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자유와 윤리의 균형이 민주주의 핵심 원리”
“진보·보수로 신문을 가둬선 안돼…'사실과 이성' 갖춰야"
대법관 역임한 국내 민법과 언론법 분야 권위자
신문의 위기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포털에 뉴스 콘텐츠를 넘기면서 신문을 읽는 구독자는 거의 사라지고, 뉴스 생산자들만 남아 그 명맥을 겨우 잇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 전성기를 누렸던 신문은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는 흐름 속에서 새로운 살 길을 찾고 있다.
한국 신문은 이 과정에서 혐오와 차별, 배제의 언어로 정치 세를 불리고 정쟁의 도구로서 기능하게 됐다. 종이 활자매체 대신 디지털이 주류가 되면서 이 같은 현상은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언론 소비자들 역시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사고방식이 곳곳에 만연하다.
탈도덕 시대 ‘언론 윤리의 상실’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이런 가운데 한국신문윤리위원회는 지난 4월 김재형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위촉했다.
법률가에게 마저 정파성을 요구하는 시대 “법관을 보수 혹은 진보로 분류해 한쪽에 가두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지난해 9월 대법관에서 퇴임한 그다.
‘법적 이성’을 강조한 김 위원장이 그리는 ‘보도 윤리’와 ‘언론의 이성’은 무엇일까.
지난달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연구실에서 김 위원장을 만나 그의 생각을 물었다.
-한국신문윤리위원장으로 활동하신 지 어느덧 3개월이 지났습니다. 대법관 출신으로 ‘이성’과 ‘윤리’를 강조하신 만큼 부담도 크실 것 같습니다.
“한국신문윤리위원회는 1961년 우리나라 언론윤리 제고를 위한 자율기구로 출범한 이래 62년 간 기능해왔습니다. 긴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기구이기에 그동안 위원회가 쌓아온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입니다. 최근 인터넷과 SNS 등이 발달하면서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뉴스가 정제되지 않은 채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자극적인 뉴스, 사실과 다른 뉴스, 윤리 규범을 지키지 않은 뉴스의 파급력이 정제된 뉴스보다 파급력이 더 큽니다. 이처럼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면서 언론윤리는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이러한 시기 위원장직을 맡게 돼 부담이 큰 것이 사실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언론의 보도 윤리 기준을 두고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국민의 알 권리, 언론의 자유, 취재원의 인권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일 텐데요. 이 부분을 판단할 때 어떤 원칙과 기준을 적용하실 건지.
“언론 자유는 민주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 기둥입니다. 이에 대한 제한은 최소한에 그쳐야 합니다. 그러나 언론이 자유를 무기로 취재원의 인권을 마음대로 침해하거나 사실이 아닌 보도를 해서도 결코 안 됩니다. 그래서 취재원을 보호하고, 가짜 뉴스에 노출될 수 있는 국민을 위한 장치와 윤리 기준이 필요한 것입니다. 언론 또한 자신들의 취재원을 보호할 수 있어야 좀 더 충실한 보도를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국민의 알 권리와 취재원의 인권이 대척점에 있는 경우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죠. 저는 우리 언론이 스스로 윤리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사명감과 이성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위원회는 일방적인 통제나 시정 권고보다 신문사와 기자가 스스로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균형 있는 판단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 헌법 제21조는 ‘언론·출판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같은 법 4항은 ‘언론·출판의 자유가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해선 안 될 것’이라는 단서를 달았지요. 아직 위원장으로 활동한 지가 오래되지 않았기에 어떠한 요소들을 적절하게 조화해 나갈지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최근 우리나라 언론 보도에서 인격권이 강조되면서 지나치게 이를 폭넓게 인정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커지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선진국에서도 범죄자 신상을 대부분은 공개하는데, 한국은 유독 범죄자의 인권만 중시하느냐는 국민적 불만도 높습니다. 만연한 익명 보도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고 보는데 이 부분은 어떻게 판단하십니까.
