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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함께 책을 읽고 건너가자

진화는 용기로 빚어진다. 단순한 이 말은 생물의 진화, 문화의 진화, 정치의 진화, 개인의 진화(성숙) 등 모든 다양한 경우에 다 맞는다. 그것이 용기인 이유는 두려움을 떨쳐내면서 편안함을 박차고 길을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발전하고 변화하는 일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더 키우고 강화하는 일로도 가능하지만, 그보다 더 많게는 아직 갖고 있지 않는 것으로 옮겨 가면서 일어난다. 모든 진화는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으로 탐험을 떠나는 용기이다.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은 알 수 없어서 항상 불안하고 무섭고 이상하다. 거기는 두려운 곳이다.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으로 이동하자면 두려움을 뒤집어쓰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하여 모든 진화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로만 일어난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을 좀 풀어서 옮기면 이렇다. 하나의 씨앗을 커다란 나무로 자라게 하는 것은 재주도 아니고 영감도 아니다. 오직 용기이다. 진화하고자 하면, 용기를 내야한다. 용기를 내지 않으면 진화할 수 없다. 갖고 있는 것을 자신의 정처(定處)로 정하고, 마치 선정(禪定)에 들듯이 거기에 편안해 하고 거기에서 따뜻함을 느끼고 또 그것을 자신만의 진리의 텃밭으로 삼는 한 그것 다음이나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도 닿기 힘들다. 장자는 이것을 정해진 마음(成心)에 갇힌 형국으로 묘사한다. 이런 저런 일들 모두가 이 정해진 마음으로 즉시 해석되고 평가되니 이제 깊이 생각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얼마나 간편한가. 그저 정해진 마음에 맞는지의 여부에 따라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만 두드리면 된다. 그래서 정해진 마음을 가지면 사유가 아니라 감각에 빠진다. 진화는 사유할 줄 아는 사람의 몫이다. 감정과 감각은 숙고를 불편해할 정도로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며 재빠르다. 사유에는 시간과 수고가 들어간다. 당연히 게으른 자는 감각으로 기울고, 부지런 한 자는 감각과 감정을 극복하는 지적인 태도로 사유할 줄 안다. 감각에 빠져서 곰곰이 생각하는 능력이 길러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다음으로 건너가는 과감한 용기가 없다. 그래서 용기란 지적인 태도로 분류된다. 소크라테스가 용기를 지적 인내로 표현한 말은 이치에 맞다. 정해진 마음을 갖고 그것을 진리로 삼는 일만큼 자신을 멈춰 서게 하는 것은 없다. 지혜란 다른 말로 하면 멈추지 않기이다. 이것을 강조한 것으로 <반야심경>보다 더 선명한 것이 있을까. 바로 바라밀다이다. 목적지도 없고 도착지도 없다. 그저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는 것만 있다. 지혜는 바로 건너가기 자체이다. 건너가기라는 동명사가 지혜이다. 지혜로운 자는 어디에 마음을 두거나 멈추지 않는다. 정해진 마음을 가지면 스스로는 우뚝 서는 느낌이 드니 그것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는 하늘을 찌른다. 문제는 정해진 마음을 갖는 순간 곰곰이 생각하는 능력이 점점 사라지고 반성 없이 즉각적으로 등장하는 감각만 커진다는 사실이다. 이런 태도를 가지면, 지식의 영역에서는 지식 생산자의 입장에 서지 못하고 지식 수입자로만 산다. 지식의 생산이 바로 문명의 생산력이다. 지식 생산자의 대열에 끼지 못하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높이에 이를 수 없다. 지식을 수용하는 위치에 빠져 있으면 삶은 종속적일 수밖에 없다. 곰곰이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생산자가 된다. 자유, 독립, 풍요는 다 수입자가 아니라 생산자가 누리는 일이다. 정치적인 성향이 베인 환경에서 그것은 프레임 씌우기로 나타난다. 프레임 씌우기가 얼마나 폭력적인가는 서로 안다. 그러면서도 프레임 씌우기를 계속하는 것은 곰곰이 생각하지 않고 어떤 수고도 들일 필요가 없는데다가 매우 선명하기 때문이다. 종북 좌빨, 보수 꼴통, 토착 왜구, 좌좀 등등은 스스로도 곰곰이 생각하기 싫고 상대에 대해 생각도 해주기 싫다는 의사표시이다. 이런 태도는 매우 간명하고 시원하기 때문에 끊기 힘들다. 끊기 힘들면 시원한 것에 만족하다가 숙고하는 정련을 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개인의 성숙이나 사회의 진화에는 분명한 필요조건이 있다. 곰곰이 생각하는 태도다. 정치적 의사 표시를 프레임 씌우기에만 의존한달지, 지식의 생산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진화의 길은 멀고도 멀 수밖에 없다. 정해진 마음을 약화시키거나 없애는 것은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정해진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고도 깨달음에 이르거나 진화의 동력을 갖는 일은 불가능하다. 개인의 진화(성숙), 사회의 진화, 정치의 진화에 모두 해당되는 말이다. 무위(無爲), 무념(無念), 무아(無我), 정관(靜觀) 등등의 특별한 태도들은 모두 정해진 마음을 약하게 하려는 것들이다. 진화를 궁극으로 밀고 나아가는 모든 가르침에는 이 정해진 마음을 해소하는 절차를 항상 가장 앞에 둔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자들은 그 가르침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회개이다. 정해진 마음과 결별해야 예수의 가르침을 받을 바구니가 준비된다. 회개 없이 예수의 신도가 될 수 없다. 부처의 음성을 마음에 담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참회이다. 참회 없이 부처의 음성을 담으려 들면 안 된다. 참회의 과정을 건너뛰고 해탈을 꿈꿀 수 없다. 회개 없이 천국을 꿈꾸거나 참회 없이 해탈을 꿈꾸는 일은 진화를 포기한 채 함부로 사는 막무가내의 인생으로 이끈다. 해탈이나 참회에는 다 정해진 마음과의 결별이 포함된다. 그런데 정해진 마음과의 결별은 경험한 적도 없고 이해되지 않는 곳으로 건너가는 일이다. 이것도 감각이 아니라 곰곰이 생각하는 사유의 활동이다. 감각적 활동이 아니라 지적인 활동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지적 인내이며 용기이다.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장자는 정해진 마음과 결별하는 용기를 자기 살해(吾喪我)로까지 표현하는 것이다. 장자에게서도 자기 살해 없이 소요유(逍遙遊)의 자유는 없다. 소요유에 이르게 하는 자기 살해, 해탈에 이르게 하는 참회, 천국으로 인도하는 회개가 모두 지적인 태도이며 용기이다. 개인이나 사회의 진화를 꿈꾸는 자들은 먼저 정해진 마음을 기준으로 써서 감각적이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가벼운 태도를 줄이고 곰곰이 생각하는 지적인 태도를 함양해야 한다. 지적인 태도를 함양하지 않고는 어떤 종류의 진화에도 관여할 수 없다. 한 조각의 인식도 내놓지 못하면서 그저 별 의미도 없이 강하기만 한 의견을 내뱉는 허탈한 삶을 산다. 지적인 태도는 여러 가지가 뭉쳐서 만들어지지만, 대표적인 두 가지는 바로 지식을 증가시키는 일과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내공이다. 곰곰이 생각하는 것도 내공이고 용기를 발휘하는 것도 다 내공이다. 겸손도 내공이고 화해도 다 내공이다. 지식의 생산도 내공이고 양보도 내공이다. 우리의 모든 진화에는 지식과 내공이 결부된다. 일은 간단하다. 나와 사회의 진화를 도모한다면, 이제 이 두 가지를 모두 닦는 수밖에 없다. 지식과 내공이 잘 닦이면 우리는 지금 이 단계를 넘어서 다음으로 넘어가는 진화를 이룰 수 있다. 그렇다면, 지식과 내공을 동시에 잘 닦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독서다. 책을 읽어야 한다. 펼친 책을 끝까지 읽는 일이나 읽으려고 산 책을 정말로 읽는 일은 다 인내를 요구한다. 인격적인 단련이다. 지적인 수고를 하는 일이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nard)는 독서를 마법의 양탄자에 비유한다. 독서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아직 경험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은 어떤 곳으로 데려다 주는 마법을 부린다는 뜻이다. 우리가 아직 지식 생산자의 입장에 서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심한 분열상을 겪고 있는 것은 진화의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과 관련되는데, 그것은 독서를 그런 진화가 가능할 정도의 양까지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2015년 UN조사결과 한국인의 독서량은 192개 국가 중 166위이다. 이것도 부끄러울 정도로 적은 양인데, 해가 갈수록 독서량은 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들었다. 문체부가 시행한 2019년 국민독서 실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성인은 연간 독서량이 6.1권에 불과하다. 독서를 하지 않으니 지적인 훈련이 되지 않고, 지적인 훈련이 되지 않으니 사회에는 인식의 교환보다는 반성되지 않은 의견들만 난무하고, 정치는 진영과 프레임 씌우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식은 생산의 시도가 이뤄지지 않는다. 자신과 사회의 진화를 꿈꾼다면, 우선 독서를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한 달에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들끼리 도달할 수 있는 높이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 높이를 넘어서려면 최소한 한 달에 한 권이라도 읽어야 한다. 이런 꿈을 꿔본다. 새 말 새 몸짓으로 새로워지기 위하여 우선 책을 읽는다. 사단법인 새말새몸짓과 함께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읽는 일부터 시작해보자. 독서라는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다음 단계로 건너가자. 진화는 용기로 빚어지며, 용기는 지적 인내이다. 지적 인내는 독서로 제일 잘 길러진다. 책읽기가 보통 물건이 아님을 기억하자.

