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⑬ 금지역, 그리고…] 전북 이야기 실은 기차, 이제 강 너머 남쪽으로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금지역 지난 12월 8일, 남원시 금지면. 신월보건진료소, 금지초등학교 등과 함께 금지역이라는 표기가 화살표 모양의 이정표에 박혀 있었다. 그 크기가 크지 않아 자칫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아무래도 서두르지 말고 싸드락싸드락 댕기라고 그런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농협 건물을 끼고 들어가 우체국과 보건소를 지나 좁은, 그러나 곧게 뻗은 길로 쭉 들어가면, 그 끝에는 금지역이 서 있다. 파란 직사각형 간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얇은 금속판을 세워놓았는데, 다른 역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좀 볼품없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얇은 금속판일 뿐이라, 바람이 불면 웅 웅 하니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 다음에는 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역사(驛舍) 지붕으로서는 전형적이지 않은 것이, 마치 눈썹 아래까지 내려오는 더벅머리처럼도 보인다. 주차된 자동차는 많은데, 인기척은 없었다. 대합실로 들어가는 문도 없었다. 원래는 있었지만, 여객취급 중단 이후로 문을 떼어내고 그 자리를 아주 깔끔하게도 벽돌로 메워놓았다. 벽이 된 문에는 금지역은 직원이 없는 무인역입니다라 쓰인 안내만 붙어 있다. 당연히 겨울이라 그렇겠지만, 이파리 하나 없이 서 있는(또 일부 가지는 죽은 것처럼 보였다) 벚나무들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아무 것에나 감정을 이입하고 보는 인간의 몹쓸 감성일지도 모르겠다. 금지역은 1933년 남원~곡성 구간 개통 때 주생역, 곡성역과 함께 문을 열었다. 주생역과 곡성역 사이, 딱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두 역과의 거리는 6km 정도다. 문을 열 때는 역원배치간이역이었다가, 1980년에 보통역으로 승격한다. 여객수송실적만 보면 의아할 수도 있겠다. 1979년 금지역을 이용한 이가 모두 8만8853명이었는데, 같은 해 옹정역 이용객이 14만3187명으로 더 많았기 때문이다. 옹정역은 건물도 측선도 없는 본격 간이역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자. 그러나 금지역은 옹정역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었다. 1979년 금지역이 처리한 화물은 발송이 3만2750톤, 도착이 4545톤으로 모두 3만7295톤이었다. 전주나 북전주, 남원 등 도시나 공업지대의 역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비슷한 규모의 주생역이나 오수역 등과 비교하면 꽤 수요가 있는 편이었다. 금지역이 할 수 있었던, 아니 할 수 있을 뻔했던 것이 또 하나 있다. 일제 강점기, 송정리역(지금의 광주송정역)에서 광주, 담양, 순창을 지나 경남 진주, 마산까지 이어지는 철도 노선 건설 계획이 있었다. 1922년에 이 가운데 서쪽 끝에 해당하는 송정리~광주~담양 구간이 먼저 개통됐다. 이를 전남선이라 불렀다. 송정리~광주 구간은 광주선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하여간 이후로도 공사는 계속된 듯한데, 순창에 남아 있는 향가터널과 향가유원지 교각이 그 흔적이다. 그러다 1944년, 전쟁물자가 부족해진 일제가 공사를 중단하고 이미 깔려 있던 철길도 철거해 버렸다. 이 철길이 전라선과 만나기로 예정돼 있던 곳이 바로 금지역이다. 어떻게 보면, 전라선과 경전선이 만나는 지금의 순천역과 비슷한 역할을 부여받을 뻔했던 셈. 광복 후인 1965년에 광주~금지 구간 공사를 재개한 기록이 있지만, 이 또한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만약 이 철길이 이어졌더라면, 그 모습이 좀 달라졌을까? 그렇게 그저 평범한 시골 역으로 남게 된 금지역은 1998년 전라선 노반 개량에 따라 한 차례 자리를 옮겼다가 2007년, 여객 취급 업무를 손에서 놓았다. 