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3년 만에 루이 14세가 태어났다. 그러나 큰 경사에도 불구하고 왕자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소문이 돌았다. 그 이유는 부친은 여자를 이상하리만큼 멀리했고, 모친은 두 번의 염문설이 날 정도로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이 14세의 모친(안 도트리슈)의 집안은 대단했다. 그녀는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성장하여 신성로마제국의 제위까지 세습 받은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공주였다. 황제의 명예와 가장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가문으로 위세를 떨친 합스부르크가의 번영 뒤에는 정략결혼이라는 수단이 있었는데 “다른 이들에게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라는 시를 보면 이 가문이 얼마나 정략결혼에 진심이었는지 알 수 있다.
루이 13세의 아내, 안 도트리슈는 아름다운 얼굴에 큰 키의 소유자였고 특히, 그녀는 자신의 하얗고 긴 손가락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모든 유럽 왕실들이 이 결혼을 부러워했으나, 루이 13세는 아버지와 같이 반스페인 정책을 옹호했고, 자신을 심하게 학대한 어머니가 추진한 정략결혼에 자존심이 상했다. 사랑이 없는 결혼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불행을 안겨 주었다. 프랑스의 왕비가 된 안 도트리슈는 프랑스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다. 여러 번의 유산으로 남편과 소원해져 프랑스 궁정에서 푸대접을 받게 되자 왕비의 자리를 망각하고 프랑스 국가 기밀을 스페인으로 빼돌렸다. 이것이 발각되자 남편과의 관계는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프랑스 궁정에서 외로움을 느낀 왕비는 버킹엄 공작(1592~1628)과의 스캔들로 온 유럽을 뒤집어 놓았다. 영화로도 여러 번 제작된 알렉산드로 뒤마(1802~1870) 의 소설 <삼총사>에도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등장한다. 외로운 여왕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영국의 버킹엄 공작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낮은 귀족 계층에서 빼어난 외모, 뛰어난 춤솜씨와 언변술로 영국 국왕 제임스 1세(1566~1625)의 마음을 사로잡아 당시, 왕족에게만 부여되던 공작 작위를 받은 인물로 이 사건은 유럽 최고의 미남과 미녀의 스캔들로 기억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륜이라기 보다는 '썸'을 타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역사가들의 중론이다. 왜냐하면 당시 프랑스 궁정에는 왕비를 시중드는 하녀들과 감시하는 눈이 많았기 때문에 외국 대신으로 방문한 버킹엄 공작과 여왕이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버린 루이 13세는 왕비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태어난 루이 14세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추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고, 급기야 프롱드의 난 때, 이것이 빌미가 되어 귀족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다. 어쩌면 루이 14세의 ‘짐이 곧 국가’라고 하는 강력한 절대군주에 대한 열망은 자신의 불편한 출생 배경에 대한 반대급부일지도 모른다.
/권혜수 우석대 교양대학 석좌교수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