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 ③<취어> <석남역사>
<취어(聚語)> △보은 장내리 동학집회 1893년 봄에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큰일이 벌어졌다. 동학도 수만 명이 충청도 보은의 장내리에 모여 시위를 벌인다는 소식이 전국에 전해졌다. 인근뿐 아니라 각지의 양반들이 놀라면서 사태 진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고종과 대신들이 모여서 숙의한 끝에 보은에 보낸 도어사 어윤중을 다시 선무사로 임명하여 해산시키는 임무를 맡겼다. 이때 고종은 청나라 군사를 빌려서 진압하자는 말까지 꺼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처럼 청나라 군사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보은군수와 충청감사가 올려보낸 보고문은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동학도들은 낮에 동네 뒤의 냇가에서 진을 치고 있었고 밤에는 본동 민가와 부근 동네에서 유숙하였는데 날마다 오는 사람들이 연속해서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삼가천의 냇돌을 가져와서 돌성을 쌓았고, 주변 야산 봉우리에 깃발을 꽂고 수십 명씩 올라가 있었다. △ <취어>의 사료 가치 보은 관아에서는 이를 제어할 수 없었다. 다만 정탐하는 관리를 보내서 시시각각 동학도들의 동정을 탐지하여 보고할 뿐이었다. 그 내용이 <취어>에 수록되어 있다. 동학도들이 장내리에 집결하기 시작한 날에서 해산한 날까지, 즉 1893년 3월 11일의 탐지 기록부터 3월 29일의 탐지 기록까지 정탐한 보고문을 모은 <취어>는 유일한 관련 기록으로 가치가 있다. <취어(聚語)>라는 이름은 자료를 모아놓았다는 의미이다. 처음부터 계획하여 모아서 편집한 것이 아니라 손에 들어온 자료를 누군가 정서한 것이다. 상소문과 보고문 그리고 전보문으로 구성된 것을 보면 선무사 어윤중이 묶은 것이 아닌가 한다. 주로 시국에 관한 우려가 담긴 내용을 모은 것으로 1893년과 1894년 그리고 1896년에 작성된 자료들이다. 그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893년의 권봉희상소와 보은 장내리집회, 보은옥사와 청풍민요 조사 보고, 그리고 1894년의 동학농민군의 1차봉기, 1896년의 상소문이다. 1894년 기록은 모두 8편으로 동학농민군의 1차봉기 때 기록이다. 여기서 흥미 있는 자료가 <무장동학배포고문(茂長東學輩布告文)>이다. 다음에 있는 자료가 4월 11일자 전라감영 전보인 것을 보면 당시 이 <무장포고문>이 나온 즉시 수록한 것을 알게 된다. <취어>의 중심이 되는 것은 1893년 자료로 보은 장내리집회와 관련한 일련의 보고서이다. 분량도 가장 많아서 전체의 30%가 된다. 이 기록은 다른 자료에서 볼 수 없는 유일본으로 높은 사료가치는 여기서 나온다. △보은집회를 경계한 왕조정부와 청국 · 일본 당시 동학도들은 기치는 ‘보국안민’과 ‘척왜양창의’였다. 부패하고 무능한 관리들에게 경고하는 한편 일본과 서양 열강의 침범을 우려하였다. 서양 공사관은 반외세 움직임에 놀라서 보은집회의 동정을 주시하였다. 서울에서 무도한 일을 멈추지 않던 청국의 위안스카이는 청국군을 보내면 일거에 제압할 거라고 큰소리를 쳤다. 일본공사관은 갑신정변 때 물러선 후 조선을 도모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동학도들은 척왜양을 주장했지만 정부에 요구한 핵심 사항이 민씨정권 축출이었다. 척족 민씨들이 온갖 부정한 짓을 하면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잘못을 지적하며 정권에서 물러날 것을 주장한 것이었다. <취어>는 전국에서 집결한 동학도들의 기상과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려는 시대정신을 전하고 있다. /신영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연구소장 <석남역사(石南歷事)> <석남역사(石南歷事)>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전후하여 정읍(당시 고부) 이평면 장내리 석지마을에 거주했던 박문규(朴文圭, 1879~1954, 號 石南)가 자신의 개인사를 73세(1951년)에 회고록 형식으로 정리하여 자손에게 남긴 문집이다. 손자인 박남순(朴南淳, 1938생)이 보관해 오다가 2016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기탁하였고,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포함되었다. <석남역사>는 다섯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셋째 단원인 '박씨정기역사'에 자신의 생애 및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 이전에 이 지역에서 서당훈장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 또 정확히 어디서 서당을 열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석남역사>의 다음 기록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해 두해 지나가서 8살이 되어 3월 3일 좋은날에 '천자문'을 등고 고개(잔등) 넘어 조솔리로 입학하러 갔다. 