“나라별로 역사와 법체계가 다르기에 신상 공개의 범위 역시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사회적 분위기와 문화에 따라 법률과 판례도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관련한 법률 개정이 논의되고 있는데, 매우 민감한 문제이기에 제가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피의자 신상 공개나 취재원에 대한 실명 보도에 대해 적절한 기준이 제시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유독 한국의 경우가 언론에 대한 제제가 심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과거 취재원 인용은 실명 보도가 원칙이었어요. 그러다 나중에는 성과 나이만 밝히는 아무개 씨에서 지금은 아예 A나 B로 통일했습니다. 그만큼 한국 언론이 신뢰도도 낮아졌다고 보는 시각도 적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회적 분위기에서 비롯된 일종의 특수 현상이라고 보는데요. 사실 헌법에서 언론 자유를 규정하면서도 명예훼손에 대해 명시한 국가는 많지 않습니다. 과거 우리 언론은 아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힘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고, 인격권은 거의 인정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권한이 있는 만큼 책임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특히 언론 자유가 있다지만 사실에 맞지 않는 보도를 해서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과도하게 특정인의 사생활을 노출시키는 보도를 했다든지 이런 논란들이 많았었죠. 이런 것들이 허용되어선 안 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높았고, 그러면서 미디어 환경 자체에 큰 변화가 왔다고 봅니다.”
-일선 현장에서는 기자들에게 요구되는 신문 윤리가 모호하고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신문윤리강령을 비롯해 신문 윤리에 관한 여러 강령이나 준칙 기준이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때론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러한 준칙은 오랜 경험과 사례에 의해 쌓여온 것으로 사실 보도에 충실하고, 문제가 될 표현과 문구를 순화시킨다면 충분히 지켜나갈 수 있는 사안들입니다.”
-반드시 꼭 지켜야 할 ‘신문 윤리’하나를 꼽으신다면.
“철저한 ‘사실 보도’입니다. 정확하게는 취재에 있어 좀 더 정확한 확인 작업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포털에 기사를 검색하면 문구만 조금 다른 같은 기사들이 대부분입니다. 기자가 취재하지 않고 받아쓰는 게 만연화됐다고 할까요. 이 과정에서 언론사들이 언론중재위에 제소를 당한다거나 소송에 휘말리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결국 언론윤리의 기본은 사실 확인에 기반한 보도라도 볼 수 있겠네요.”
-대법관 퇴임 이후 대형로펌이나 변호사 개업 대신 다시 모교 강단에 돌아오셨습니다. 고액 연봉을 뒤로하고 다시 교수를 하겠다는 결심을 한 배경이 있을까요.
“특별한 배경이나 결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본래 어린 시절부터 장래 희망이 법관 아니면 교수였습니다. 판사 재직 시절 교단에서 제의가 왔고, 오랜 시간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를 하는 데서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전북은 법조 3성의 고장으로도 한때 불렸지만, 그 명성이 예전 같지는 않습니다. 위원장님에게 고향의 많은 관심이 집중되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 있는데, 고향에 대한 추억이나 성장배경이 궁금합니다.
“저는 임실 섬진강 상류에 위치한 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다니고 5학년이 되면서 서울로 전학을 왔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서울에서 공부하는 것을 제안하셨고 그 후로 쭉 서울에서 공부했어요. 잠깐의 어린 시절 기억이지만 고향은 항상 저에게 포근한 존재였고 사회에 나와서도 전북에 대한 애정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배우자(전현정 변호사)도 전주 출신이에요. 우연찮게 전북 사람끼리 인연이 된 거지요.”
△김재형 신문윤리위원장은
김재형 위원장(58) 임실 출신으로 명지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86년 28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사법연수원을 거쳐 공군법무관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1992년 서울민사지방법원 서부지원 판사를 시작으로 3년여간 법관으로 재직했다.
1995년부터는 서울대 법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수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우리나라 민법의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가족으로는 전북 출신의 서울대 법대 후배인 아내 전현정(57)변호사(전 서울지법 부장판사)와 1남 1녀가 있다.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으로 사람의 이성을 존중하며, 판단에 있어 원칙과 자유의 전체적인 조화를 추구한다는 평이다.
2016년부터 2022년까지 6년 간 대법관으로 재직했고, “입법과 사법은 정의라는 공통의 목표를 추구하는 두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대담=김준호 서울본부장·선임기자, 정리=김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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