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요즘 줄임말 천국에서 살고 있다. 줄임말은 언어의 경제성을 추구하여 해당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동시에 사용자 집단의 유대감을 고양하는 친교의 성격도 있다. 줄임말이 재미를 더하면서 유행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도 사용자의 발화 의도에 따라 언어의 비속함을 드러내기도 하고 언어 파괴의 단초가 된다.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흥미 유발을 위해 줄임말이 상용화된 지 오래이다. ‘결송합니다’(결혼해서 죄송합니다), ‘의느님’이 만든 ‘성괴’(성형 괴물)니 ‘킹받네’(열받네, 화가 나네), ‘완내스’(완전 내 스타일), 갑분싸(누군가 썰렁한 이야기를 하여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짐)는 예능 프로그램 자막에서 쉽게 접하는 언어가 되었다. 이 뿐이랴. 정치 뉴스에서도 ‘소주성’(소득주도성장) ‘윤핵관’, ‘어대명’이 신문지상에서 춤을 춘다.
특히 MZ세대에서 유행하는 언어 양상은 우리의 한글 문법을 파괴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사자성어처럼 사용하는 말이 엉뚱한 의미를 던지고 있을 때, 여기에 친숙하지 않은 어른들은 의아할 수밖에 없다. ‘내로남불’, ‘낄끼빠빠’는 착한 줄임말이다.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쉽살재빙’(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어 빙고), ‘만반잘부’(만나서 반가워 잘 부탁해), ‘할많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까지 알아들을 수 있다면 이미 최신 유행에 적응한 사람이다.
유행어 중 형태적 변이를 활용하여 언어 놀이를 하는 ‘야민정음’도 있었다. “네넴띤, 띵곡, 댕댕이”는 글자의 유사성을 활용한 사례이다. 이의 모양을 잘 보면 ‘비빔면, 명곡, 멍멍이’임을 알 수 있다. “곤뇽, 곰국, 롬곡옾눞”은 180도 회전을 하면 형태소가 ‘육군, 논문, 폭풍눈물’로 보이게 만든 사례이다. “쀼, 뚊”은 ‘부부, 돌돔’을 글자의 압축을 통해 한 글자로 표현한 경우이다.
줄임말은 언어 전달의 효율성을 추구한 면이 있지만, 신어(新語)로 탄생하면서 유희적 측면과 동료 의식의 강화로 연계되기도 한다. 반면에 이러한 유행어나 신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소외시키기도 한다. 어떤 이는 이러한 유행은 영상매체에 익숙하고 짧은 글 주고받기가 일반화된 언어사회에서 발달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장문의 글이나 복잡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느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OECD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실질 문맹률은 75%에 이른다고 하니 걱정이다. 이를 이겨내는 일은 독서밖에 없다.
줄임말이나 신어는 사용자의 소속감과 유대감을 조성하기도 하고 언어를 통한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다. 그 즐거움은 옛 선비들이 했던 ‘한자 파자(破字)’ 놀이처럼 지적 유희면 좋겠다. 이 놀이에는 한자의 획이나 부수를 나누거나 합쳐서 현실을 비판하거나 참신한 지혜가 담긴 영민함이 있었다. 파자 놀이처럼 의미 있는 신어의 탄생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고장의 말을 상황에 맞게 되살려 쓰는 일도 생각할 수 있다. 사투리는 무지몽매한 대중의 언어가 아니다. 그 고장의 정감이 살아 움직이는 아름다운 언어이다.
한가위가 다가온다. 부모와 자녀가 모두 모이는 즐거운 날이다. 한 집에 모여 세대차를 줄이는 퀴즈 대회를 열어 보자. 자녀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어른들이 그 뜻을 맞혀보고, 줄임말로 대화하면서 웃기도 해 보자. 어른들이시여, 아이들 말 알아듣지 못한다고 “킹 받지” 말자. 그냥 한 마디 더 해 보고 그들의 말을 배워보자. 이것이 그들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그러고는 한 마디 던지자. “네 말 솔찬히 재밌다. 인자 엔간히 놀고 싸드락싸드락 책이나 보랑께.”
/김용재 전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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