이듬해에는 무배치 간이역으로 격하됐다. 최근 광주~남원~대구 사이를 잇는 달빛내륙철도 건설이 논의되고 있지만, 논의되는 노선을 지도에서 짚어보면 금지역이 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사람 발길이 끊어진 지 거의 10년, 플랫폼 바닥의 블록 사이로 풀들이 올라와 있었다. 역명판 같은 시설물들은 철거됐고, 이제는 다만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역 이름 쓰인 간판이 네 개 있었고, 녹이 슬어서 삭아서 없앴지. 여기 하나, 저 짝에 하나 그렇게 있었는데, 인자 관리를 않고 사람이 없으니까. 태풍이라도 불면 위험하잖아요. 동행한 코레일 관계자의 설명에 납득이 되다가도, 그래도 뭔가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승강장의 지붕 시설물이라도 남아있는 것을 감지덕지해야 할까. 녹색 진행 신호가 들어왔다. 눈 깜짝할 새 KTX 한 편성이 지나갔다. 확실히, 관리되지 못한 시설물 같은 것이 바람에 날려 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는 열차의 진로를 방해하면 위험할 것도 같다. △에필로그: 다시 만날 그 열차
휙휙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보고 가만히 있노라니 마치 몇 분짜리 단편영화 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같은 칸 앞쪽에서 아이가 부모에게 보채는 소리와 뒷자리에 앉은 승객의 휴대전화에서 울리는 문자메시지를 알리는 띠링띠링 하는 알림음, 문 여닫고 오가는 발소리 등. 기차가 달리며 내는 시-미-라-레-, 덜컹덜컹, 후두둑, 삐이이, 이런 소리에 고명을 올리듯 저녁 소리가 풍성해진다. 복도를 사이로 옆에 앉은 승객이 열차 안의 히터바람에 노곤해진 몸이 풀리는 듯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땅거미 진 어둠 속으로 가로등 불빛들이 고개를 든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철도의 역사는 수탈을 빼놓고는 성립할 수 없다. 일제 강점기에 호소카와 가문이니 삼릉(미쓰비시)재벌이니 하는 자본가들이 달려들어 전라선 철도를 놓으려, 혹은 끌어들이려 했던 것도 결국 수탈과 관련이 있다. 태생은 그렇지만, 일단 놓인 철길은 어떤 식으로든 전북 사람들의 삶을 극적으로 바꿔놓았다. 이리동중 다니던 장하영 씨를 학교에서 집으로 또 집에서 학교로 데려다 줬으며, 춘포 살던 노동자들을 공단으로 실어 날랐고, 신리 주민 이정두 씨가 친구를 만나러 가게 해줬다. 오수 사는 김균자 씨에게도, 남원 사는 조효순 씨에게도 옛 기차의 추억은 선명하다. 그뿐이랴. 현대의 이리(익산)를 만든 것도 철길이었고, 산업화 시기 전주의 물류를 지탱했던 것도 전라선-북전주선 철길이었다. 내일로 티켓 한 장에 의지해 삼례로, 전주로, 임실로 돌며 전북을 맛보는 청년들 모습도, 고속열차 타고 남원에서 내려 봄내음(春香)에 취하는 여행객들 모습도, 모두 철길이 만든 풍경이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일수도, 또 누군가에겐 특별한 여정일수도 있는 길. 봄꽃 나들이로 여행객 발길에 설렘 가득하던 봄, 태양이 아스팔트까지 녹일 기세로 쨍쨍 내리쬐던 여름, 단풍 익고 코스모스 만개해 향수 불러일으키던 가을, 기차 창밖으로 눈 이불 덮은 시골동네 풍경화 펼쳐지던 겨울까지. 다시, 금지역. 이곳에서 남쪽으로 조금 달리면, 물줄기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관촌에서 만났던 그 물이다. 섬진강댐을 지나 순창 땅을 적시고 오수천, 경천, 옥과천과 한 몸이 되어 왔다. 강변으로는 자전거길이 깔끔하게 닦여 있다. 손이 시리고 귀가 얼고 머리는 땅땅 울리는 날씨였는데도, 자전거 여행객들이 유유히 길 따라 다리 밑을 지나갔다. 졸졸 소리 내며 흐르는 이 섬진강 물을 건너면 저편은 이제 전라남도 곡성 땅. 이야기를 가득 실은 남행열차 한 덩어리가 다리를 건넌다. 반질반질 빛나는 평행선, 전북도민의 사연을 침목 밑에 고이 쌓아 올린 전라선 철길은 이제 전북을 벗어나 달린다. /권혁일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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