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봄. 갓 대학에 입학해 정신없이 노닐던 새내기 때였다. 몇 주 동안 제집처럼 드나들던 과방 출입문이 어느 날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짤막한 글귀가 적힌 종이 한 장이 문 앞에 떡하니 걸려있는 것이다. 누렇게 변색된 에이포 용지 위에 붓펜으로 어설프게 써 내려간 ‘그럴 수도 있지’. 오른쪽 귀퉁이엔 이름을 알 수 없는 조그만 연분홍 꽃이 두세 송이 그려져 있었다. 이전까지 한 번도 눈에 띈 적 없었지만, 모양새를 보아하니 꽤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듯했다.
알고 보니 역사가 일 년도 더 된 그 캘리그래피는 당시 꽤 친했던 한 학년 위 선배의 작품이었다. 선배는 뿌듯함과 민망함이 반씩 섞인 표정으로 “이게 바로 내 삶의 신조이자 우리 과의 급훈”이라 설명했다. 냉정히 말해 글씨도 그림도 하나같이 엉성하기 짝이 없었지만, 공중화장실 칸막이에서 뜻밖에 명언을 발견했을 때처럼 나는 한참을 제자리에 머물렀다.
‘그럴 수도 있지’의 영어 번역문은 ‘I understand’다. 목적어는 없다. 이해의 대상이 남이 될 수도, 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남과 나의 숱한 허물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포용하는 ‘관용’의 자세가 모진 고행도 경건한 기도도 아닌, 그저 그 간결한 말 한마디에서 비롯됨을 그때 깨달았다. 이에 그 소박한 글귀가 내 맘속 깊이 뿌리 내리도록 몇 번이고 곱씹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2학년이 되었다. 새내기들의 전유물이었던 과방은 더 이상 찾을 일이 없었고, 하루에 한두 번씩 주문처럼 되새겼던 여섯 글자는 자연스레 차츰 흐려져 갔다. 이후 뿌리 얕은 나무가 쉽사리 흔들리듯 살랑이는 바람에도 난 한없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차가 막혀 약속 시간에 늦을 때면 한껏 짜증이 났다. 주문한 음식의 조리 시간이 길어질 때면 곧잘 불쾌감을 느꼈다. 길거리에서 흡연자를 마주칠 때면 마구 화가 솟구쳤다. 그렇게 별거 아닌 일에도 나는 쉽게 분노했다. 다이어트 도중에 떡볶이를 시킬 때면 나 자신을 혐오했다. 시험에서 아는 문제를 틀릴 때면 몇 날 며칠을 후회했다. 아침잠을 못 이겨 오전 수업에 지각할 때면 스스로를 원망했다. 그렇게 사소한 실수에도 나는 크게 자책했다. 가게 점원의 말투가 불친절할 때면 속이 상했다. 대학 동기가 짓궂은 농담을 건넬 때면 혹여 진심일까 마음졸였다. 부모님에게 꾸중을 들을 때면 날 향한 애정의 진위를 의심했다. 그렇게 하찮은 비난에도 나는 깊게 상처 입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이 얘기를 나누던 친구의 입에서 한참 동안 잊고 살았던 내 빛바랜 주문이 무심코 흘러나왔다. “그럴 수도 있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잠시 멍해졌다. 이내 나도 모르는 새 줄곧 너덜너덜해진 내 마음을 자각했다. 내겐 남을 이해할 의지도, 나를 위로할 여유도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금세 달아오르고 금세 식어버리는 가벼운 양은 냄비처럼, 텅 빈 내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바싹 메마른 삭막한 마음은 고작 그 여섯 글자에 다시금 슬며시 촉촉해졌다.
그날 이후 사소한 일로 습관처럼 분노가 치솟거나 마음을 다칠 때면, 가만히 눈을 감고 4년 전 봄날을 떠올린다. 여닫을 때마다 희미한 쇳소리를 내던 육중한 진회색 철문을 떠올린다. 스카치테이프 한 장에 매달려 힘없이 달싹이던 누런 에이포 용지를 떠올린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서른 번쯤 되뇌며 스스로를 다독이던 앳된 나를 떠올린다. 그렇게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조금씩 하자 있는 서로를 너그러이 감싸 안으며 살겠다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이민주 고려대 미디어학부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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