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 무렵인가. 그쯤이 아마 외할머니가 내 기억 속에 처음 자리 잡은 시기일 것이다. 부모
님이 맞벌이를 했던 터라, 어릴 적 나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외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늦은 아침 눈을 뜨면 할머니 무릎에 앉아 애니메이션 ‘파워레인저’를 보고, 점심시간이 되면 전자레
인지에 갓 돌려 봉긋하게 부푼 계란찜에 밥을 비벼 먹었다. 간식은 주로 얇게 썰어 갈색 설탕을 친 토마토였고, 서너 시쯤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십오 분 정도 떨어진 동네 공원으로 산책을 갔다. 다녀와서는 저녁을 준비하는 할머니의 눈을 피해 화분이 널린 베란다를 넘어 다니다, 자칫 선인장 가시가 손에 박혀 혼이 나기도 했다. 그 시절 외할머니는 내게 엄마이자 아빠, 친구이자 선생님 같은 존재였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보물이었다.
일곱 살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부모님의 직장 문제로 할머니를 홀로 남겨둔 채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후 내 삶에서 할머니의 비중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매일 보던 할머니를 주말에만, 그러다 한 달에 한두 번, 나중에는 명절에나 겨우 찾아가는 수준에 이르렀다. 파워레인저 대신 드라마를, 계란찜 대신 라면을, 토마토 대신 과자를 찾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내게 할머니는 그 전만큼 애틋하거나 소중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건 초등학교 삼 학년 때였다. 어느 가을날 저녁, 엄마와 함께 택시를 타고 급히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어린 내게 치매라는 병은 무척이나 생소하고 아득했다. 단지 할머니가 나를 잊을까 문득 겁이 날 뿐이었다.
“엄마, 그럼 이제 할머니가 나 못 알아보는 거야?”
적막이 깃든 택시 안에서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 그럴 리가. 그냥 조금 더 자주 깜박하실 뿐이야.”
엄마는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히 대답하며 내 머리칼을 쓸어주었지만, 두 눈엔 미세한 불안과 절망이 서려 있었다.
그날 밤 마주한 할머니는 내 걱정과 달리 평소처럼 인자하고 따듯했다. 이후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지만, 삼촌 댁으로 이사한 할머니는 한동안 그 모습 그대로였다. 담당 의사의 말에 따르면, 할머니는 다른 치매 환자들보다 비교적 질병의 경과 속도가 더디고 상태도 양호했다. 날이 갈수록 같은 말, 같은 행동을 더 많이 반복하곤 했지만 그게 다였다. 때문에 내 마음 한편에는 ‘할머니의 병이 기적처럼 흔적도 없이 낫지 않을까-’ 하는 허황된 기대가 일기도 했다.
그로부터 칠팔 년 뒤, 이런 내 철없는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할머니의 병세는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날짜를 잊고, 계절을 잊고, 집에 가는 길을 잊고, 젓가락질하는 법을 잊었다. 말을 잊고, 감정을 잊고, 나의 이름과 얼굴을 잊고, 끝내는 당신마저 새하얗게 잊어버렸다. 공허한 두 눈동자에는 더 이상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담겨 있지 않다.
엊그제 꿈에 외할머니가 나왔다. 고등학생 때부터 종종 있는 일이다. 꿈속에서 할머니는 항상 정신이 온전한 예전 모습을 하고 있다. 나를 ‘우리 강아지’라 부르는 애정 어린 목소리, 푸근하고 개구진 미소, 주름진 손의 온기까지 하나하나 선명하게 느껴진다.
꿈에서 깨면 한동안 죄책감에 젖는다. 치매는 외로워서 앓는 병이라던데, 그때 나는 왜 그리도 쉽게 할머니를 등한시했을까. 오래전 멈춰버린 자기만의 세상에 갇힌 할머니는 혼자 얼마나 고독하고 두려울까. 한때 나의 엄마이자 아빠, 친구이자 선생님이었던 보물은, 이제 까마득한 심해에 가라앉아 더는 닿을 수 없다.
/이민주 고려대 미디어학부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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