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비밀편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09년 초였다. 성균관대학교가 공개한 <정조의 어찰첩(御札帖·임금의 편지 모음)>. 다섯 명 연구자들이 1년 넘게 탈초와 번역 작업에 전념해 공개한 어찰첩의 사료적 가치와 의미는 컸다.
정조의 어찰첩은 공식 사료가 아닌 비공식 사료다. 정조가 보낸 편지의 대상은 심환지. 규장각제학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이 어찰첩의 편지 분량은 6첩 297통이나 된다. 오로지 심환지 한 사람에게만 보낸 편지가 그렇다. 편지를 보낸 시기는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전 4년(1796년~1800년). 정조 말년의 정치적 격동기에 집중되었던 것도 주목을 끈다.
정조는 이 어찰첩에 들어 있는 편지보다 더 많은 편지를 심환지에게 보냈다. 알려지기로는 대략 350통 정도다. 물론 심환지 말고도 다른 신하들과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정조에게 편지는 세간의 상황과 여론을 파악하고 통제하는, 이를테면 국정 통치의 또 다른 수단이었다.
정조는 다른 왕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편지를 직접 썼다. ‘정조처럼 신하와 수많은 비밀편지를 주고받은 왕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평가도 있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썼던 편지가 주목받는 이유는 또 있다. 심환지는 정조 말년, 이조판서와 좌의정을 역임하고 호위대장을 맡는 등 정치적 비중이 막강했던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정조를 온전히 지지하는 충신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조가 탕평책을 강화하기 위해 제도적 장치로 사용했던 장용영을 혁파하거나 정조를 지지하던 충신들을 공격했던 정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정조는 기꺼이 자신의 정적인 심환지에게 수많은 편지를 썼다. 자신의 막후정치를 위해 정보를 얻고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정조는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 담겨 있는 편지의 왕래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래서 편지 관리에 허술한 심환지에게 찢거나 세초해 폐기하라는 지시를 수시로 내렸다. 그러나 이 편지들은 살아남았다. 심환지가 정조의 지시를 묵살하고 오히려 수신일까지 꼼꼼히 기록해 보관해놓은 결과다.
이 어찰첩으로 정조는 ‘선비 군주’로 알려져 있던 이미지에서 ‘현실 정치가’로 새롭게 부상했다. 비밀에 부치고 싶어 했던 편지가 후대에까지 전해져 당대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정조의 정치 스타일과 인간적 면모까지 새롭게 보게 하는 상황은 흥미롭다.
지금은 문자로 소통하는 시대다. 비밀스럽게 주고받은 문자가 공개되어 정치적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적지 않다. 대통령의 문자도 예외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형식만 다를 뿐 소통의 목적이 비슷해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그 본질과 품격의 차이는 크다. / 김은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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