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28일부터 5월 19일까지 53일간 단식투쟁을 하며 기업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목소리를 낸 노동자가 있었다. 체중이 20㎏ 줄어들고 혈압·혈당도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던 그는 “살아서 끝까지 싸우겠다”며 입장문을 내놓으며 투쟁을 중단했다. 이를 지켜본 일부 시민들은 해당 기업 제품 불매운동과 1인 시위 등으로 연대했지만 한편에선 그 기업에서 만든 ‘포켓몬 빵’의 열풍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거대 기업 앞에서 개개인의 연대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후 10월 15일 새벽 20대 여성 노동자가 소스배합 기계에 빨려 들어가는 사고가 발생했고, 사망사고 이틀 뒤인 10월 17일 40대 노동자의 오른손 검지가 절단되었다. 올해 초부터 바로 며칠 전까지 같은 기업에 소속된 노동자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끊이질 않고 있다.
△ 노동현장에서 배운 연대
나는 연대를 노동운동 현장에서 배웠다. 당시 ‘연대’라는 단어를 들으면 연세대학교가 먼저 떠올랐던 고등학교 3학년 때(2012년)였다. 그때 우연히 읽은 기사에서 외국인노동자가 기본적인 권리를 너무도 허무하게, 합법적으로 빼앗기고 있는 현실을 알게 되었다. 약자의 약점을 악용하는 악덕 기업과 고용주들의 존재를 이때 처음 발견했던 것 같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차올랐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일단 더 많은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전북 대안언론 ‘참소리’를 발견했고 타 언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북권 노동운동 사태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약자들의 처절한 절규와 연대, 저항과 투쟁에 대해서 말이다. 당시 전북권에서는 ‘전북고속 총파업’이 가장 큰 이슈였고 기사를 읽고 나니 조금이나마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전주시외버스터미널 옆에 설치되었던 천막을 찾았다. 교복을 입고 쭈뼛쭈뼛 천막 안으로 들어가 방명록에 응원글과 이름을 적는 것으로 나의 연대는 시작되었다. 이후로도 몇 차례 찾아가서 버스노동자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전북지역 버스노동자들은 하루 15~16시간 이상의 장시간의 운전 노동과 월 120~160만 원의 저임금에 오랜 기간 시달려왔었다. 휴식, 식사시간이 보장되지 않아 위장병을 달고 살고 방광염에 걸린 노동자가 대다수였다. 이들이 사측에 바라는 건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근로기준법에 맞게 주 40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과 식사시간, 안전운행시간 보장 등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였다. 학생 신분이었던 내가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오직 연대뿐이었다. 이후 거리 피켓시위, 삼보일배 시위 등을 함께 했는데 다행히 교복을 입은 내가 아저씨들과 함께 피켓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민들의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몇 친구들도 시위에 동참했고 버스노동자 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뜻을 모으는 모습을 보며 연대를 배웠다. 연대의 사전적 의미는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지는 것’ 또는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 너는 나다
1970년 11월 13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며 근로기준법 책과 함께 젊은 육신은 함께 불탔다. 2020년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이하고도 2년이 흘렀지만 우리 사회는 그동안 얼마나 바뀌었을까. 쌍용자동차 노동자 복직투쟁(2009~2019),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투쟁(2007~2022)처럼 길고 험난했던 투쟁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외침은 지금도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강소은 미디어공동체완두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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