  • 기획
  • 기고
  • 2020.05.25 20:43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기본이 전부다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힘은 본능적인 동작이 아니라 인위적(人爲的)인 활동력이다. 사람은 인위적이고 의도적(意圖的)인 동작을 해서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점점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한다. 본능적인 동작의 테두리에 갇힌 것이 동물이고, 인위적인 활동으로 본능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학습이 필요하고, 동물에게는 학습이 거의 필요 없다. 누가 더 사람이 되느냐 하는 점은 누가 더 학습하느냐로 결정된다. 학습의 전 과정에 철학을 담아 체계화 한 것을 우리는 교육이라고 한다. 동물이라면 학습이 필요 없으니 교육도 필요 없다. 사람이 사람으로 완성되는 여정에는 반드시 교육이 필요하다. 종교 수련의 전 과정도 다 교육이다. 군대 훈련의 전 과정도 다 교육이다. 교육의 정도가 종교인의 수준을 결정한다. 교육의 강도가 군인의 용맹성을 결정한다. 사회가 작동되는 중심 톱니바퀴가 두 개 있으니 바로 정치와 교육이다.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사회의 정치가 어떠한가라는 질문의 답과 일치한다. 그 사회의 정치가 어떠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사회의 교육이 어떠한가라는 질문의 답과 아주 잘 맞는다.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도 교육의 결과다. 이런 교육에서는 이런 정치가, 저런 교육에서는 저런 정치가 태어난다. 이렇게 본다면, 사회의 뿌리 동력은 교육이다. 그래서 교육이 한 나라 백 년 후의 전망을 결정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교육 무용론은 시대에 맞지 않는 교육 방법에 대한 회의에서 빚어진 착각이다. 교육 무용론은 있을 수 없고, 특정한 교육 방법 무용론은 있을 수 있다. 인간은 다 교육생으로 살다 간다. 문제는 교육 받은 군인이라고 다 용맹한 것은 아니고, 교육받은 종교인이라고 해서 다 수준 높은 종교인인 것은 아니다. 교육 과정을 다 마친 학생이라고 해서 모두 다 창의적이거나 도전적인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사람이 교육을 받는 목적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이다. 교육을 받고도 창의적이거나 도전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능력을 배우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왜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능력을 배우지 못하면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으로 치부하는가. 창의나 도전은 변화를 일으키는 행동이다. 사람은 문명(文明)을 건설하는 존재다. 인간이 한 모든 활동의 총체가 문명이다. 심지어는 문명을 부정하거나 문명을 비판하는 태도 또한 문명적인 활동이다. 문명을 건설하는 활동을 문화(文化)라고 한다. 인간을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문화적 존재로 보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문화는 무엇인가를 해서 변화를 야기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변화를 야기하는 일이 자신에게서나 사회에서 가장 근본적인 활동성이다. 이런 근본적인 활동성을 가진 인간들이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한다. 대답하는 사람보다는 질문하는 사람이, 종속적인 사람보다는 자유로운 사람이, 패륜적인 사람보다는 윤리적인 사람이, 훈고하는 사람보다는 창의적인 사람이, 따라하는 사람보다는 먼저 만드는 사람이, 비굴을 받아들이는 사람보다는 용기 있는 사람이, 답습하는 사람보다는 도전하는 사람이 더 주인행세를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다. 대답, 종속, 패륜, 훈고, 따라 하기, 비굴 그리고 답습보다는 질문, 자유, 윤리, 창의, 먼저 하기, 용기 그리고 도전이 변화를 야기하는 데에 더 적극적인 활동들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앞 쪽에 나열한 것들보다는 뒤 쪽에 나열한 것들이 더 사람다운 활동들이다. 교육의 관건은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이다. 변화를 야기할 수 있으려면 스스로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 지식에 매몰되거나 이념에 빠져 있으면 변화가 힘들다. 알고 있는 것을 수호하거나, 알고 있는 것을 근거로만 세상을 보며, 굳은 신념이 된 이념을 매개로만 세상과 관계한다면 변화는 경험할 수 없다. 자신도 변화를 경험할 수 없고, 세상에 변화를 야기할 수도 없다. 자전거에 대하여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알고 있는 그것들이 자전거를 탈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전거를 타지 못하던 자신이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변화하는 일이다. 우리는 자전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많이 갖게 하는 데에 시간을 거의 다 쓰다가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도전에 나서는 일을 소홀히 하기도 한다. 자전거에 대한 지식이 자전거를 타보려는 용기로 바뀌는 일은 매우 특별한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 매우 특별한 어떤 것이 필요하다. 교육 일선에 있으면서 이것저것을 시도해보았는데, 결국은 교육을 통해서 조그마한 변화라도 일으킬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변화라는 것은 교육의 매커니즘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교육 받고 나서도 교육 받기 전하고 똑같다면 교육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피차간에 지식의 습득이나 축적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교육 환경에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지식을 축적한 다음의 인격적인 변화 혹은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여기서 독립적 인격이나 창의력이나 행복이나 자유나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사랑하는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더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3인칭의 시점에서는 변화를 얘기하고 창의력을 얘기하지만, 정작 1인칭 시점에서는 변화나 창의력에 집중하지 못한다. 변화에 대해서 토론하고 의견을 말하지만, 정작 자신 내부에서의 변화는 일으키지 못한다. 대신에 알고 있는 것이나 믿고 있는 것을 강하게 지키는 일을 더 잘한다. 변화를 중심 주제로 정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도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변화에 대해서 강의하고 토론하여도 정작 변화를 감행하는 인격으로 성장시키는 데에는 항상 부족했다. 강의 시간에 맞춰 허겁지겁 왔다가 급히 두어 과목 강의를 듣고 다음 일을 위해 허둥지둥 돌아가는 모습은 항상 안타까웠다. 심지어는 강의가 길어지면 결혼식 참석 등과 같은 다음 약속 때문에 먼저 가기를 청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 프로그램이 교육 제공자나 수요자 모두에게 다른 여러 프로그램들 가운데 하나로 존재하는 한 별 의미가 없다. 교육이 진행되는 그 앞뒤의 생활에서 다른 것들이 그림자로 밀려나고 그것만 오롯이 고독한 형태로 솟아날 수 있을 때에만 교육 효과가 나타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여러 가지 가운데 다른 스펙 하나를 더 올리는 것 이상이 되지 못했다. 너무 번잡한 일들로 포위된 교육은 효과가 없었다. 많고 번잡한 일들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는 우리 가운데 한 명으로 존재하는 모습이다. 우리로 있으면서 번잡한 문제들에 휩싸여 있을 때의 나는 나로 존재하기 힘들다. 질문, 자유, 윤리, 창의, 먼저 하기, 용기 그리고 도전 등은 우리 가운데 한 명으로 존재하는 사람에게는 출현할 수 없다. 오직 나로 존재하는 사람에게만 있다. 독립적 주체들의 몫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교육의 최종 단계는 독립적 주체 만들기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가장 귀하고 높은 질문은 어쩔 수 없이 나는 누구인가가 된다. 사람이 사람으로 성장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기본이다. 누구나 기본만 갖추고 있으면, 세속적인 일에서나 영적인 일에서나 모든 일을 잘 이룰 수 있다. 기본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기본이 없이 하는 일은 어떤 것도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다. 기본 가운데 기본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바로 독립적 주체로 성장하려는 문을 연다는 뜻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근본 질문 옆에 조금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몇 개의 질문들이 포진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인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 번잡한 일들로 포위된 교육이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질문에 골똘히 빠질 수 있는 고독한 시간 자체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확신한다. 고독한 상태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하고 스스로가 답을 찾아 자신의 존재적 목적을 찾기만 하면, 나머지 모든 일들이 가능해 진다는 것을. 나머지 모든 일들을 수준 높은 상태로 가능케 하는 태도들이 바로 질문, 자유, 윤리, 창의, 먼저 하기, 용기 그리고 도전 등등인데, 이런 태도들은 고독한 상태에서 앞에 제기한 몇 가지 질문들에 집중한 결과로 얻어질 수 있다. 자신을 성찰하는 고독이 동반되지 않은 교육은 성공하기 힘들다. 그래서 요즘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런 꿈을 꿔본다. 내 고향 함평에 조그만 집을 지어서 기본을 닦는 도량을 여는 것이다. 6개월이나 1년 정도의 일정 기간을 정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시간을 갖는다. 학교 이름을 기본 학교라고 짓는다. 다른 지적 활동들도 모두 이런 질문들을 에워싸고 진행한다. 적어도 그날 하루만큼은 온전히 이 프로그램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과만 함께 한다. 서울에서 함평까지 온다면 2시간 30분은 써야 한다. 다른 곳에서 오더라도 최소한 1시간은 써야 한다. 이 2시간30분은 온전히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이다. 도착하여 30분 정도 명상을 하며 고독을 내면화 하고, 내면화 된 그 고독을 힘으로 써서 치열한 지적 토론을 한다. 그리고 늦은 저녁 시간 또 2시간30분의 시간 내내 고독한 상태에서 서울로 돌아간다. 고독이라는 자신 만의 동굴에 적어도 5시간을 머무를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최소한 5시간 동안의 고독이다. 고독을 생산하는 수고와 불편함이다. 수고와 불편함은 고독을 더욱 고독하게 한다. 고독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소한 것들을 일거에 소멸시켜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남길 수 있는 폭탄이다. 독립적 주체로 성장시키는 특효약이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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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20 15:36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문제는 매력이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며 산다. 책을 써도 그것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글을 발표해도 그것이 실린 매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니 결국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삶이다. 목적은 단 하나다. 나의 완성과 더불어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나라)의 독립과 자존도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완성이라고 해 놓으면 그 단계가 있기는 한지, 완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느니, 꿈도 야무지다느니, 완성을 꿈꾸지 않아야 완성된다느니, 잘난 체 한다느니 하고 말도 많을 것이다. 그냥 죽기 전에, 산다는 것이 나에게는 무엇이었는지 정도의 자각만 할 수 있어도 그것을 나는 완성이라고 해버릴 터이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내 깜냥에 열반이니 초월이니 하는 정도의 단어가 어찌 가당치나 하겠는가. 하지만 보살행이니 지적인 삶이니 실천가적 삶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단어들을 남몰래 말해보기는 한다. 가끔은 미학적 삶, 대장부의 삶을 떠올려보기도 하다가, 허파에 바람이 단단히 들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떠올라 바로 머리를 흔들어 털어버린다. 그 정도의 허풍과 이 정도의 소심함 사이에서 이리저리 방황한다. 방황하는 나를 보며 또 방황한다. 지식인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 아파하는 병을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다는 정도의 말을 짓고 그대로 한 번 해 보려도 하고, 지식인은 정답을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 곳에 처하는 사람이다는 말도 지어서 그대로 한 번 해보려고도 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말을 한다. 말하는 자가 감당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짐은 뭐니 뭐니 해도 그 말이 옳은지의 여부다. 