미디어영상학과 조교
* 백지은 조교는 지난 2017년에 우석대 미디어영상학과 입학했으며, 현재 조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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