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하니 청춘이다] 늦게나마 발견한 예술 감각, 김제 광활면 용평마을 어르'神'들
고령화 속도가 가팔라지면서 한국 사회 속 전북 역시 고령화율이 전국에서 세 번째로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 이처럼 인구 비중 가운데 시니어층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요즘, 색다른 취미 활동으로 제2의 인생을 맞는 시니어들도 점점 늘어가는 추세다. 평생을 자식들을 바라보며 취미와 특기도 없이 살아왔던 지금의 시니어 중 늦게나마 '뜨거운 도전'을 시작한 김제시 광활면 용평마을 어르신들을 만나봤다. 김제시 광활면에는 어르‘신(神)’들의 나라가 있다. 이곳 용평마을의 어르‘신’들의 나라는 약 5년 전 예비 사회적기업 이랑고랑의 황유진 대표의 문화예술교육 봉사를 시작으로 건국(?)됐다. 처음엔 경계심 가득했던 어르신들을 계속해서 찾아 두드리고 과제를 던져주며, 그들 자신도 몰랐던 내면 속 예술가의 기질을 깨워낸 것이다. 매일 오전 삶의 전쟁터인 논과 밭으로 향하는 어르‘신’들은 오후 1시가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용평마을 경로당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며, 그림과 연극 연습 삼매경에 빠진다. 연필을 잡아본 적도, 낙서를 해본 적도 없던 어르‘신’들은 예술 프로그램을 통해 작품 전시회도 열고, 이제는 이랑고랑 굿즈의 디자인을 책임지는 어엿한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이 중 호미와 쟁기 대신 색연필과 붓을 들고 그날의 영감을 그려내는 어르‘신’들 중 라순애·임화순 씨를 마주했다. "예전에는 쉽게 그려졌던 그림이 이제는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돼 너무 힘들지만, 그림을 그릴 수 있어 행복해요." 갈수록 작품에 고민을 담아내는 진정한 예술가 라순애(84) 씨. 그림 수업이 있는 날이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경로당을 찾아 그림을 그린 단다. 팔십 평생 그림은커녕 낙서도 한번 해 본 적 없었던 할머니 이지만,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욕심이 생겨난다는 게, 라 씨의 설명이다. 이번에는 어떤 그림을 그릴지, 서툰 솜씨로 그려내는 작품 속에 어떤 이야기를 담아내야 할지 등 하루하루 행복한 고민에 빠지곤 한다. 라 할머니는 “처음에는 황유진 대표가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해 그냥 그날 그리고 싶었던 것, 눈에 익숙한 꽃과 새 등을 그려냈다”며 “지금껏 살아오면서 연필을 잡은 적도 없고,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듯 한 작품 한 작품 완성해 갈 때마다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라순애 씨 작품 서툰 솜씨로 완성한 작품이 관심을 받는 현재, 라 씨는 수줍은 소감을 전한다. 그는 “남들이 보면 우스운 실력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에 처음에는 마냥 자랑스럽지만은 않았다”며 “그림에 칭찬을 받을 때면 기분은 좋았지만, 왜인지 모를 의구심이 마음속 자리했다. 하지만 ‘소질 있다’는 아들의 한마디에 그림 작업을 더욱 열심히 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림과 예술교육에 열심히 매진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릴 것은 날마다 생겨, 그릴 수 있다것에 감사할 따름이죠." 집 앞 마당에서 키우는 꽃부터 밭에서 키우는 콩, 예쁜 손주들 등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영감이라는 피카소 임화순 (92) 씨. 21살 때 결혼 해 5남매를 위해 최선을 다해온 그녀의 일생은 밭일과 집안일이 전부였다. 이처럼 구십 평생을 김제에서 살며 손끝이 꺼슬어질때까지 호미와 수세미를 잡아 온 그가 3년 전 미술과 느지막한 사랑에 빠졌다. 자식과 손주 이야기에 함박웃음를 지으며 끊임없이 자식 사랑을 전하는 어르신 이지만, 붓을 잡으면 여느 기성 작가 못지않게 눈빛이 돌변한다. 투박한 손끝으로 그려내는 그의 작품은 임 씨의 미적 감각이 보여주는 듯 오색 빛깔 다채롭다. 