누구든지 자신의 말을 옳은 말로 확신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말을 하겠는가. 전문 사기꾼이라도 스스로 옳은 말을 하는 자로 확신하지 않으면 사기 행각은 성공하기 힘들다. 세상의 모든 말들은 각자에게 다 옳은 말이다. 틀린 말과 옳은 말 사이의 다툼은 간단하다. 틀린 말은 지고, 옳은 말은 이겨야 한다는 당위를 동반하기 때문에 옳은 말에게 힘이 실릴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세상의 거의 모든 다툼은 옳은 말들끼리 벌이는 것이 거의 다다. 심지어 예수님과 율법주의자들의 다툼도 이치는 같다. 예수님은 자신이 옳다 하고,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옳다 했다. 우파는 자신이 옳다 하고, 좌파는 또 자신이 옳다 한다. 사회주의자는 끝까지 자신이 옳다 하고, 자본주의자는 끝까지 자신이 옳다 한다. 이러하다면, 세상의 거의 모든 다툼은 옳은 말과 옳은 말 사이의 다툼이다. 그래서 세상은 해결되는 일이 없이 언제나 혼란스럽다. 옳은 말과 그른 말 사이의 다툼은 간단한 일이지만, 옳은 말과 옳은 말 사이의 다툼은 해결난망일 수밖에. 옳은 말과 옳은 말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툼은 논쟁과 토론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우리는 대화로 서로를 설득하여 양쪽이 조금씩 양보하면 된다고 말하지만, 이는 관념에서나 가능하지 실제 세계에서는 없을 일이다. 양보하는 일이 실지로 일어났다면, 이는 필시 말로 한 대화의 힘이 아니라 말을 넘어선 어떤 것의 압력에 의한 것이다. 우파나 좌파도 국익만을 생각하고 국민만을 보고 가면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포용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런 일이 정치 현실에는 없다. 나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본 적이 없다. 그런 아름다운 현상을 목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주도권은 누구에게로 가는가? 그것은 옳고 그름 너머의 다른 어떤 힘을 가진 자에게로 간다. 그래서 주먹이 있고, 정치가 있고, 전쟁이 있다. 주먹도 정치도 전쟁도 옳은 말과 옳은 말 사이의 다툼을 넘어가는 특별한 방식이다. 말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이 논리와 정당성으로 힘을 얻었을까? 논리라는 것은 대부분 힘을 얻은 후에 그 힘을 정당화시켜주는 역할을 하곤 한다. 예수는 무엇으로 힘을 얻었을까? 말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인데,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의 말은 설득력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며, 예수를 십자가에 메달은 자들이 가진 정당성을 자신에게로 옮겨놓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에는 요시다 쇼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막부는 낡았고, 미국을 필두로 한 외세의 침략은 거칠었다. 막부를 타도하고 왕을 모시는 새로운 체제라야 일본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체제개혁을 시도한다. 쇼카손주쿠라는 조그만 학교에서 90여명의 인재를 배양하여 메이지 유신의 실행자들로 키워냈다. 새로운 독립국가로서의 일본을 완성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반 막부 운동을 하다가 막부 세력에 의해 처형이 되지 않았다면, 요시다 쇼인의 말이 제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요시다 쇼인의 말은 말 이상의 어떤 것을 얻어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요시다 쇼인에게서는 말 이상의 어떤 것이 바로 처형당한 사건이다. 요시다 쇼인은 스스로 처형당함으로서 처형한 자들이 가지고 있던 정당성을 자신에게로 뺏어올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지금 좌파가 주도권을 가졌다. 해방 후부터 권력을 잡으려는 집요한 노력이 완성되었다. 좌파가 반공 이데올기로 가해졌던 극심한 탄압을 겪으면서도 결국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좌파의 말은 옳고 우파의 말은 틀렸기 때문일까? 그건 아니다. 좌파는 좌파대로 옳고, 우파는 우파대로 옳다. 나는 좌파가 말 이상의 어떤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옳다고 하면서 버티는 쓰잘데기 없는 긴장을 돌파했다고 본다. 말 이상의 어떤 것이 예수에게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일이고, 요시다 쇼인에게서는 막부로부터 당한 처형이다. 좌파가 가진 말 이상의 어떤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일이나 요시다 쇼인이 처형당한 일에서 조직되는 것과 비슷한 어떤 흡인력인데, 그것을 매력이라 하자. 우파에게는 매력이 없다. 좌파는 이런 매력을 가졌기 때문에 힘의 중심축이 좌파 쪽으로 이동하였다. 삶은 정치 영역에서 종합적으로 노출된다. 정치는 말이다. 그런데 말이란 것이 말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의하지 않으면 설득력이 없다. 말은 말 아닌 것을 영양제로 해서 산다. 말을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말을 압도해야만 매력이 만들어진다. 일찍이 그리스 사람들은 그것을 티메(TIME)라고 했다. 어떤 한 사람이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을 장기간 수행하여 탁월함에 이르면 공동체는 그에게 존경이라는 선물을 준다. 지도자가 발휘하는 힘은 공동체가 주는 이 존경에 의지한다. 말이 아니다. 존경을 받는 사람이 발휘하는 흡인력을 매력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지도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이 티메에 관심을 가지면 이로울 것이다. 지도자는 말 이상의 어떤 것을 가져야 한다. 좌파들은 자신들에게 스스로 부여한 소명을 장기간 수행했다. 반독재 투쟁을 오래 했으며, 통일 운동을 오래 했으며, 노동운동을 오래 했으며, 환경운동을 오래 했으며, 인권운동을 오래 했으며, 빈민운동을 오래 했으며, 참교육 운동을 오래 했으며, 민주화 투쟁을 오래 했다. 그들이 오래 붙들고 늘어졌던 반독재, 통일, 노동, 환경, 인권, 빈민, 참교육, 민주화 등등의 주제가 말은 좋지만 실재로는 엉터리라느니, 결국은 반정부하다가 반국가로 빠져버렸다느니, 이제는 완장으로 전락했다느니, 내로남불의 전형이라느니 하는 비판들은 정치 영역에서 설득력의 확보라는 면에서 말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들은 어쨌든 그 주제를 가지고 청춘부터 말년까지 불사른 투신의 역사를 가졌다. 어떤 문제를 붙잡고 그것을 해결하는 일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고, 그 과업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보았다. 예수의 십자가나 요시다쇼인의 처형과 유사한 것을 자기 자신의 운명으로 삼아본 경험이 있다. 게다가 없는 돈에서라도 이런 과업을 위해 스스로 호주머니를 턴 사람들이다. 후속 세대를 기르기 위해 야학을 했으며, 야학을 위해 자신의 부귀와 출세를 포기해봤다. 자신이 스스로 정한 소명에 자신을 전부 바치고 게다가 목숨까지 걸어본 인간에게 어찌 매력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 과정에서 발각된 인격적 결함들이 가끔 폭로되기도 하지만, 그들이 세운 매력을 뿌리부터 흔들 정도까지는 아니다. 좌파는 말 이상의 어떤 것을 가졌다. 우파는 이런 매력을 건축하는 데에 실패했다. 건국(새정부수립)과 산업화 과정에서 건축했던 매력은 이미 약발이 다했다. 우파가 권력을 뺏긴 것도 한마디로 말하면 산업화 이후까지 지속될 매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력을 가지려면 우선 자신이 해야 할 일부터 해야 한다. 우파는 보편적인 이념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앞세운다. 그래서 우파에게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필수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국방과 조세로 실현된다. 우파는 반드시 군대를 가야하고, 세금을 잘 내야 한다. 국방과 조세가 어찌 우파만이 해야 할 일이겠는가. 좌파에게도 당연한 일인 것은 맞다. 우파에게는 이 두 가지를 당연하게 여기는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감수능력이 좌파보다는 훨씬 더 강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자신의 정치적 근거로 삼아야 한다. 군대를 기피하고, 세금을 회피한 적이 있는 사람들이 우파에 많이 있다면 이는 입우파일 뿐이다. 군대를 기피하고, 세금을 회피한 사람들이 좌파에도 많다고 항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항변으로 자신들을 정당화 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더 문제일 뿐이다. 국방과 조세 방면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우파 진영에 있다면, 이는 이런 사람들이 좌파 진영에 있는 것보다 훨씬 큰 문제다. 좌파에 비해서 우파는 돈이 많다. 좌파들은 좌파 이념의 확장을 위해서 없는 돈에서라도 조금이나마 헐어 바치지만, 우파는 자신의 이념 확장을 위해 지갑을 열지 않는다. 계급의식 자체가 매우 약하기 때문에 정치의식 또한 약하다. 당연히 우파 이념을 확장해야 한다는 의식 자체가 없다. 후속 인재 양성을 위하여 야학이라도 하는 좌파에 비해 우파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공적 헌신보다는 이기심과 탐욕으로 더 뭉쳐있다. 게다가 좌파가 옳지 않다는 것만을 계속 지적할 뿐이다. 좌파가 얼마나 나쁜지, 얼마나 국력을 약화시키는지에 대하여 말 만 하고, 말 이상의 어떤 것을 시도하지 않는 한 좌파를 이길 수 없다. 전체적으로 보면, 우파는 매력을 갖기 어려운 태도를 가지고 있다. 지금 우파 진영에서 벌이고 있는 공천 파동이나 선거 전략이나 인재 등용을 보면 권력을 뺏기고 와신상담을 한 집단이라는 것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참 한가하다. 매력을 건축하려는 파괴적 혁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좌파를 비판하는 것 말고 자신에게만 있는 적극적인 무엇을 가졌는지를 알기 어려운 곳에는 사람의 시선은 고사하고 파리조차 모이지 않을 것이다. 사실 좌파의 매력도 약발은 이미 다했다. 약발이 다한 매력을 살리려고 하니 억지스럽고 염치없는 행동이 난무하고 있다. 이제는 염치고 뭐고 없다. 거짓말도 대놓고 하고, 억지스럽고 앞뒤가 뒤집힌 논리를 구사하면서 부끄러움도 없다. 우리의 비극은 매력을 상실한 두 세력의 매력 없는 충돌에 하릴없이 운명을 맡겨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많은 강의와 교육 일선에서의 경험을 통해 볼 때 말만으로 교육 효과를 얻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다. 말 이상의 것이 요청된다. 그것은 인격적 감화력이나 정서적 친밀감으로도 나타난다. 사명감을 공유하는 연대의식도 좋은 장치다. 어떤 것도 고정된 마음이나 정해진 마음을 흔들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말을 넘어선 말 아닌 어떤 것으로만 가능하다. 우파 좌파 걱정할 여유가 없다. 우선 당장 내가 급하다. 나의 십자가는 무엇일까? 나의 처형장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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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13 19:19

"민주화 다음으로 상승하는 진정한 혁명을 꿈꿔야 한다"

세계는 찰나의 순간에도 가만히 있지 않고 쉼 없이 달라진다. 인간은 세계가 달라지는 속도와 폭에 적응해야 한다. 세계를 자신이 지배한다고 말들은 할 수 있지만, 변화무쌍한 그 세계에 대한 적응의 효과가 크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고, 효과가 작으면 지배당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 적응의 효과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가 거의 모든 인간적 활동의 핵심 기반이다. 가장 효과 있게 적응하는 장면에 우리는 적중(的中)이라는 팻말을 건다. 스콜라 철학자들이 말하는 관조나 동양에서 말하는 중용이나 다 사실은 이 적중을 제대로 완수하기 위한 태도이거나 관점일 뿐이다. 조용히 관찰하기(靜觀)나 무심(無心)이나 무아(無我) 혹은 무위(無爲)도 모두 그렇게 하면 훨씬 더 잘 적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모든 이론과 지식도 다 어떤 특별한 변화 상태를 제대로 포착한 지적 체계이다. 역시 적중의 결과물들이다. 적중은 원래 과녁을 제대로 겨누어 맞춘다는 뜻이다. 한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겨눠야 할 과녁을 정확히 포착한 후 온 신경을 모아 거기에 역량을 제대로 집중시켜야 한다. 근대 초기 일본의 요시다 쇼인은 쇼카숀주쿠라는 조그만 학교를 세워 겨우 2년여 동안 90여 명을 배출한 후, 그들을 앞세워 산업화를 성공시킨다. 같은 시기 조선에는 수백 개의 교육 기관에서 수 많은 젊은이들이 밤을 세워가며 열심히 공부를 했으나 그렇게 조그만 하나의 학교 쇼카숀주쿠 출신들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식민지가 되었다. 우리가 식민지가 된 이유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일본은 그 시대에 해결해야 할 실질적인 문제에 적중하여 부강할 수 있었고, 우리는 그 시점에서 해결해야 할 실질적인 핵심 문제에 적중하지 못하고 그냥 하던 대로 주자학을 외우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이면서 헛발질을 했기 때문이다. 부강한 길을 가지 못하고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모두 위정척사만 부르짖었다. 지금도 우리는 사실 위정척사의 시절을 살고 있다. 배척과 반동의 시절이다. 적중한 후에는 적중의 효과가 일정 기간 유지되는데, 그 효과에도 생로병사가 있다.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다는 큰 원칙이 있지 않은가. 당연히 적중이라는 성취도 정점을 찍은 후에는 부패와 부식과 권태라는 생명 활동을 피하지 못하고 점점 효력을 잃는다. 여기서 이 사실을 인정하는지 인정하지 않는지부터 스스로 물어보자. 그래야 다음 이야기들을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논리적으로나 지적으로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국(새정부 수립)이나 산업화는 우리나라의 성공 사례 가운데 민주화만큼이나 빛나는 봉우리들이다. 이 두 봉우리 없이 우리 기적의 역사를 말할 수는 없다. 건국이나 산업화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과는 어떤 대화도 시작하기 어렵다. 