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관] 얼굴들 - 각자의 세계 안에서만 살고 있을 것 같은 세 인물의 이야기
고등학교 행정실 직원 기선은 어느 날 문득 축구부 학생 진수의 존재가 궁금해진다. 기선의 옛 애인 혜진은 회사를 그만두고 어머니의 작은 식당을 리모델링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유일하게 자유로운 택배기사 현수는 이들 사이를 스친다. 각자의 세계 안에서만 살고 있을 것 같은 인물들은 희미하게 겹친다.
'얼굴들'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PROGRAM NOTE
고등학교 행정실 직원 기선은 축구부 학생 진수에게 관심을 끌게 된다. 진수에게 축구부 생활이 어떤지, 학교생활에 불편한 것은 없는지 물어보고 진수의 집까지 찾아간다. 기선의 옛 애인 혜진은 회사를 그만두고 어머니의 작은 식당을 리모델링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기선과 혜진의 이야기가 나란히 진행되고 한동안 시간이 흐른 뒤 둘의 모습이 다시 나온다. 기선은 학교를 그만두고 사보에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택배기사 현수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자 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의 시간을 살아간다.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봤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기쁨으로 환하게 웃음 짓는 얼굴, 화가 나 일그러진 얼굴, 맥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얼굴, 또는 그 표정에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게 되는 얼굴 그 자체. <얼굴들>은 이야기의 기승전결에 얽매이지 않는 영화다.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직접적인 인과 관계는 명확하지 않은 세 인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남동철)
'얼굴들' 이강현 감독이 전하는 PRODUCTION NOTE
영화를 만들 때 다가가고 싶은 레퍼런스 보다는 멀어지고 싶은 레퍼런스가 언제나 중요했다. 같은 맥락으로, 첫 번째 영화를 만든 이후로는 항상 나의 직전 작업에 대한 반동의 힘이 다음 작업을 끌고 나가는 바탕이 되었었다. 세 번째 장편인 얼굴들 제작을 앞두고서도 바로 직전의 영화 보라를 만들면서 쌓인 벗어나고 싶은 무언가의 새로운 작업의 토대가 되었다.
몇 가지만 꺼내어 보자면 우선, 채집을 통한 영화 만들기에 대한 염증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안타깝게도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영화는 결국 어떻게 해도 세상과 인간사에서 가장 포토제닉한 순간들의 모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전작에서의 나의 영화 만들기가 좀 더 극단적인 형태의 채집으로서의 영화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포토제닉 한 순간들의 모음이라는 영화의 본질이 다른 방식의 영화라고해서 변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것이 기쁨이건 슬픔이건, 환희의 순간이건 참혹함의 극한이건, 삶과 세상에서 가장 포토제닉한 순간들을 모아 영화로 만든다는 사실이 나에게 주는 알수 없는 불편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영화를 만드는 자가 이것을 불편해한다는 것은 답을 찾을 수 없는 자기모순일 것이다. 어쨌든 그 극한의 방식 중 채집으로서 영화를 만드는 것은, 두 번째 장편을 끝낼 무렵엔 거의 혐오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세 번째 장편은 밧줄에 몸이 묶인 것처럼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물을 쳐 놓고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식 같은 건,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상태에서 영화가 만들어지길 원했었다.
그런데 이 말들이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라는 제작형태에 따른 차이 중 하나를 선택하는 기준의 문제로 오해되어선 안 될 것 같다. 왜냐하면, 나의 불편함이나 혐오는 이 둘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방금 이 말이 다큐멘터리영화와 극영화가 다르지 않다는 말로 오해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다큐멘터리영화와 극영화는 같은 것이 아니다.
시나리오를 쓰던 시절을 돌아본다. 지난한 과정이었고, 라디오를 많이 들었다, 라는 것 이외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몇 줄의 로그라인-고등학교 선생(원래 주인공의 직업은 고등학교 직원이 아니고 선생이었다)인 한 남자는 어느 날 자신이 담임을 맡은 반 학생이지만 수업에는 들어오지 않는 축구부 학생이 문득 신경이 쓰인다. 남자의 옛 애인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어머니와 식당을 차리려고 한다.- 이외에는 모두가 애초의 구상 속에 없었고, 그때그때 덧붙여질 뿐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여지는 것은 사건의 인과보다 애초부터 존재했던 영화 전체의 비전 아래 병렬적으로 나열되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나리오가 딱히 극작이라고 할 만한 과정을 겪었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지 않으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상세한 지문을 남겨놓았다. 이런 방식은 너무 긴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사람이 삭혀지는 방식이다.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작업의 한 방식이다.