임 할머니는 “시골에서 밭 매고, 감자 심고, 콩 따고 그림 그릴 생각도 못 하게 90년을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황 대표가 찾아와서 그림을 그리라니까 그냥 그날 아침에 본 콩, 꽃을 그려내곤 했다”며 “처음에는 부끄럽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림 수업 날만 생각하면 기분이 저절로 좋아지고 설렌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녀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사람들도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끊이지 않다고 하는데, 눈뜨면 보이는 것이 그릴 것인 천지에 살고 있어 행운이라고 생각된다”며 “나이 들어 시작한 취미 활동이지만, 체력이 허락할 때까진 최선을 다해 참여하고 싶다”고 밝혔다. 용평마을에는 그림의 ‘신’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중에는 탄탄한 연기력을 소유한 배우도 숨어있었다. 적지 않은 대사량에 귀여운 실수들이 남발되며 진행되는 연극 연습이지만, 누구 하나 포기하는 사람 없이 끝까지 완주해 내는 그들이다. 실제 이들은 지난해 그림자 연극 ‘광활한 사랑’을 공연해 많은 이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지난해 선보인 연극은 용평마을 어르신 한분 한분의 이야기를 녹여낸 내용으로, 어르신들의 젊은 시절을 엿볼 수 있었다. 용평 마을의 수많은 배우 중 박안나·박점순 씨를 마주했다. "못한다고 겁내지 않고, 그냥 해보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몰두했어요." 용평마을 어르‘신’들의 나라에 가장 큰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 구역의 능력자 박안나(85) 씨. 연기는 물론 그림에서도 재능을 드러내고 있어, 벌써 전국 곳곳 열렬한 팬들을 보유하고 있는 유명 인사다. 연기 수업과 그림 수업 중 가장 적극적인 박 씨의 활발한 성격으로 지난 연극에서 가장 많은 배역을 맡기도 했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대본을 손에 놓지 않는 등 열정을 지닌 모습을 보이지만, 그 역시 황 대표의 문화예술 교육에 처음부터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처음에는 경계심에 선생님들에게 반항도 했지만, 수업 덕분에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하루하루를 기억하는 일기도 쓰고 소설도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전주에서 공연도 하고, 이웃들이랑 모여 연극 연습도 하고 생각해 보면 시골에서 노인들이 모여 방송도 출연하고, 전시도 참여하고 있는 모양새가 참 기묘하다”며 “지난 4년 동안의 시간이 꿈처럼 느껴진다”고 남다른 소회를 전했다. 끝으로 박 씨는”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맨날 웃고 사니, 우울증도 극복하게 됐다“며 “하나하나 할 수 있는 일이 늘어가니 평범했던 일상이 늘 새로워 마음이 벅차오른다”며 “시골에서 농사짓는 이런 노인도 할 수 있으니. 많은 사람이 꿈을 품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내 연기로 누군가를 울렸다는 게 너무 흐뭇했어." 어린시절 아픈 추억을 연기하는 배우, 용평 영화제 여우주연상 주인공 박점순(90) 씨. 밀려드는 밭일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에 남들보다 늦게 발을 내디딘 박 씨지만, 수준급 연기 실력으로 모든 이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남다른 감수성을 보여주는 그다. 그는 “처음에는 밭일 때문에 문화예술 교육에 참여하지 못했었다”며 “그 뒤로 상대적으로 한가한 겨울에 노인정을 찾아 한번 그려본 그림이 취미가 됐고, 이웃들과 어울리는 게 즐거워 문화예술교육에 꾸준히 참여해야겠다 마음먹었다”고 설명했다. 박 씨 역시 지난해 그림자 연극 ‘광활한 사랑’에 출연해 이른 나이 여인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감정을 애절한 목소리와 눈물로 녹여내 표현해 관객을 놀라게 했다. 마지막으로 박 씨는 “돌이켜 생각해 보면 동네 친구들이랑 동생들이랑 함께헸던 모든 교육 시간이 참 재밌었다”며 “나에게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이번 기회가 말로 표현 못 할 정도로 감사할 따름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