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나는 왠지 김장 담는 모습을 보면 ‘저 사람들은 진정한 어른이다’라고 혼자 속으로 존경심을 가지곤 했다. 초겨울이면 리어카에 실린 배추 더미가 이집 저집 마당으로 들어가고 동네 여기저기서 김장을 담갔다. 산더미같은 배추와 다라이에 담긴 고춧가루 양념, 고무장갑을 끼고 목에 수건을 둘렀지만 추위로 코가 빨개진 여자 어른들. 고른 두께로 곱게 썰린 무채와 비린내가 나는 젓갈, 알싸한 마늘과 생강. 노란 배춧속과 붉은 고춧가루와 푸른 쪽파가 이루는 선명한 색채의 대비. 그것은 정말이지 오감을 자극하는 현장이었다. 부드럽게 절여진 배추 사이사이 김장양념을 채워서 장독에 차곡차곡 쌓으면 1년치 식탁을 책임질 김장이 되었다. 나는 가끔 절인배추에 빨간 양념을 바르는 과정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어린아이의 부드러운 피부에 매운 양념이 닿으면 안된다고, 어른들은 재미삼아 한두번 발라보게 한 후 서둘러 나를 부엌에서 쫓아냈다. 어린 내가 보기에 김장은 고된 노동과 섬세한 기술이 필요한 삶의 현장이었고 사람이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것의 성대한 기준 중 하나는 김장을 담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김장을 담근 이웃들이 한번 맛이나 보라며 접시에 담은 김치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김장철이면 삶은 돼지고기와 생굴과 갓 담은 김치가 저녁 상에 자주 올랐다. 나는 삶은 돼지고기를 조금 먹었을 뿐 굴도 날김치도 먹지 않았으므로 내 입장에서는 김장철이면 오히려 먹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만은 즐겼다. 김치와 함께 부침개나 내가 먹을만한 것들이 따라오는 일도 있었고, 집집마다 김치의 맛과 모양이 조금씩 다른 것도 흥미로웠다. 옆집에서 온 김치 갈피에서 조그만 새끼 조기가 통째로 발견된 날 우리 가족들은 한참 웃었다. 우리는 김장김치에 해물을 많이 넣지 않았으므로 그 작은 생선을 김치와 함께 으적으적 씹어 먹어치울 자신은 아무도 없었고 양념을 씻어내고 프라이팬에 굽는 것이 어떻겠냐는 우스개가 저녁식탁을 오갔다. 김치 갈피를 헤치며 여기도! 여기도! 하고 작은 생선들을 찾아냈던 그 저녁은 어린 나에게 특별히 흥겨웠던 날이었다.
자라서 직업을 가지고,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키우고, 거울에서 흰머리와 주름살을 어렵지않게 만나게 된 이후로도 나의 어른 되기는 완성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집안일에 익숙해져갔지만 김장만은 쉽게 도전하지 못했다. 해마다 양가 어른들이 보내주시는 김장김치가 넉넉해 김치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고 김치 소비가 많지도 않았다. 어쩌다 배추나 무가 생기면 배추전 무전을 부쳐 먹었다. 하지만 5년전 어느날 텃밭에 취미를 붙인 친구가 배추 세 통과 무 두 통을 선물로 주자 전을 부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분량인 것이 한눈에도 확실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인터넷을 뒤져 초보용 김장 레시피를 검색했고 시장에서 젓갈과 고춧가루를 사왔다. 밤새도록 비장하게 배추를 절였고, 그렇게 얼떨결에 우리집의 김장이 시작되었다.
덜 절여진 배추가 김치뚜껑을 열고 살아 나왔다느니, 김장이 물러져서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다느니 하는 초보김장괴담은 일어나지 않았다. 첫해부터 맛있는 김치가 담가져서 내가 가장 놀랐다. 겨울이 다 가기도 전에 김장김치를 다 먹어치워서 새로 담그기까지 했다. 실은 첫해 김장이 가장 맛있었고 다음 해부터는 첫해의 기적적인 맛이 재현되지 않았다. 레시피를 바꾸지도 않았는데, 첫해 김장의 비결이 뭐였을까? 아마 고소한 텃밭 배추의 위력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따름이다. 이듬해부터 텃밭 배추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맛있는 김장이 만들어졌다. 자식은 평생 어린애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던 부모님도, 내가 김장을 담기 시작하자 갑자기 나를 동등한 어른으로 존중하기 시작했다.
이후로 해마다 배추 여섯 통으로 김장을 담고 있다. 올해는 배추값이 내 김장 역사상 가장 쌌던 해였다. 김치통 하나를 가득 채우면 끝나는 소량 김장이지만 우리 세 식구 1년 먹기는 충분하고, 이웃들에게 한쪽씩 먹어보라고 돌리는 재미는 충분히 누릴 수 있다. 김치를 주고 김치를 받는 재미있는 거래가 일어나기도 한다. 내 김치도 맛있지만 이웃들의 김치는 더 맛있다. 굴과 갓 담은 김치와 삶은 돼지고기로 이 계절의 정찬을 즐기며, 성냥갑 같은 아파트 살이에도 소소하게 남은 이웃간의 정을 기쁘게 누린다.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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