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청자의 본향이 오월이다. 우리나라 역대 왕조 중 오월과 가장 돈독한 국제외교를 펼친 나라가 후백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청자 연구에서 후백제는 거의 초대를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문헌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요사이 전북에서 검증된 고고학 자료로 초기청자를 논의하는 과정에 후백제가 가끔 거론된다.
흔히 푸른 빛깔의 자기를 청자라고 한다. 청자는 인간이 만든 가짜 옥으로도 비유된다. 청자의 푸른색은 태토 속 3.4% 내외의 산화철이 굽는 과정에 환원된 것이다. 중국식 벽돌가마에서 구운 월요 청자는 대부분 황갈색을 띤다. 절강성 북쪽 소흥, 여요 일원에 밀집 분포된 월요는 당나라 때 월주요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우리나라 청자의 제작 기술도 그 출발지가 오월 월주요였다. 한나라 때 처음 시작해 당나라, 오월을 거쳐 북송시대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청자를 생산했던 곳이다. 당나라 절도사 전류가 세운 오월은 월주요를 지배했던 나라로 항주에 도읍을 두었다. 978년 송나라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월주요의 후원으로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2012년 필자는 중국 절강성 일대로 청자 국외답사를 다녀왔다. 처음 찾은 상림호 월주요 벽돌가마는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각 속에 가마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벽돌가마는 장방형 벽돌로 대부분 가로 쌓기 방식을 적용하여 아주 정교하게 만들었다. 벽체는 3~5단 높이로 남아있었고, 가마는 길이 40m 이상 이었다.
절강성 청자 답사는 후백제와 오월을 재회시킨 브릿지였다. 항주만 입구 영파는 해상 실크로드 출발지로 본래 이름은 명주였다. 명주와 전주를 이어주던 바닷길로 40여 년 동안 국제외교를 펼친 나라가 후백제이다. 필자는 영파박물관 주관 ‘천봉취색(千峰翠色)’ 월요 청자 특별전에서 청자를 본 순간 진안 도통리를 떠올렸다.
2014년 진안 도통리 청자 요지 첫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다행히 문화재청과 전라북도, 진안군 발굴비 지원으로 큰 성과를 거두어 진안군 최초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중평마을 모정 아래에서 그 존재를 드러낸 중국식 벽돌가마는 상림호 월주요에서 본 벽돌가마를 그대로 옮겨온 것처럼 쏙 빼닮았다.
안타깝게 진안 도통리 벽돌가마는 끔찍한 모습이었다. 무슨 이유로 최첨단 국가산업단지가 참혹하게 파괴됐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후백제 멸망을 암시하는 변고(變故)가 아닌가 싶다. 만약 고려가 만들고 다시 부쉈다면 그것은 난센스(nonsense)이다. 후백제 멸망으로 벽돌가마를 운영하던 국보급 도공들은 전쟁 포로가 되어 진안 도통리를 떠났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황갈색을 띠는 가장 이른 시기의 청자를 초기청자라고 부른다. 천하제일의 상감청자로 유명한 부안청자보다 200여 년이 앞선다. 진안 도통리 벽돌가마에서 구운 초기청자는 최상급으로 진안청자라고 새 이름도 지었다. 고창 반암리에서도 중국식 벽돌가마에서 초기청자가 쏟아져 후백제와 초기청자의 연관성을 더더욱 높였다.
중국 월주요 청자 제작 기술은 반도체를 능가하는 최첨단 과학의 집약체이다. 고려는 오월과 국제외교가 거의 확인되지 않지만, 후백제는 40년 이상 오월과 혈맹적 국제외교를 펼쳤다. 진안 도통리 벽돌가마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도 잇따라 후백제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후백제와 오월 국제외교의 결실로 청자문화가 곧장 후백제로 전래된 것이 아닌가 싶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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