건국이 빛나는 성취가 된 이유는 그 시대에 중심 문제였던 건국이라는 시대 의식에 적중하였기 때문이다. 적중하였다고 해서 건국이라는 주제를 계속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 적중한 후에는 어떤 것도 바로 과거가 되어간다. 건국은 빛나는 성취를 완수한 후에 바로 부식되기 시작하여 다음 시대로 이행해야 한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이행하여 산업화라는 시대 의식에 적중한 후 우리는 또 빛나는 성취를 이룬다. 산업화에 적중하여 성취를 완수한 후에는 그것이 아무리 빛나는 성취라고 해도 부식을 피하지 못하고 또 다음 단계로 이행해야 한다. 우리는 또 다음 단계로 과격한 이행을 해서 시대 의식에 적중하였다. 민주화라는 큰 봉우리를 또 쌓은 것이다. 지금의 시대 의식은 민주화 다음으로의 이행이다. 민주화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말에 기분이 나쁜지 아닌지를 우선 점검하자. 기분이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하면, 당신은 지적이지 않다. 법과 논리보다 감정을 중시하는 인식의 초보적 단계를 지나지 못했다. 산업화를 넘어서기 위해서 조금이나마 산업화를 비판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다음을 말하기 위해서 민주화의 부식 내용을 지적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민주화 세력 사이에는 논리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물론 감정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다음 대화가 가능하다. 봄은 정점을 찍고 나면 바로 봄 자신을 부정하는 준비에 든다. 이것이 봄의 성숙이고, 성숙한 봄의 격조이다. 여름으로의 이행을 받아들인다. 봄이 봄 자신의 성취와 정당성에 취해 여름으로 넘어가기를 거부하면, 봄 자신이 반동으로 전락할 뿐 아니라 전체 자연의 진화를 망친다. 산업화 세력이 산업화에 취해 산업화의 정당성만 고집하면 산업화 세력 스스로가 반동으로 전락할 뿐 아니라 나라 전체의 진보를 해치게 되는 것과 같다. 여름도 여름으로 완성되고 나면 바로 여름 자신의 정당성을 고집하지 않고 가을에 자신의 자리를 양보한다. 그리하여 여름 자신의 명예를 지킬 뿐 아니라 종내에는 전체 자연의 완성에 기여한다. 가을은 자신의 정점을 찍은 후 바로 자신의 정당성을 겨울에 양보한다. 겨울도 마찬가지다. 사계절이 다 이렇게 성숙한 협력을 하면서 전체 자연을 항상 완성의 단계로 유지할 수 있다. 겨울이 겨울 자신의 정당성에 취해 봄으로 넘어가기를 거부하면, 겨울 자신이 반동으로 전락할 뿐 아니라 전체 자연의 진화를 망친다. 민주화 세력이 민주화 시대의 세계관에 취해 민주화의 정당성만 고집하면 민주화 세력 스스로가 반동으로 전락할 뿐 아니라 종내에는 나라 전체의 진보를 망친다. 지금 우리는 이 단계에 있다. 민주화는 부식하고, 새로운 아젠다는 세우지 못하고... 요즘 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정치를 자기 확신에 갇힌 몽환적 통치라 비판하기도 하고, 민주화 세력들이 깃발을 찢어 완장으로 만들어 차고 다니는 것을 비판하기도 한다. 민주화의 부식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름이 자신의 정당성을 고집하느라 가을로 이행하기를 거부하면서 스스로 반동으로 전락하고, 그 결과로 전체 자연의 진보를 가로막는 것과 똑같이, 산업화 세력이 산업화의 정당성만을 고집하며 산업화 다음으로의 이행을 거부하면서 스스로 반동으로 전락하고 역사 발전의 장애물 취급을 받았듯이, 민주화 세력도 과거의 반동 세력들과 전혀 다르지 않게 스스로 반동으로 전락하면서 나라의 진보와 진화를 가로막는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에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나 의식에 적중하지 못하고 자신의 성공 기억에 갇혀서 자신과 국가의 시제를 미래화하지 못하고 과거화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자신의 성숙과 격조를 스스로 포기하면서 부끄러움과 염치를 상실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이 우려의 제일 앞에 대통령이 맹목적 지지자들과 함께 콘크리트처럼 굳건하다. 자신이 자신에게 갇힌 형국이다. 모든 논리와 법은 사회적 활동에 필요해서 나온 생산물들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면 아무 필요 없는 것들이다. 자신이 자신에게 갇혀 고립되어 있다면, 논리도 법도 굳이 필요하지 않다. 자신이 자신에게 갇혀서 유기적 사회성을 잃으면 법과 논리는 필요치 않고 오직 감정이나 감각의 정체 없는 심리에 빠져 논리와 법을 무시하거나 거부한다. 내로남불을 일상사로 삼거나 논리의 환각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이러면 국가의 진화나 진보를 가로막게 되고, 결국은 내 삶을 피폐하게 한다. 지도층의 피폐한 삶은 전 사회를 피폐하게 한다. 나는 이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비판자들을 제압하려는 논리의 환각 상태는 이미 만연해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감정적 악다구니이지 전혀 논리가 아니다. 민주화 투쟁기에 당신은 무엇을 했느냐?라고 묻는 입막음도 있다. 여기에는 그 시기만 우리가 살아야 할 시대라는 자폐적 우월감이 도사리고 있다. 여름에게 절대 양보하지 않으려는 완고한 봄의 기세를 닮았다. 그리고 민주화 시기에 대오를 이루어 힘을 보태던 이름 남기지 못한 대중들을 민주화의 소비재로 격하하고 도외시하는 자폐적 선민의식도 있다. 요즘 현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글을 쓰고 나면 댓글들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 때는 아무 소리도 안 하다가 왜 문대통령만 갖고 그러느냐는 내용도 있다. 감정을 벗고 논리에 집중하면 사람은 치우치지 않는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사적이지 않고 공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감정은 사적이고, 논리는 공적이다. 그러면, 모두가 최순실 게이트라고 말할 때 비교적 빨리 사태를 박근혜 게이트로 정리하고 본질은 박근혜 국정농단이다는 글을 발표할 수 있다. 이렇게 자기가 한 일을 예로 들어가며 글을 써야 하고 자신을 변명해야 하는 공포가 엄습하는 지금은 문장의 수난 시대나 논리의 시궁창 같은 시대이다. 극복의 대상이었던 그때 그 시절이 다시 돌아왔다. 어느 코미디언이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서 한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는 표현은 논리와 법을 무시하고 감정에 휩싸이다가 불편해지면 누구나 쉽게 사용하는 말이다. 시험 중 부정행위를 하다가 발각된 학생이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고 반응했다면, 이는 논리보다는 감정에 호소하여 논점을 흐려버리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단순히 알 권리보다 조금 있다가 알아도 될 권리가 있을 것 같다.는 말로 현 상황을 지배하려 한다. 정말 민주화를 건너온 우리나라의 법무부 장관이 한 말로 상상이 되는가. 이 말이 누가 했는지 모를 때는 화가 났는데, 추미애 장관이 했다는 말을 들으니 이해가 되고 수긍이 된다면, 당신은 아직 논리나 법보다는 감정의 단계에서 살고 있다. 조금 있다가 알아도 될 것은 우리가 정할 테니 너희들은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독재적 태도이다. 대통령 측근 수사 때 검찰개혁 추진하는 건 수사 방해로 비친다. 이 말은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누가 한 말인지 모를 때는 맞는 말처럼 들리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한 말인 것을 알고 나니 듣기 싫어지거나 틀린 말로 들리면 당신은 아직 논리보다는 감정에 빠져 있다. 임미리 교수를 고발하는 일이 정말 가능한 일로 보이는가? 이 일로 화가 나면 당신은 논리적이며 공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상황 논리로 이해하려고 애쓰고, 얼른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싶어지면 당신은 아직 감정을 극복한 정도는 아니다. 논리의 환각 상태에 빠지거나 감정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왜 문제인가. 그것들에 좌우되는 한 우리는 이 시대에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에 적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화 다음의 단계는 선도력을 갖는 단계이다. 과학의 단계이며 인문의 단계이며 논리의 단계이며 법의 단계이다. 종속성을 벗어난 단계이다. 더 독립적이고 더 자유스러운 단계이다. 이 시대의 급소에 적중할 수 있는 능력이 감정인지 아니면 논리나 법인지 잘 살필 일이다. 민주화 다음으로 상승하는 진정한 혁명을 꿈꿔야 한다. 감정을 벗어나 논리력만 회복하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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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18 21:10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혁신은 상승 운동이다

2020년, 새해가 밝았다. 보통은 새해를 새로운 해나 새로워진 해라고 이해하지만, 난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고 본다. 새로운이나 새로워 진은 상태를 형용하는 것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명사를 사는 것이 아니다. 삶 자체는 동사다. 모든 존재가 동사적 형태의 특별한 양태일 뿐이다. 돌도 집도 나무도 해까지도 모두 다 사실은 동사다. 삶은 명사적 상태로 정지하려는 것을 동사화 하는 노력이라고 해도 된다. 그래서 나는 새해를 새롭게 하는 해로 받아들인다. 새로운 상태를 소유하는 것보다 새롭게 하는 동적 활동이 삶의 진실일 것이다. 새롭게 하려는 노력이 없이 느끼는 새로움은 다 허구다. 허구를 피하고 진실에 참여하자. 리더는 보통 사람들보다 진실의 양을 크게 가져야 할 뿐 아니라 진실의 폐활량이 더 커야 한다. 리더의 위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이런 요구는 더 크고 강해진다. 중국의 고대 은나라 탕왕이 그랬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매일 사용하는 세숫대야에다 진실의 폐활량을 키우거나, 최소한 줄어들지 않게 할 요량으로 각성제를 새겨 넣었다. 『대학』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전한다. 일신일일신우일신(日新日日新又日新) 인간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삶이란 새롭게 하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우선 자신에게 각성시키려 애쓰는 통치자의 면모가 보인다. 수준이 높은 통치자의 자세다. 최고의 위치는 최소한 이 정도가 되는 사람이 차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각성제는 찾지 않고 하나의 의견만을 붙잡고 멈춰선 채 고집스럽기만 하면 세상이 엉망진창이 된다. 새로워지려는 노력에 부가한 자신만의 진실의 양, 이것이 공적 자리의 높낮이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진실이라는 단어를 너무 많이 쓰고 있는 느낌이 든다. 내가 이 단어를 이리 자주 쓰는 데에 이유가 없지 않다. 이 정도의 각성제는 진실의 양이 얼마인가로 약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는 탕왕이 세숫대야에 이 문장을 기록하면서 실제로 진실이라는 글자를 가장 앞에다 새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구(苟)라는 글자다. 진실로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 문장은 이렇게 완성된다. 구일신일일신우일신(苟日新日日新又日新) 진실로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새로워지는 일에는 거짓이 없이 착실하고 철저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 이렇게 새로워지는 일에 진실해야 할까? 새로워지는 일이 생명 현상이고, 그 생명 현상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쪼그라들거나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새롭게 하는 일이 혁신(革新)이다. 자기를 가두고 있는 가죽이나 껍질을 벗고 새로워진다는 뜻이다. 이것이 생명 현상인 한에 있어서 새롭게 하는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탕왕이 세숫대야에 새긴 진실로(苟)의 의미이다. 당연히 혁신은 어느 단계에서 수행해야 하는 하나의 과업이 아니다. 그런 과업이 잘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유기체적 조건 같은 것이다. 혁신은 생명을 가진 유기체나 조직이 움직이는 생명 활동이지, 생명 활동과 달리 따로 하는 특수한 과업이 아니다. 니체는 뱀을 들어 이 점을 알려준다. 허물을 벗을 수 없는 뱀은 파멸한다. 의견을 바꾸는 것을 방해받는 정신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정신이기를 그친다. 뱀은 일 년에 한두 번 허물을 벗으며 생명 활동을 한다. 그러나 뱀이 가시에 찔리거나 해서 상처를 입고 거기에 염증이라도 생기면 허물을 벗을 수 없게 되는데, 이런 뱀은 바로 다음 해에 죽는다. 껍질을 벗을 수 없게 되면 죽는 것이다. 구태의연한 생각에 갇혀서 사고와 의식의 신진대사가 멈춘 것을 니체는 의견을 바꾸는 것을 방해 받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미 생명 활동을 활발히 하는 정신으로서는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력은 분명히 사유의 활발한 신진대사 능력을 말함에 다름 아니다. 사고의 신진대사가 막혀 있을 때, 그것을 과격하게 뚫어서 다시 생명력을 복원시키는 일이 혁명이다. 사고의 신진대사가 막힌 상태 안에 갇힌 채 이리저리 수선만 피우는 일은 혁명이라 불리지 못하고 겨우 반항으로 취급될 뿐이다. 답답한 껍질을 벗어던져 새로운 생명 현상을 출현시키면 혁명이고, 답답한 껍질은 벗지 못하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 소란만 피우면 반항이다. 혁명은 새로운 생명력을 주지만, 반항은 구태의연한 생명력으로 죽음의 시간을 아주 조금 연장시킬 뿐이다. 혁명은 진실의 언어가 채우지만, 반항에는 거짓말이 난무한다. 모든 생명 현상에 혁신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동물과 인간의 혁신 사이에는 큰 차이가 크다. 동물의 혁신은 반복하는 혁신이다. 할아버지 뱀이 허물을 벗듯이 비슷한 시기에 같은 방법으로 아버지 뱀도 허물을 벗는다. 아버지 뱀이 하던 그대로 아들 뱀이 허물을 벗는다. 손자도 다르지 않다. 같은 것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동물의 혁신에 혁신이라는 간판을 달아주기는 매우 아깝다. 인간의 혁신은 상승하는 운동이다. 더 나아지는 것이다. 인간의 문명적이고 의도적이며 인위적인 혁신이 혁신이다. 