나는 첫 번째 영화를 만들 때, 영화제작의 경험이 전무한 상태였다. 그 이후에도 매 영화가 선택한 고유의 방식은 언제나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이었는데, 마찬가지로 이 영화 얼굴들을 제작할 때도 내가 이 방식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곤 배우가 연기하면 카메라가 찍고 마이크로 녹음한 뒤 편집한다,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영화촬영 현장이라는 것을 구경삼아라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사정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 때와는 다른 차원에서 큰 변수로 작용할 것이란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우선 배우라는 존재. 얼굴들이 실 제작을 목전에 두고서 감독으로서 가장 온 힘을 다한 것은 주연배우들과의 섭외 및 대화 과정이었다. 배우들과의 미팅이 끝나면 나는 탈진상태가 되는 일이 잦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은 다리가 풀려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이 영화 얼굴들에 출연한 주연배우들은 모두 내가 가장 원했던 1순위 배우들 그대로였다. 내가 이 영화를 연출하면서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들에게 혼신의 힘을 쏟은 일련의 과정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에 응답해준 배우들에게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다.
실제 제작이 들어가고 난 이후에는 사실 이런저런 많은 고민을 할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어찌 보면 주어진 조건에서 해야 하는 최소한의 것들을 기계적으로 수행했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난생처음 접하는 낯선 상황들에서, 당연하게도 어떤 경험의 부재가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었다. 그런데 내가 나의 이러한 사정이 몇 가지 지점에선 패착이 될 것이라는 걸 몰랐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 세상에는 있는 법이다. 나는 내가 무엇에 당황하고 힘들어할지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후회할 일이 아니다.
이제 또 어디로 가야하나. 누군가들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건너왔을 시간을, 딴에는 전투를 치르며 돌아 돌아서 오느라 이렇게 더디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효율이지만 그래도 어쨌건 대적해야 하는 것들 앞에서 솔직했고, 본질과의 싸움을 마다치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선 이제 곧 진행할 네 번째 장편도 역시 세 번째 영화를 만들면서 쌓인 결코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출발할 것인데, 특별히 앞으로의 새로운 작업은 두 번째 장편 보라와 세 번째 장편 얼굴들에서 얻은 근본적인 질문들이 마구 섞여 있는 상태에서 모색하게 될 것 같다. 바라건대, 어느 때보다도 더 래디컬 했으면 좋겠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정말 새털처럼 가볍고 자유롭게 영화를 찍고 싶다.
'얼굴들' 이강현 감독은?
2006년 만든 첫 장편 다큐멘터리 <파산의 기술記述>은 서울독립영화제, 암스테르담국제영화제 등 국내외 여러 영화제에 상영되며 주목받았다. 두 번째 작품인 <보라> 역시 영화에 대한 진중한 통찰력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평단과 관객의 고른 호응을 얻었다. <얼굴들>은 그의 첫 장편 극영화이다
'얼굴들' 영화제 상영 및 수상내역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상 (2017) 제13회 제주영화제 신작열전 (2017) 제43회 서울독립영화제 독불장군상/심사위원상 (2017) 제13회 런던한국영화제 특별상영 (2018, 영국) 제23회 인디포럼 인디나우 (2018) 제6회 춘천영화제 본선경쟁 (2019)
방영작품 정보
- 감독/각본 : 이강현 - 출연 : 박종환, 김새벽, 윤종석, 백수장, 전소현, 옥자연 - 우정출연 : 김종수 - 촬영 : 조용규(CGK) - 조명 : 박상욱 - 미술 : 김근아 - 음악 : 장영규 - 편집 : 엄윤주 - 장르키워드 : 드라마/멜로/로맨스 - 프로듀서 : 오영림, 박정혜 - 제작 : 김일권 - 제작/배급 : (주)시네마달 - 개봉 : 2019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