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칸치킨 금암점’. 초등학생 시절 단골이었던 동네 치킨집이다. 당시 내가 혼자 치킨 한 마리를 시켜먹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있었다. “..양념 반 후라이드 반 한 마리주세요! 주소는... 아, 아니다. 주소 먼저 말해야 되나.. 여기 전주시 덕진구...” 그렇게 두세 차례 전화 주문 연습을 끝낸 뒤에야 가까스로 수화기를 들 수 있었다. 떨리는 맘으로 주문을 마치고 나면, 아주 가끔은 가게에서 메뉴나 주소를 다시 불러달라는 전화가 오기도 했다. 2~30분 후 대문 앞에 도착한 사장님께 현금을 건네면, 사장님은 맛있게 먹으라며 치킨 봉투를 쥐어주셨다.
‘굽네치킨 녹번점’. 현재 한 달에 한 번꼴로 돈을 쓰는 동네 치킨집이다. 내가 혼자 치킨 한 마리를 시켜먹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있다. 핸드폰 잠금 화면을 풀고, 배달앱을 켠 뒤, ‘주문내역’ 창에서 ‘재주문’ 버튼을 누르기. 그렇게 서너 차례 손가락을 놀리고 나면 치킨 주문은 끝이 난다. 주문 정보가 상세히 기록된 앱 덕분에 가게에서 내게 메뉴나 주소를 다시 물을 일은 없다. 3~40분 후 핸드폰에 ‘배달 완료’ 알람이 뜨면, 뛰쳐나가 현관 밖에 덩그러니 놓인 치킨 봉투를 가져온다.
‘초연결’, ‘초지능’, ‘초융합’으로 표상되는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 오늘날 우리는 정보통신기술(ICT)의 발달로 무제한적 소통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구든 스마트폰 하나만 손에 쥐면 이메일, SNS, 유튜브, 블로그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타인과 교류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음식을 주문하고, 옷을 사며, 미용실을 예약하고, 강의를 듣는다. 또 길을 찾고, 의사의 진료를 받으며, 택배를 부치고, 영화를 본다. 즉, 일상의 거의 모든 부분이 ‘스마트폰’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매듭지어 지고 있다.
그저 똑똑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잽싸고 힘세며 야무지기까지 한 스마트폰은 그렇게 우리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산소가 되었다. 하루 종일 입 밖으로 꺼내는 말보다 카카오톡 채팅창에 입력하는 단어 수가 더 많다. 친구들에게 맛집을 수소문하기보다 네이버의 리뷰와 별점을 신뢰한다. 부모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보다 스마트폰 스크린타임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다. 얼굴 표정으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이를 대변할 이모티콘을 골라내는 데 열을 올린다.
지금껏 우리는 스마트폰으로부터 편리성, 안전성, 정확성, 효율성을 얻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인간성을 잃었다. 서로 간 눈과 눈이 마주치고, 손과 손이 맞닿으며, 말과 말이 교차했던 숱한 순간들이 이제는 ‘데이터화’, ‘디지털화’라는 미명 하에 점차 흐려지고 있다. 맺고 끊음이 쉽고 빨라진 인간관계는 그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지고 있다. 우리 일상을 채웠던 미지근한 온기와 색채가 그렇게 한 줌씩 사그라지고 있다.
가끔은 내 삶이 손바닥 위의 자그마한 스마트폰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든다. 네모반듯하고, 뭉툭하고, 새까맣고, 차갑고, 딱딱하고, 피로한. 그토록 못나고 재미없는 모양이 과연 내 인생의 생김새인가-하는 생각에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처량해진다.
‘등잔’과 바로 그 밑의 ‘그림자’처럼, 오늘날 온 세상에 만연한 ‘연결’의 뒤편에는 그보다 몸집이 큰 ‘단절’이 도사리고 있다. 2022년 현재는 과연 ‘연결의 시대’인가, ‘단절의 시대’인가? /이민주 고려대 미디어학부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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