정부수립(건국)의 단계에서 산업화 단계로 상승하고, 산업화 단계에서 민주화 단계로 상승하는 것이 혁신이었다. 정부수립(건국)의 단계를 맴돌거나 산업화를 맴돌거나 민주화를 맴도는 일은 혁신이 아니다. 혁신할 실력이 안 돼서 껍질을 벗지 못하면 맴돌게 된다. 덧셈과 뺄셈을 할 줄 아는 학생이 다양한 형태의 덧셈과 뺄셈만 하고 있으면, 덧셈과 뺄셈의 껍질 안에서 맴도는 것이다. 이 학생이 곱셈과 나눗셈을 할 줄 알게 되는 것이 혁신이다. 덧셈과 뺄셈을 하던 학생이 방정식을 풀 줄 알게 되어야 혁신이 지속되는 것이며, 방정식을 풀 줄 알게 되었다고 또 이런저런 방정식 안에서 맴돌면 혁신이 멈춘 것이다. 방정식을 넘어 기하학의 세계로 진입하면 또 이것을 혁신이라 한다. 우리는 덧셈과 뺄셈을 넘어 나눗셈과 곱셈을 거쳐 방정식을 지나 기하학까지 부단히 상승해야 한다. 이것이 자연스런 혁신적 생명활동이다. 일신일일신우일신(日新日日新又日新)이 진실로[苟] 진행되는 모습이다. 부단 혁신만이 혁신이다. 혁신이 생명활동이기 때문이다. 탕왕은 새로워져야 한다는 뼈대만 말했지만, 니체는 탕왕보다 조금 더 친절하게 살도 붙여 말해준다. 좀 더 구체적인 언급이 있어서 내용과 방향을 가늠하기가 더 쉽다. 니체는 뱀의 생명 활동을 껍질을 벗는 것으로 말하면서 바로 의견을 바꾸는 것과 연결시켰다. 또 의견을 바꾸는 것을 정신 활동의 근본으로 본다. 정신이라면 최소한 정해진 곳에 붙박이처럼 멈춰있지 않다. 이미 있는 지식이나 이론을 그대로 먹어서 누가 요구할 때 원래 모습 그대로 뱉어내는 일인 대답은 정신 활동의 근본에 닿지 못한다. 껍질을 벗는 일이 아니라 정해진 껍질 안에 머무는 일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무장하여 지금 아는 것, 지금 멈춰 있는 곳의 다음으로 이동하려는 욕망인 질문이 정신의 근본을 구현한다. 질문에는 부단히 껍질을 벗으려는 욕망이 작동한다.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사람들은 혁신에 쉽게 나서지 못한다. 질문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사람들만 혁신에 훨씬 부담을 덜 느낀다. 질문 자체가 혁신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긴 시간동안 질문보다는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혁신을 해야 할 때 혁신을 주저하며 제자리를 맴돈다. 혁명을 해야 할 때 혁명 대신에 반항만 하면서 그것을 혁명이라고 포장하며 제 자리를 맴돈다. 지적 훈련을 대답으로만 하다 보니, 의견을 바꾸는 일보다는 한 번 가진 의견을 지키는 것이 더 편하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은 과거를 살지 미래를 살지 못하는 것이다. 혁신이 바로 미래를 사는 연습에 다름 아니다. 사실 우리의 현실은 혁신보다는 제자리를 맴도는 일을 하느라 멈춰선지 이미 오래다. 새롭게 하는 일이 멈추면, 생명 활동이 멈추고 생명력이 고갈된다. 비효율이 쌓이는 것이다. 비효율의 두께가 효율의 두께를 넘어서면서 국가든 생명유기체든 늙고 병들고 죽어간다. 낡은 사고의 껍질에 갇혀 있는 정신은 의견을 바꾸는 것을 방해받고 정신이기를 포기하며 파멸한다는 니체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있다. 인간의 혁신을 동물의 그것과 달리 상승하는 운동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지금 혁신은 무엇이어야 할까? 산업화의 단계에서 혁신에 성공하여 도달한 곳이 민주화인데, 민주화에 도달한 이래로 여태 민주화를 맴돌고 있다. 혁신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가 단단한 껍질로 변질된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최소한이나마 의견을 바꾸는 것을 강요받지 않는 활동 능력을 가진 정신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역할이다. 더 이상 민주화 시대에 젖은 굳은 의견을 바꾸는 일에 주저하면 안 된다. 혁신의 정신을 차리지 않고 껍질에 갇혀 시간을 보내면 그대로 죽는다. 늦었지만, 민주화 다음을 도모해야 한다. 선진화의 길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것이 혁신이다. 뱀보다는 높은 수준의 인간적인 혁신인 것이다. 4차 산업 혁명이라는 전혀 새로운 문명이 기존의 모든 구조를 뒤틀며 새로운 틀을 짜고 있다.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이렇게 판이 뒤틀릴 때 상승하는 혁신에 성공한 나라는 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지위에 올라서고, 그렇지 못하면 종속적 지위에 머무른다. 선진화를 향한 혁신다운 혁신을 도모하는 혁신적 도전 이외에 더 큰 일은 없다. 반항을 혁신이나 혁명으로 착각하지 않는 일부터 시작하자. 새해가 밝지 않았는가. 헌 말 헌 몸짓을 벗고 새말 새 몸짓으로 상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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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22 14:28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타다'가 가련하다

타다의 문제를 접하다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것을 보고 관점의 차이겠거니 하면서 스스로를 달래보기도 했다. 그러나 관점의 차이가 아니었다. 결국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무지가 어떻게 타다의 문제까지 연결되는가. 우리가 보통 안다고 말할 때의 앎은 어떤 것에 대하여 지식을 갖는 것이라고 하나, 그것으로는 앎을 다 설명하지 못한다. 앎은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는 일이다. 앎은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발버둥이다. 이 발버둥은 어디를 향하는가. 아직 이해되지 않은 곳,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을 향한다. 이 발버둥을 통해서 앎은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한다. 즉 미래를 여는 것이다. 미래를 향하는 사람들은 항상 아는 것에 멈추지 않고, 아는 것을 근거로 해서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친 사람들이다. 아는 자는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고, 모르는 자는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주물러 자기 성을 쌓는다. 아는 자는 미래를 열지만, 무지한 자는 멈춰 서서 과거의 것들을 지킨다. 제대로 훈련된 지식인이라면, 미래를 여는 정방향에 서서 발버둥을 친다. 훈련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으면 자기가 쌓은 성 밖으로 감히 나서지 못한다. 성을 나서지 않고 성 밖의 변화에 반응하려는 삶은 힘이 든다. 그런 사람들은 이 힘든 과정을 억지로 견디면서, 그것을 열심히 사는 것으로 포장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을 헌신하는 자로 각색한다. 어쨌든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아는 사람이 있는 나라는 효율적이었고, 거기서 무지가 판을 치면 비효율적이었다. 이치는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다. 효율적인 일이 계속 이어지면 흥하고, 비효율이 계속 이어지면 망한다. 아는 자, 즉 발버둥을 칠 줄 아는 사람들은 어떤 물건을 현상적인 차원에서 감각되는 것, 그것으로만 보지 않는다. 발버둥을 쳐서 감각을 넘어서는 차원으로까지 인식을 확대할 줄 안다. 시간을 돌려 조선 시대로 가보자. 어디선가 조총이 새로 발명되어 조선에까지 들어왔다. 물론 조총도 앎의 발버둥을 칠 줄 아는 누군가가 만들었다. 앎의 발버둥은 발명할 때 한 번만 행사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후로도 사용의 과정에서 계속될 기회가 생긴다. 앎의 발버둥을 치는 사람에게 조총은 보이고 만져지는 현상적 차원의 것이 다가 아니다. 보이고 만져지는 차원을 넘어서서 구조적인 차원까지 이해의 전선을 확장한다. 현상적 이해를 넘어 구조적 이해에 도달한다. 조총 이전의 것이면서 조총에 비견되는 것은 활이다. 조총은 활보다 사거리가 멀고 파괴력이 크다는 사실에만 머물지 않는다. 기능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조총을 주력으로 구성할 전투의 양식이나 대오의 형성이나 훈련의 방식 등은 활이 구성하는 그것들과는 전혀 달라진다. 총체적으로 전쟁의 구조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럼 그 구조는 어떻게 해서 달라지는가. 바로 재료가 달라지고, 제조법이 달라지고, 작동 메커니즘이 달라지면서 다른 구조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조총은 활과 다른 구조로 확장되면서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든다. 이것이 구조적인 차원에서 이해한다는 뜻이다. 보이고 만져지는 현상적 차원에 대해서 앎의 발버둥이 쳐져야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구조의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 무지하면, 이런 인식 차원의 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보이고 만져지는 단계의 현상적 인식에 갇혀 있으면 조총과 활의 차이는 크지 않다. 활에 화살을 걸어 쏠 준비를 하는 것에 익숙해 있는 사람에게는 조총에 화약을 쑤셔 넣어 쏠 준비를 하는 것이 오히려 번거롭게 보일 뿐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조총이 무슨 대단한 신무기냐? 별것도 아니면서 수선스럽기만 하다. 차라리 활이 더 편하다. 조선 시대에도 조총이 들어온 초기에 이런 흐름이 있었다. 이것이 현상적 인식에 머무르는 무지한 방식이다. 구조에 대한 인식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현상적인 단계의 기능에 파묻힌 인식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기능만 보일 뿐이다. 기능만 보면 기능적인 차이로만 그 혁신의 가치를 매기고, 혁신을 별 것 아닌 것으로 과소평가한다. 과소평가하면, 적응이 늦고, 적응이 늦으면 뒤처진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활과 조총은 전혀 다른 물건이다. 무엇인가를 발사하여 사람을 죽이는 기능은 같지만, 각각이 펼치는 구조적인 변화와 맥락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기능적인 차이를 넘어서서 구조와 맥락의 차이를 아는 정도가 되면, 조총에 적응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장전하기에 들어가는 시간을 전술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고안할 것이다. 즉 열을 지어 서서 앞줄에서 발사를 마치면, 그 시간에 화약을 채우던 뒷 줄에서 이어서 사격을 하는 방식으로 전혀 다른 전투 대오를 개발하는 것이다. 전장의 또 다른 세계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조총과 활을 너무 긴 시간 같은 차원에 놓고 비교하며 물고 늘어지다가는 전장의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없다. 조총과 활이 기능적으로는 유사하지만, 구조적으로 전혀 다른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다. 미래를 여는 자와 과거에 닫힌 자 사이의 차이다. 타다와 택시는 기능적으로 보면 유사하게 보일 수도 있다. 구조적으로 보면 전혀 다른 두 가지이다. 작동 시스템이 다르고 운영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조총과 활의 차이와 유사하다. 타다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들이다. 택시보다 별로 혁신적이지도 않다. 조총이 새로 등장했을 때, 활에 익숙한 사람들이 조총에 대해서 하는 말과 똑같다. 타다는 택시가 아니다. 자동차는 마차가 아니고, 택시는 인력거가 아닌 것과 같다. 심각한 일은 타다를 허용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단순히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우리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새로 등장한 것을 환영하기보다는 이미 있는 것들을 지키는 일에 더 익숙하도록 훈련되어 있고, 미래를 여는 일보다는 과거를 지키는 일에 더 익숙하도록 훈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끔찍한 올가미나 덫에 갇힌 형국이다. 우리는 새로운 것들을 환영하거나 미래를 여는 시도를 하는 것보다 이미 있는 것을 보호하고 과거를 따지는 일에 몰두해야 진실한 삶을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도록 훈련되어 있다. 이는 질문보다는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것과 연관이 있다. 대답은 이미 있는 이론과 지식을 그대로 담아 두었다가 누가 요구할 때 그대로 뱉어내는 일이다. 이때 승부는 누가 더 빨리 뱉어내는가, 누가 더 많이 뱉어내는가, 누가 더 원래 모습 그대로 뱉어내는가에 좌우된다. 대답에 빠지면, 원래 모습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원래 모습은 시제로 과거에 해당한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이 채우는 사회는 모든 문제가 과거 논쟁으로 빠지고, 과거를 파헤치는 일에 빠져 있어야 진실한 삶을 사는 느낌이 들게 되어있다. 질문은 궁금증과 호기심이 튀어나오는 일인데, 이 궁금증과 호기심은 본질적으로 아직 해석되지 않은 세계 즉 미래를 향한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질문하는 힘은 매우 약하고 대답하는 능력은 매우 강하다. 이 말의 의미는 간단하다. 우리에게는 과거에 갇히기 쉬운 경향이 있고, 미래를 열기에는 매우 어려운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갇힌다는 뜻이 제도적으로는 규제에 갇히는 것으로 나타날 뿐이다. 새로 등장하는 것에 적극적이었던 때가 있었다. 산업화 시기였다. 산업화를 지내고 나서 민주화를 거치며 지금까지는 다시 과거에 갇혀버렸다. 과거에 갇힌 관료들은 규제를 앞세운다. 모든 새로움은 규제에 갇혀 싹을 틔우지 못하고 고사한다. 드론이 그랬다. 규제를 앞세운 한국의 드론 산업은 처음에는 기술력이 중국보다 앞섰지만, 이제는 존재감이 없어졌고, 규제를 적용하기 전에 먼저 허용을 선택한 중국의 드론 산업은 후발주자로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제패하였다. 여기서 발생했어야 할 이익을 놓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전적으로 국가의 책임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배운 바가 없다. 대통령이 나서서 아무리 인공지능 국가전략을 발표해도 인공지능의 토대인 데이터를 모으는 일이 규제에 갇혀 순조롭지 않다면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크다. 데이터를 모으지 못하면 4차 산업혁명은 없다. 당연한 일 아닌가. 