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갑질, 이제는 악순환을 끊어야 할 때
▲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인천계양갑 소위 라면 상무로 불리는 기내 승무원 폭행 사건이 대한민국에 커다란 충격을 안긴 이후,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갑을관계와 갑질은 하나의 중요한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됐다. 해당 사건이 발생한 지 5년이 넘은 지금도 국민들의 공분을 이끌어내는 갑질 사건은 끊이지 않는다. 특히 최근 보도되는 사건들을 보면 갑질은 사회적으로 권력과 위세가 있는 대기업이나 일부 특권층만이 저지르는 것이 아닌, 평범한 시민들도 자신보다 힘없는 사람에게 부당한 경험을 강요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정도면 사회 전체에 뿌리깊이 박힌 악습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데이비드 이스턴은 정치를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분배라고 정의했다. 절대 다수의 욕심은 끝없는 그릇과도 같아 아무리 담아도 온전히 채울 수 없기에, 한정된 자원을 그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각자에게 분배하는 작업이 정치라는 것이다. 자연히 그 분배의 규칙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사람은 권력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인간이 모여 사회를 구성하는 이상 필연적인 현상일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돈을 가진 사람(갑)의 수는 적고, 그 돈을 받으며 일하고 싶은 사람(을)은 많기에 자연히 을은 갑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권력에 의한 상하종속관계가 생기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다. 3세기 전의 에이브러햄 링컨도 그 사람의 진정한 인격을 확인해 보고 싶다면, 권력을 쥐어줘 보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 그러나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의 갑질이 만연한 것일까? 필자는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이후의 분단 속에서 이뤄진 압축적인 경제성장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수천 년 동안 이어온 수직적 집단주의 문화 속에서 일제의 식민지 경험과 해방, 그로 인한 외부로부터 주어진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우리 스스로 과거 신분제 사회가 갖는 병폐를 해소할 기회를 앗아갔다. 이런 가운데 전쟁의 폐허 속에서 짧은 순간 이뤄낸 경제적 부는 성장만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일탈을 가져왔다. 다시 말해 식민지와 해방, 분단과 고도성장의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각 개인을 존중하고 서로 평등하다는 인권의식을 중요한 사회적 가치로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수직적인 조직 문화 내에서 갑질은 최대한의 성과를 내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이자 권력자의 당연한 권리로 인식돼 왔다. 나아가 권력자들은 이를 통해 하급자들의 자존감을 무너뜨려 조직과 자신에게 충성케 하는 도구로 활용해 왔다. 이를 학습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약자에게 자신이 당한 행동을 그대로 반복하며 스스로 억압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가 됐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의 의도대로 조종되는 것에 중독됐다. 현재 갑질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권력중독자들이 사회 기준과 규범에 대한 판단이 무뎌지고,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한 환자처럼 행동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지난 2015년 잡코리아가 직장인 604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해당 설문조사에서 갑질을 당해본 경험이 있는 응답자는 88.6%에 달했지만, 본인이 갑질을 해본 적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33.3%에 불과했다. 피해자일 때는 예민하지만 가해자일 때는 둔감해지는 것이다. 이제는 갑질의 사슬을 끊을 때가 왔다. 먼저 우리는 갑질에 대한 명확한 사회적 제재를 마련해야 한다. 갑질을 고발한 내부 고발자들이 배신자로 낙인찍혀 고통 받게 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교육사회화 과정에서 모든 국민은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기본적인 가치를 학습해야 한다. 재산이나 권력과 상관없이 누구나 존엄한 존재이며, 타인 또한 모두 나와 같은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 체득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