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치과라는 곳은 기계 소리가 들리면 비명이 겹쳐 들리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 탓에 충치가 생기면 치료받을 때 아플까 봐 고통의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치아가 온통 까매지고 아파야만 치과에 겨우 갈 수 있었는데 높은 확률로 의사 선생님께서는 하루라도 빨리 충치를 치료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럴 때면 나를 치과에 데려온 엄마마저도 매정해졌다. 모두가 나를 위하는 것은 알지만 차갑고 쓰고 날카로운 것들이 내 입안을 한 바탕 헤집고 나면 볼이 퉁퉁 부은 채로 울면서 치과를 나와야 했다. 하지만 현재 충치가 생기면 치료의 고통보단 비용의 걱정이 앞선다. 치료의 고통은 잠깐이고 비용의 고통은 쓰고 오래 갔다. 그래서 입안에 조그마한 검은 점이 보이면 비용과 고통이 두려운 마음을 갖고 얼른 치과에 간다, 그래서 대부분 미미한 충치는 충치가 늦게 진행되기 때문에 양치를 평소보다 더 신경 써서 해보고 조금 더 경과를 지켜보자는 소견을 내려주신다. 그럴 때마다 느껴지는 안도감과 동반되는 불안함은 양치를 하기 전 귀찮음, 졸음과 매일 싸우지만, 결국엔 치과에서 이가 썩을 대로 썩어 신경치료를 할 때 안내받은 치료 비용이 무거운 내 엉덩이를 일으키게 한다. 그런데도 칫솔만으로는 내 불안함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치실부터, 어금니 칫솔, 치간칫솔, 워터픽까지 하나둘 양치 도구들이 늘어갔다. 시한폭탄 같은 치료되지 않은 미미한 충치들은 내 신경을 더 곤두서게 하고 충치가 있는 자리는 더욱 힘껏 칫솔질하게 했다. 어느 날은 양치하면서 문득 생각했다. 어릴 땐 충치가 생겨서 아플까 봐 양치했는데, 이제는 하나라도 더 많은 치아를 지키기 위해 양치를 한다니. 그런 의미로 태어나면서 한 자리에 치아가 3개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릴 땐 영구치를 빼면서 성장을 하는 거라고 알려줬으면서, 그다음엔 바로 하나하나가 소중하다고 하냐고 말이다. 그러나 세상 이치는 항상 두 번은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연의 섭리가 그렇다면 받아들이고 최대한 빨리 적응해서 개선하는 수밖에 없다. 살다 보니 모든 이치가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실수한다. 그런 맥락에서 인간관계도 충치가 생기고 뽑는 과정과 비슷하다. 처음엔 나의 세상이 가족에서부터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할 땐 친구로 세상을 서서히 넓힌다. 어릴 땐 나와 동등한 위치가 아니면 나의 감정을 모두 받아주는 사람밖에 없었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나의 감정을 받아주는 사람은 적어지고 남의 감정을 나누거나 받아주는 입장이 된다. 일정 나이를 먹었을 때 관계에 까만 점이 보이면 양치를 최대한 꼼꼼하게 해서 더 이상 썩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런데도 모든 관계에는 끝이 있다. 무던히 노력해도 끝내 뽑아내야 하는 관계. 충치와 달리 희망적인 것은 새로운 관계가 자랄 자리를 남겨두다 보면 어떤 관계로든 빈 곳이 채워진다는 것이다. 미련으로 공간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결국엔 또 다른 아픔을 낳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실수를 온전하게 용서해줄 존재인 자신을 믿고, 미련이 남는 공간을 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충치가 생기면 치과에 가는 것처럼 똑바로 직면해서 깨끗하게 치웠으면 좋겠다. 결국엔 모든 관계를 맺고 끊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 사람은 온전히 자신밖에 없다. 모든 관계를 대체 할 수 있는 존재 또한 나 자신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나고 자라고 뽑아내는 과정을 겪으면서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백지은 우석대 미디어영상학과 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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