생명공학은 어떤가. 수많은 규제에 갇혀 새로운 시도는 아예 엄두를 못 낸다. 새로운 기술력으로 가능해진 원격의료도 불가능하다. 이 혁명의 시기에 혁명의 흐름에 맞춰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4차 산업 혁명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가 공유 경제이다. 타다의 문제는 단순히 타다에 한정되지 않는다. 새로운 형태의 공유 경제를 경험하느냐 못하느냐와 직결된다. 이런 경험의 정도가 점점 쌓이면서 4차 산업 혁명의 적응 능력을 기르는 데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타다의 금지는 이 적응 능력의 축적을 금지하는 것과 같다. 2년 전에 워싱턴에 갈 일이 있었다. 가기 전부터 나는 우버를 타볼 계획을 세웠다. 우버을 타면서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 속으로 진입한 느낌을 받았다. 그 편리함도 매우 만족스러웠지만, 소비자의 선택이 매우 강한 주도권을 행사하며 작동되는 매우 특별한 느낌도 받았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타다 논쟁에서 가장 우스운 일은 소비자(이용자)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왜 소비자에게는 묻지 않는가. 고정된 제도의 틀만 다루다 보니,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소비자를 고려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진실은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소비자에게서 확인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경험과 이용의 주체는 소비자이다. 나중에는 결국 소비자가 결정한다. 문명의 흐름에 맞는 새 일을 시도하는 일 자체도 어려운데, 과거에 갇힌 규제로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들을 더 어렵게 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의 국가는 철저하게 과거에 갇혔다. 격려는 못 할망정 방해는 말아야 한다. 다른 나라들과 경쟁해야 할 사람들을 규제와 싸우게 하여 진을 빼는 일은 말아야 한다. 새로운 일을 꿈꾸는 사람이 허가권을 가진 관청을 떠올리기만 해도 우선 가슴이 답답해진다면, 이는 발전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최대의 격려는 허용하는 일이다. 국가의 발전은 규제에 있지 않고 허용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미래는 규제할 수 없다』는 구태언의 책 제목이 절규처럼 들려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국가를 관리하는 관료들이나 정치인들은 한 번 읽어봤으면 하는 시 한 토막을 적는다. 얼마 전에 새로 번지가 생긴 땅에/한 채의 집을 지은 나는/세 식구의 가장으로서/나의 하늘과/별과/구름과/시에게 이르노니/너희 마음대로/떴다 지고/흐르다 멈추고/왔다 가거라!(이창기 즐거운 소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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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17 20:06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본 것과 믿는 것 사이에서

1990년 8월 23일 어느 시간, 만 31살이 조금 넘은 나는 홍콩행 비행기를 탔다. 처음 타보는 비행기가 국제선이어서 좀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국제선은 국내선을 충분히 타 본 후에 타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었다. 내게 홍콩행 비행기는 홍콩을 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목적은 위도 상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는 하얼빈이었다. 하얼빈에서도 흑룡강 대학이 최종 목적지였다. 당시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서 거의 모든 방면에서 교류가 되지 않을 때라 비행기도 바로 가는 것이 없었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의 하얼빈 공항에 내리니 저녁 7시가 조금 넘었었다. 어둠이 많이 내려앉았고, 대륙 북방의 서늘한 기운이 벌써 깊은 가을처럼 느껴졌다. 공항은 한국의 지방 소도시 버스 터미널 같았다. 지방 소도시 버스터미널처럼 보이는 공항을 보고 중국이 경제적으로 매우 낙후한 나라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공항을 떠나 흑룡강 대학까지 오는 풍경은 아직도 내게 깊이 새겨져 있다. 이것이 중국의 첫 인상이다. 사람들은 어깨에 별 이득도 없는 무거운 짐 하나를 진 채 그저 걷기만 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사람들처럼 맥이 없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공항이 남루한 것은 공항 자체의 탓도 있지만, 공항을 채운 사람들의 표정과 걸음걸이가 그렇게 보이도록 한 탓이 더 큰 것 같았다. 삶의 생기가 돋아나지 못할 어떤 덫에 갇힌 것 같았다. 정비되지 않은 길 양 옆으로는 군인인지 민간 경비원인지가 애매한 사람들이 긴 총을 메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성거렸다. 감시할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자세다. 공항을 훨씬 떠나 시내에 가까워 오면서도 공항에서 발견했던 무기력과 가난과 감시와 통제라는 음산한 기운은 내 인식의 언저리를 떠나지 않았다. 첫인상은 상당히 오래갔다. 강렬해서 오래 가기도 했지만, 하얼빈에서 사는 내내 그런 것들이 매일매일 경험되었기 때문이다. 하얼빈이라는 낯선 곳으로 오기 전에 학교생활만 줄곧 했던 나는 비판적인 지식인의 형상으로 채워진 분위기 안에 잠겨 있었다. 그 분위기는 내가 거기에 얼마나 친화적이었었는지 상관없이 마치 컴퓨터의 바탕화면처럼 보편적이었다. 내가 대학 1학년 때 대통령이 자신의 심복에게 피격되어 사망했다. 군대 가기 전 2년간의 대학 생활동안 기말고사를 봐 본 적이 없다. 기말고사 기간까지 수업이 진행되기 어려울 정도로 학생들은 반독재 투쟁에 여념이 없었고, 심지어 경찰들이 교정에까지 들어와 머물렀다. 매 학기 중간도 못 가 휴교를 반복했다. 박정희를 거칠게 욕하는 일이 지식인에게는 매우 당연시 되었다. 대부분의 젊은 학생들은 학습이 깊어지면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파고들었다. 운동권도 아닌데다가, 경찰에게 잡히거나 경찰서에 불려가 본 적도 없이 그저 데모 행렬 꽁무니나 따라다니던, 당시 풍조에서 볼 때는 외양만 겨우 지식인 꼴을 한 나 같은 사람도 박정희 비난과 자본주의 비판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얼마나 깊은 정도로 발을 담근 운동권이냐는 상관없이 대학생이라면 반정부와 반자본주의 구호는 그렇게 강하게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주류의 흐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김일성과 사회주의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거나 거기서 무슨 탈출구를 찾으려고 하는 일군의 시도가 강하게 있었다. 당시에는 나에게도 사회주의나 김일성은 우리의 모순을 들여다보는 또 다른 창이거나 대안으로 보이곤 했다. 하얼빈에는 북한 유학생들이 있었다. 나는 북한 유학생들과 면식을 트고 지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가능해지니, 호기심이 더 생겼다. 괜히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동포애를 어떻게든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싸이기도 했던 것 같다. 중국은 나에게 한국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할 대안으로 제시되곤 했던 사회주의를 직접 보는 계기가 되었고,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세력들이 대학가를 지배하던 때라 김일성의 후예들을 직접 상대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나는 여기서 놀라운 경험을 한다. 어느 날 나하고 친하게 지내던 북한 학생 한 명이 어떤 낯선 사람과 함께 얘기하면서 다가왔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려고 하는데, 그 북한 학생은 나를 애써 외면하였다. 그의 표정에서 나는 모른 체 해야만 하는 어떤 곤혹스러움을 읽었다. 돌아와서 이 이야기를 하자, 나보다 먼저 북한 학생들을 만나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런 경우를 당해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북한 학생들은 아무리 친해도 제3자인 다른 낯선 북한 사람과 동행할 때에는 남한 사람들을 모른 체 했다.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하는 태도를 취해야 살아갈 수 있는 나라라면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지상낙원일 수 없다. 나는 하얼빈에 온지 약 100일 만에 심하게 앓은 적이 있다. 이유도 없이 아팠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 모른다. 혹시 사회주의와 북한을 자본주의와 대한민국의 비판적인 대안으로 간주하던 인식을 부정하는 일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었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자기 인식의 틀이나 믿음을 자각하여 부정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이 불가능한 일을 하느라 심하게 앓지 않았을까? 내가 직접 두 눈으로 본 사회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가난이었다. 등소평도 가난이 사회주의는 아니다.고 말할 정도로 가난과 사회주의는 이미 매우 가까워져 있었다. 북한 학생들의 생활 모습이나 외모나 태도 등을 통해서 북한은 또 얼마나 가난한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하얼빈에 체류할 때는 등소평이 1978년 12월 18일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개혁개방을 천명한지 벌써 12년이나 흐른 뒤이다. 개혁이란 내내적으로 적용되는 관념으로서 자유 시장과 자본주의를 받아들인다는 뜻이고, 개방이란 대외적 관념으로서 중국이 국제 시장에 문호를 개방한다는 뜻인데, 자본주의적 요소를 받아 들인지 12년이나 흐른 후인데도 가난은 너무 분명했다. 내가 사회주의와 북한 사람들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 얻은 결론은 다음의 몇 가지 단어들로 남았다: 가난, 감시, 통제, 불안, 공포, 독재, 억압. 타율. 막연한 상상이나 이론으로만 접할 때하고, 직접 눈으로 보며 경험하며 접할 때가 너무 많이 달랐다. 여기서 나는 엄청난 당황스러움에 빠져 괴로워했다. 앓고 나서는 몇 가지 이데올로기적인 믿음을 수정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자본주의가 아무리 모순을 내포하고 있더라도 사회주의보다는 낫다. 박정희 대통령이 아무리 심하게 독재를 했어도 김일성의 독재보다는 낫다. 대한민국의 언론 자유가 아무리 비판을 받더라도 중국이나 북한의 그것보다는 훨씬 낫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치욕의 역사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역사다. 나는 지성을 성장 시키는 분위기가 아니라 지성을 마비시키는 분위기에 압도되었었다. 건강하게 성장하는 지성이었다면, 자본주의 비판하다 사회주의로 바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 비판하다가 바로 김일성에게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비판하다가 중국이나 소련으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하얼빈에서 크게 앓으면서 현실 속에서 내 눈으로 직접 경험한 것을 가지고 나를 교정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비판은 사회주의로의 전향이 아니라 자본주의 수정으로 귀결되어야 하고, 박정희 비판은 김일성 추종이 아니라 박정희 수정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렇지 않았다면,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을 보고, 소련이 해체되는 것을 보고,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성큼 성큼 발전하는 것을 보고, 사회주의 정책을 고집하다가 몰락한 베네수엘라를 보고도 다른 사람들이 한 말들로 채워진 믿음을 계속 믿으려 고집을 피우다가,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을 외면하는 우를 범했을 것이다. 한동안 북한에 대한 인식 방법으로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이론이 상당한 환영을 받으며 유행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내재적 접근법은 북한을 그들이 설명하는 가치와 이념에 따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북한을 북한의 시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의 대접을 받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론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최소한의 미덕은 객관성과 보편성이다. 주관적인 감각을 벗어나야 하며, 어떤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매우 넓은 범위 어디에나 치우침이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북한을 대할 때만 내재적 접근법을 사용하였다. 우리 자신, 즉 대한민국을 대할 때는 내재적 접근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 스스로에게는 인류 보편의 가치 기준을 적용하였다. 북한을 이해할 때는 북한의 특수한 상황을 기반으로 해서 하고, 우리를 이해하려 할 때에는 인권, 민주 등의 보편적인 잣대를 가지고 했던 것이다. 편파적이나 임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이론이 아니다. 이론이 아닌 것을 이론처럼 사용하던 그런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고, 그것을 변경하지 못하는 지금의 시간들도 있다. 이론을 이론으로 다루는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았다는 지식인들도 이 내재적 접근법을 편파적으로 사용하고, 정작 자신의 내재적 상황에는 한없이 자학적이었으면서도 매우 냉철한 지적 시선을 유지하는 것으로 포장하던 시절이었다. 내 책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 나오는 한 대목을 옮겨 본다. 우리가 진리하고 하면, 구체적인 세계를 넘어서서 어떤 무엇인가로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진리는 어쩐지 변화무쌍한 구체성과는 다른 어떤 것 같습니다.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어떤 형상을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런 것은 조작된 것입니다. 가공물이고 인공물이지요.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건 구체적인 실재의 세계뿐이지요. 진리의 세계는 실재의 세계에 있다. 그래서 등소평도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實踐是檢驗眞理的唯一標準)이라는 말을 한 것이다. 진리는 실재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실재의 세계에서 구현될 뿐이다. 남이 정해준 어떤 주의(主義)에 대한 믿음 대신에 내 눈으로 직접 경험한 것을 더 신뢰할 수 있으려면 상당한 정도의 용기와 지적 계몽이 필요하기도 하다. 뮤지컬 시카고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키티가 자신의 남편이 다른 두 여자를 끼고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분개하여 총을 겨누자, 남편이 말한다. 당신이 본 것을 믿을래? 아니면 내 말을 믿을래? 말이 끝나자 키티는 자신이 본 것을 믿고 남편에게 총을 발사한다. 남편이 설득하려고 하는 말은 결국 남이 하는 말이다. 우리에게 있었던 거의 모든 주의(主義)는 남들이 정한 것들이다. 남의 말인 것이다. 자신이 직접 본 것을 믿고 파고드는 자는 총을 발사하는 위치에 서고, 다른 사람의 말을 믿자고 하는 자는 총을 맞는 위치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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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2 17:09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용기, 시대를 건너가는 지적 인내