선생님 앞에서 인사했는데, 선생님은 고모댁의 웃집으로 동학대장 전녹두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천자문의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을 가르쳐주셨다. 서당 아이들 서너 동무끼리 재미를 붙이며 배워갔다. 선생님의 늙은 아버님이 대신 서서 감독하셨으며 ……“ 이 기록에 의하면 갑오년에 박문규가 16세였다고 하였으므로 동학농민혁명 발발 8년 전인 1886년 이전부터 전봉준은 이평면 조소리에서 서당을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당의 규모는 서당 아이들 서너명이 배웠다는 것으로 보아 크지 않았을 것이며, 전봉준의 부친인 전창혁이 서당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1886년 이전부터 운영되어 오던 서당이 1889년 기축년에 없어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무자(1888)년 대흉년을 만나……40여 호 마을의 대부분 떠나가고 2~3가구만 붙어 있는데……”라는 내용으로 보아 1888년~1889년 있었던 대흉년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석남역사<는 특히 고부농민봉기 발발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1월 8일 말목장날 봉기를 준비한 ‘통문(通文)’이 말목장터 주변에서 돌았다는 기록이 특별히 주목되며, 봉기의 사전준비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동네별로 징과 나팔 등 농악이 집결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이 확인된다. <석남역사>에는 황토현 전투와 전투 직후 고부지역의 상황도 알 수 있다. “초엿새날 새벽이 되자 총소리가 콩 볶듯이 요란하여 나는 아버님과 마을 앞 벌판으로 피난하였다.”의 내용에서 황토현 전투가 4월 6일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농민군에 가담하지 않은 일반 고부민들은 전투상황에 대하여 두려워하며 동네 앞 갈대밭으로 피난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초 6일 새벽부터 날이 새면서 소식을 들으니 전주 병정들이 패했다고 하였다. 만약 병정들이 이겼다면 고부는 도륙되었을 것이다. 천운이 망극하여 병정들은 검사봉에 진을 쳤다가 패진했다 한다.”라고 하여 농민군에 참가하지 않은 채 숨어있던 일반 고부민들도 이 황토현 전투의 승패가 고부군민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염려하면서 농민군의 승리를 고대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황토현 전투가 끝난 후 상황을 살펴보면 “그 후로 동도가 크게 일어나서 면면촌촌에서 전도가 바쁘고 입도인이 발광하였다. 그들은 술과 안주를 먹고 장을 보았다. 거옥한 치성으로 마을 안에 모여앉아 13자 주문을 외기에 정신 없었다.”의 기록에서 보듯이 농민군의 승리 이후 각 동네에서 동학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석남역사>는 당시 농민군에 적대적이었던 관군이나 유림측의 기록이 아닌, 그러면서도 동학농민혁명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겪은 민간인이 남긴 기록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은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더구나 <석남역사>의 저자인 박문규가 전봉준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운 전봉준에게 직접 배운 제자였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석남역사>가 비록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과 장소 및 일자의 정확성이 약할 수밖에 없는 후대의 회고기이지만 다른 자료에서 보기 어려운 생생한 표현들을 볼 수가 있다. 이는 아마도 저자인 박문규 스스로 고부농민봉기를 직접 눈으로 보고 겪었을 뿐 아니라 전봉준에게 교육을 받은 바 있는 자신의 특별한 경험에 기반한 글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