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해 먹고 살지? 대학 입학 후 반년이 지났을 무렵, 투박한 질문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변호사, 회계사, 공무원, 방송 기자… 저마다 삐까뻔쩍한 꿈 하나씩 품은 선배·동기들 틈에서 나 혼자만 길을 헤매고 있었다. 이제껏 남들보다 앞서진 못해도 묵묵히 발맞춰 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한 바퀴는 족히 뒤처진 기분이었다. 오래도록 내게 가장 부러운 사람은 꿈을 이룬 자가 아닌 꿈을 가진 자였다. 꿈이 없어 멈춰 서있는 나를 질책하고 또 동정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꿈을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방과 후 수업으로 미술을 배웠다. 학교 수업과 달리 지루하지 않았다. 선을 그을 때 4B연필이 사각사각 갈리는 소리가 좋았고, 붓이 머금은 물의 양에 따라 때론 짙고, 때론 투명해지는 물감이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당시 내 눈에 비친 미술 선생님은 항상 행복해 보였다. 중학교 입학 후에도 미술에 대한 흥미는 여전했다. 그러나 입시 위주의 미술 학원을 다닐 열정은 없었다. 누구를 가르칠 만큼 남다른 소질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게 ‘미술 교사’라는 첫 번째 꿈을 잃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제일 좋아했던 과목은 국어였다. 하나의 시가 기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게 재미있었다. 누구나 느껴본 감정을 누구도 생각지 못한 문장으로 담아낸 소설이 경이로웠다. 한 줌의 말과 글이 깊은 상처를 낼 수도, 뜨거운 위로가 될 수도 있음에 놀랐다. 사람 냄새가 가장 짙은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존경하는 국어 선생님을 만났고, 나도 꼭 그와 같은 ‘국어 교사’가 되리라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 교사가 되고 싶은 걸까? 나의 됨됨이로 아이들을 교육해도 될까? 학교라는 우물에 빠져 다른 직업을 등한시한 건 아닐까? 그날 이후 두 번째 꿈을 잃었다.
고등학교 2학년 봄, 침대에 누워 내가 언제 가장 행복한지 곰곰이 생각했다. 잠잘 때와 TV 볼 때. 머리를 아무리 쥐어짜도 이를 능가할 다른 경우는 떠오르지 않았다. 자면서 돈을 벌 재주는 없었기에 ‘방송 PD’가 되고자 했다. 그중에서도 평소 즐겨보는 다큐멘터리나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원론적으로 단순하게 찾아낸 꿈이었지만 꽤 마음에 들었고, 계획대로 미디어학부에 진학했다. 당연하게도 마냥 즐기는 것과 직접 만드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게다가 살인적인 업무 강도로 인해 또 다른 행복인 ‘잠’을 사수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게 세 번째 꿈을 잃었다.
‘꿈 분실자’로 살아온 지 만 4년. 문득 가구를 제작하고 공방을 운영하는 ‘소목장(小木匠)’에 관심이 생겼다. 홀로 열중하고 고뇌하는 업무 방식이 내향적인 내 성격에 어울린다. 미적 호기심과 가르침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기에도 알맞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다며 동네방네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도 그럴 것이 여름 볕에 끈적하게 녹아내린 아스팔트에 신발이 눌어붙어 옴짝달싹 못하던 내 앞에 짱짱한 새 신발이 주어진 기분이다. 천천히 다시 나아갈 수 있겠구나. 잘하면 그늘 밑에서 숨도 고르고, 냇가에서 물도 마실 수 있겠구나. 내 안에 무한한 가능성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물론 또 무슨 핑계를 대고 이 네 번째 꿈마저 잃어버릴지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세상은 넓고, 꿈은 많다. 또 다른 새 신발을 찾아 나서면 그만이다. 그러니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 내 꿈은 ‘젊은 나이에 성공한 목공방 사장님’이다!
/이민주 고려대 미디어학부 4학년
△이민주 씨는 2018년 고려대 미디어학부에 입학해 꿈을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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