이런 문장들이 있다. 과거부터 쌓여온 뿌리 깊은 적폐들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국민 행복도 국민안전도 이뤄낼 수 없다., 적폐들은 꼭꼭 숨어있어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드디어 드러났다면 이것은 적폐근절의 시작, 지금 바꾸지 않으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각오로 근본부터 하나하나 바꿔 가겠습니다., 우리 사회 곳곳의 묵은 적폐를 바로잡아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반드시 만들어 가겠습니다!, 저와 정부는 우리 경제가 다시 회복세를 이어가고, 그 온기가 구석구석 퍼져 나가도록 모든 역량을 총동원할 것입니다., 한반도에 평화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는 일에도 더욱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모아 국가혁신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결코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했을 법한 말이겠는가, 아니면 박근혜 전 대통령이 했을 법한 말이겠는가. 문재인 대통령의 말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2014년 7월 14일에 당시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축사에 나오는 말들이다. 이런 문장도 있다. 상황이 점점 더 안 좋아지다가 이제는 매우 위태롭다. 상황이 어떻길래 위태롭다고 하는지를 죽을 각오로 말해보겠다. 나라의 문화 풍토는 정해진 것만을 따르거나 프레임 씌우기로 더욱 나빠지고, 관직은 능력과 관계없이 나눠주어 나라의 이익이 되는 일은 없이 그저 월급만 받고, 정치는 생산적이지 않은 시빗거리를 만들어 거기에 나라 전체가 매달리면서 혼란스럽고, 온 국민은 과거의 규제에 묶여 신음한다. 적폐(積弊)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보이는 이 문장은 누구의 말을 정리한 것일까?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 중에 나온 말일까? 아니면 문재인 대통령이 재임 중인 요즘의 누군가가 한 말일까? 놀랍게도 조선 시대 중기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말이다. 조선 시대의 학자들은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판단이 되면 목숨을 걸고 왕에게 그 폐단을 낱낱이 까발리고 개선을 요구하는 상소를 하였다. 그 상소를 진시폐소(陳時弊疏)라고 하는데, 율곡은 세상을 뜨기 2년 전인 1582년에 선조에게 올렸다. 율곡이 적폐청산을 주제로 한 상소문을 올린 지 10년 후, 일본이 침략해 들어와 강토를 유린했다. 율곡이 임진왜란 전에 부르짖었던 적폐 청산을 437년이 지난 후의 대한민국에서도 듣는다. 우리가 지금 어느 정도로 망가지고 있는지를 대변하는 말로는 이게 나라냐?도 있고 이건 나라냐?도 있다. 어느 진영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질 필요도 없다. 누가 옳든지 간에 나라 꼴이 말이 안 된다는 것만큼은 어느 진영에서나 동의하고 있지 않은가.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라는 말이 지금에서야 출현하였다면 차라리 다행으로 여기겠다. 그러나 이런 말투는 율곡의 시대에도 이미 있었다. 율곡은 나라 꼴이 말도 안 된다는 의미를 국비기국(國非其國)이라는 표현에 담았다. 국비기국(國非其國)이라는 말은 훨씬 더 오래전 중국의 고전인 『묵자』(墨子)나 『관자』(管子)에서 나오긴 한다. 나라가 행정 명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거나 3년 정도 버틸 재정이 확보되지 않으면 나라라고 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주로 쓰였다. 율곡은 이와 달리 당시의 폐단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그 폐단들이 청산되지 않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 말을 쓰고 있다. 즉 민심이 분열되고 권력이 간신들에 둘러싸여 혼란스럽다는 의미에서 나라가 나라 꼴이 아니다고 했던 것이다. 이전 정권들에도 맞고, 지금 정권에도 맞는 말이다. 우리는 분열된 민심으로 야기된 혼란과 간신들에 둘러싸여 실상을 정확히 알지 못하게 된 권력자가 내린 비효율적인 판단들로 고통받고 지낸 지 이미 오래다. 율곡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가 440여년이라는 그리도 큰 시간의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유사한 것을 보면서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임진왜란 직전의 동인과 서인이 극단적이면서도 맹목적으로 대립하여 국가를 비효율 속으로 빠뜨린 것을 보면서 그것이 지금의 시대와 너무도 흡사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또다시 놀라울 따름이다. 긴 시간 사이에서만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간을 거의 공유하는 짧은 시간 사이에도 유사함은 존재한다. 가장 앞에서 예로 들었던 문장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말이지만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이 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언론 장악, 낙하산 인사, 어용 지식인의 득세, 인사 실패, 꽉 막힌 불통, 협치 실종 등등, 거의 모든 것들이 다른 정권들 사이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명박은 자신을 노무현과 다르다고 주장하고, 문재인은 자신을 박근혜와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겠지만,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일들을 놓고 본다면 별 차이가 없이 대동소이하다.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노무현을 지지하는 세력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것이고, 문재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박근혜와 별 차이가 없다는 말에 경기를 일으키겠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그 경기를 무색하게 할 수 있다. 정치 지도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지지자들도 모두 다른 척하면서 똑같다. 태극기 부대와 대깨문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다른 옷을 입은 같은 사람들이다. 지적 반성력을 근거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지도자에 대하여 감성적인 숭배를 하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우상숭배의 다른 형태일 뿐이다. 임진왜란 직전의 동인과 서인,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적어도 율곡의 시대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고 깨달아 한 단계 크게 상승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물론 물질적인 풍요나 국제적인 위상을 들라치면 어찌 그 시대의 그것과 같겠냐 만은, 시선의 높이랄지 세계와 관계하는 수준 혹은 태도는 지금까지도 여전한 점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같은 내용이 그때에도 있고, 지금도 있는 것이다. 구조적인 유사성 때문이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긴 계기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동시대 안에서 봐도 학습과 진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왜 정치적인 대립각 사이에서도 구조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달라지지 못하는 것인가.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왜 수직적인 진화가 일어나지 않고 그 자리를 뱅뱅 돌고만 있는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수직적 진화를 가로막는 문화적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을 나는 한마디로 종속성이라고 말한다. 율곡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까지 관통하는 하나의 속성이 바로 종속성이다. 박근혜 시대와 문재인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속성도 종속성이다. 종속성은 사유나 생각이 자신 내부에서 생산되지 않고 외부의 것을 그대로 수용한 후 그것을 외부를 향해 집행하는 삶의 형태를 취하면서 스스로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 사는 것으로 착각하는 상태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집단이 가진 생각을 내면화하여 그것을 그대로 집행하는 것에 불과하면서도 스스로를 독립적 주체로 착각하는 상태이다. 자신이 만든 것으로 삶을 채우려 하지 않고, 외부의 누군가가 만든 것을 빌려오거나 그것을 따라 만들면서도 심리적으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다. 지식을 생산하려는 도전에 나서는 것보다 생산된 지식을 수입해서 쓰는 것을 더 효율적인 것으로 착각한다. 내 삶의 방식을 내 자신으로부터 확인받지 않고, 주변의 동의에 더 의존한다. 기능적인 활동에 빠지느라 예의 염치를 쉽게 상실하는 상태이다. 태극기 부대나 대깨문으로도 표현되는 모든 빠들은 그 진영의 논리에 갇혀 그것을 진리화 하느라 예의염치를 상실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게 된다. 모두 종속적인 상태이다. 감각과 감성에 빠져 선동적인 행위를 일삼지 차분하고 논리적인 지적 활동을 하지 못한다. 집단적 광기와 우상숭배를 하는 것으로 존재적 위안을 얻는 허망한 상태에 빠진다. 하지만, 본인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 이것이 바로 종속적 삶의 전형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삶을 길고도 길게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물질적 풍요와 민주적 발전도 모두 이 종속성의 범위 안에서 한 발전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면, 헌 말 헌 몸짓을 버리고 새말새몸짓으로 무장한다는 말은 다름 아니라 종속성을 극복하여 독립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 독립은 영토나 정치적인 의미에 한정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는 시선이나 사유의 독립을 말한다. 종속적 사고는 당연히 진영에 갇히고 감각과 감성에 휘둘리는 경향을 보인다. 독립적 사고는 근본적으로 감각과 감성을 이겨낸 지적 사고의 형태를 띈다. 진영에 갇힌 사고가 비효율적이며 미래적이지 않다는 것은 진영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왜 벗어나지 못하는가. 감성적 확신에 더 의존하기 때문이다. 진영적 사고를 벗어나려면, 우선 진영적 사고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그러나 모든 각성이 일어나는 이 관찰을 시작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관찰한 후에는 각성을 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태도를 결정해야 하는데, 이것 또한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어려운 일들을 해내지 않으면 앞으로도 긴 시간 우리는 율곡의 시대를 살며 선조의 무능을 견디다 임진왜란을 당하는 것과 같은 비극에 다시 직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행하는 행위를 용기라고 한다. 따라서 용기는 매우 지적인 활동이다. 지적이라는 말을 단순히 학력이 높은 것으로 오해하지는 말자. 감각과 감성과 맹목적인 믿음에 빠지지 않고 곰곰이 생각할 수 있으면 지적이다. 감각과 감성에 갇혀 있는 사람은 지적이지 않기 때문에 용기를 발휘할 수 없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용기를 지적인 인내라고 하는 것이다. 긴 시간 우리를 지배했던 종속성을 이겨내는 용기, 즉 지적인 인내를 발휘하지 않으면, 우리는 앞으로도 박근혜와 문재인의 시대를 왕복할 것이다. 동인과 서인 사이의 싸움판 구도를 앞으로도 깨지 못할 것이다. 율곡의 경고를 앞으로도 동시대인의 것인 것처럼 반복해서 듣는 시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율곡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지금이라도 지적 인내를 발휘할 수 있으면 문재인 대통령이 최소한 선조는 되지 않을 것이다. 요즘 정책들이 시대와 맞지 않아 날로 잘못되니 백성들의 의욕이 매일 소진되고 있습니다. 이는 간신들이 권력을 휘두르며 행세할 때보다 더 심합니다. ... 이렇게 계속하면 10년도 안 돼서 난리가 날 것입니다. ... 언로(言路)를 넓게 열어서 전하의 뜻과 다르더라도 많은 의견을 받아들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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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29 17:48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부끄러워 할 줄 안다는 것

일만 하면서 앞만 보고 달리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낯선 질문에 빠지기 시작한다. 나는 왜 사는가?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누구나 인정하는 참된 가치는 존재하는가? 이런 것들을 근본적인 질문 혹은 본질적인 질문이라고 부르자. 이런 질문들에 빠지면 대개는 내면에서 큰 혼란을 겪게 된다. 생활도 이전과 결이 달라지면서 많이 흐트러질 수 있다. 기존의 것들은 다 뒤틀린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린 듯, 본 적도 없는 곳으로 이끌리며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10대나 20대에 이런 질문들에 봉착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40대 50대의 나이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왜 사람들은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오는 삶을 살다가 갑자기 이런 질문들에 빠지는가. 이 나이가 되면 어느 정도의 성취도 얻게 되지만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온 데서 오는 피로감을 느끼고 스스로 지치거나 고갈되어 간다는 위기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잠시 멈춰 서서 본질적인 질문들을 붙잡은 채 삶의 의미를 따져보는 일은 버겁기도 하지만 약간은 고상해 보이기도 하면서 위로를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질문들 앞에서 스스로 지쳤다거나 고갈되어 간다는 느낌에 빠진 채, 자신이 좀 약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면서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위로나 휴식이 필요한 사람으로 다독이려 한다. 많이 지쳐서 위로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지쳤다는 그 기분은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을 정도의 장벽이나 절벽 앞에 선 것과 같은 부정적 심리 상태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오히려 기능적이고 양적으로 살던 삶이 정점을 찍거나 한계에 도달한 후, 고도가 높아지지 않으면 안 되는 절실한 필요가 생겼기 때문에 질적 상승을 위해 혁신의 대문 앞에 선 상태일 것이다. 기능적이고 양적인 삶의 고도가 자신의 크기만큼 커져 버리면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이전에 경험해본 적이 없는 환경에 처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지금까지의 삶에 직접적으로 등장한 적이 없는 한 단계 더 높은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 왜 사는가?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지칠 만큼 지쳐서 휴식이나 위로가 필요한 것이 다는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휴식 다음의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라는 전진의 명령 앞에 서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약해져서가 아니라 혁신의 요구 앞에 선 상황이다. 사실 본질이나 근본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들은 기능적인 것들보다 높다. 왜 사는가, 삶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했다는 뜻은 그런 가치나 본질이 작동하는 높이를 향해서 내몰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낯선 질문들은 질문자의 수준이 높아져 가고 있음을 자신 스스로와 세상에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다. 윤리적인 기업이 윤리적이지 않은 기업보다 더 지속적인 성장을 한다는 것이 요즘은 거의 상식이다. 윤리는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행위 다음의 원리적인 높이에 있다. 기능이기만 했던 행위가 행위 자체의 본질적인 이유나 가치적인 평가와 만나려 하면 윤리가 된다. 하나하나의 행위는 기능이지만, 윤리는 본질적인 높이다. 윤리적인 기업은 수준이 높고, 아직 윤리에 관심을 두지 않는 기업은 수준이 높지 않다. 윤리를 추구하면 본질적 가치를 중요하게 본다는 뜻이고, 윤리 의식에 관심이 쏠리고 있지 않다면 본질보다는 기능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선이 높은 기업에는 지속적인 큰 성장이 보장되고, 시선이 낮은 기업에는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다. 본질이란 이런 역할을 한다. 본질은 그냥 텅 빈 상태로 존재적 위상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동하면서 높이와 두께를 가지게 되고,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크기와 생명을 더 효과적으로 보장해주는 무기가 된다. 개봉 된지 5년이나 지난 영화가 떠오른다. 이반 라이트만이 감독하고,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드래프트데이>(Draft Day)이다. 케빈 코스트너가 연기한 미식축구 클리블랜드 구단장인 써니가 선수 선발을 하는 과정에 읽힌 얘기이다. 켈리헨이라는 선수가 있다. 위스콘신 대학 선수인데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대학 성적 우등상까지 받은 그는 어느 프로 구단에서나 가장 탐내는 대학 졸업 선수이다. 두 개의 일화가 중요하다. 하나는 켈리헨이 대학에서 선수 생활을 할 때 자신의 생일 파티에 100여명의 손님을 초대했지만 그 가운데 같은 팀원의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자신의 팀 동료는 한 명도 초대하지 않은 것이다. 또 하나의 일화가 더 있다. 어느 구단에선가 자기 팀에 관심 있어 할 만 한 선수들에게 작전설명서를 보내는데, 그 작전설명서 마지막 장에 100달러짜리 지폐를 붙여놓았다. 그것을 받은 선수들에게 나중에 설명서를 읽었는지 물어보니 모두 읽었다고는 하면서도 절반 정도가 100달러짜리 지폐 얘기를 하지 않았다. 읽지 않았으면서 읽었다고 한 사람이 절반이었던 것이다. 그 절반의 선수들에게 마지막 장에 100달러짜리 지폐를 붙여두었었다는 사실을 밝히자 모두들 당황하였고, 대부분은 읽지 않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켈리헨은 지폐 얘기를 하고 추궁하니까 안타깝게도 거짓말을 한 번 더한다. 읽지도 않았으면서 아! 이제 생각나네요.라고 말한 것이다. 다른 선수들도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특히 클리블랜드 구단 경호실장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사람이라고 켈리헨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브라이언 드류라고 하는 선수만이 지폐를 우편으로 돌려보내면서 카드를 동봉하는데, 카드에는 우승을 안겨드릴 때까지 이건 아껴두세요.라는 문구를 적었다. 브라이언 드류는 언젠가 게임에서 터치다운을 성공시킨 후, 그 공을 관중석의 어떤 여인에게 준다. 이것은 규정 위반이었던 것 같다. 그 사건으로 브라이언 드류는 징계를 당한다. 그런데 공을 받은 여인은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브라이언의 누이였다. 누이는 얼마 후 사망하였다. 징계까지 각오하고 브라이언은 누이에게 터치다운을 한 공을 선물하였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를 징계도 감수하는 행위를 하게 한 것으로 해석된다. 써니는 켈리헨이 욕심났지만, 가장 본질적인 인성 문제에서 안심이 되지 않자, 마지막 선택의 시점에 한 번 더 켈리헨에게 확인한다. 당신 생일에 팀 동료가 왔었는지 진실만 말해 달라.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써니에게 한 켈리헨의 대답은 끝까지 바른 길 위에 서지 못한다. 부끄럽지만... 그날 밤 일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대신 생각나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을 위장한다. 켈리헨은 부끄럽지만...이라고 말은 했지만 아직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염치가 없는 것이다. 기능적인 것을 추구하는 욕망이 도덕적 반성 능력이라는 본질적 태도보다 컸다. 써니는 제1지명권을 행사하면서 켈리헨을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브라이언 드류를 선택한다. 운동선수에게는 운동 능력이 제일 중요하게 보인다. 그러나 수준 높은 단계에서는 운동 능력이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인격의 총화임을 안다. 인격적인 문제는 본질이고, 현상적으로 보이는 운동 능력은 기능이다. 이 영화에서는 우리에게 삶의 매 순간에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교훈적으로 보여준다. 더 잘하고 싶으면, 기능보다는 본질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개 이런 수준의 선택을 하면서 앞서 나간다. 목표보다는 목적을 선택한달지, 성적보다는 인성을 강조한달지, 시청률보다는 작품성을 더 중시한달지, 진학률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이 본달지 하는 것들이다. 왜 미식축구 선수에게서도 거짓말을 하는지의 여부나, 언행일치가 이뤄지고 있는지의 여부나, 가식적인 변명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치졸함이 있는지의 여부나, 동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지의 여부를 매우 중요하게 봐야 하는지는 더 수준 높은 실력이란 기능적인 운동 능력보다도 결국 그런 점들로부터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높은 수준의 삶이다. 선진적이고 창의적이며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격들은 이렇게 산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지켜지지 않더라도 운동만 잘하면 된다는 수준에서의 선택은 삶을 기능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며, 그것은 진정한 승리의 길을 보장하지 않는다. 승리의 길 대신에 종속적인 삶으로 인도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자도 특히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높이의 사람이라면 기능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君子不器)고 말한 것이다. 본질과 기능 사이에서 본질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를 발휘해야만 제 자리에서 뱅뱅 돌거나 좌우를 수평 이동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사회를 차원을 높여가며 전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능에 빠지지 않는 행위를 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부끄러움을 아는 내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기본이고, 이 기본이 본질을 선택하게 할 수 있게 한다. 제자 자공이 학문을 닦고 인격을 도야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묻자 공자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行己有恥)이라고 답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내면을 가졌는가의 여부가 그 사람이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룰 것인지를 결정한다고 본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것을 우리는 소위 염치라고 한다. 수치심, 즉 부끄러움을 아는 자기반성 능력이 인간적인 활동의 출발점이란 뜻이다. 수치심을 모르면 정의로운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 불의가 주는 잠깐의 이익을 거부하는 용기를 발휘할 수 없다. 수치심을 모르면 자식 앞에서도 정의롭지 않은 행동을 서슴없이 하거나 심지어는 자식을 데리고 함께 부정한 일을 하기도 하는데, 자식과 더불어 누릴 아주 사소한 이익이 삶의 본질적 가치를 오히려 압도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가 자식을 망치는 것인 줄을 모르는 것은 부정한 일을 통해서 얻을 작은 이익을 본질적 가치를 지켜서 얻을 이익보다 큰 것으로 여기는 무지와도 관련된다. 지적 능력이 전인적으로 배양되지 않으면, 아무리 학식이 높아도 수치심을 알기는 어렵다. 기능적인 잠깐의 이익을 거부하고 본질을 선택하는 태도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용기는 수치심(부끄러움)을 알아야만 발휘된다. 그래서 『중용』은 수치심을 알아야 용기에 가까워질 수 있다(知恥近乎勇)고 기록한 것이다. 『관자』는 더 적극적이다. 국가의 기틀 네 가지, 즉 예(禮)의(義)염(廉)치(恥)라는 4유(四維)를 제시한다. 수침심은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 가운데 하나이다. 그 가운데서도 수치심은 정의를 실현하는 기둥이다. 사회에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끼는 자기 반성력이 사라지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려서 파멸을 면치 못한다. 수치심이라 불리는 염치가 사라지면 파렴치(破廉恥)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파렴치한 사회라면, 거기서 무슨 일이 가능하겠는가. 개혁을 완수하고 싶은가? 혁명을 이루고 싶은가?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가? 자녀를 잘 기르고 싶은가? 창의적이고 싶은가?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가? 선도력을 갖고 싶은가? 훌륭한 운동선수가 되고 싶은가? 좋은 가수가 되고 싶은가? 종합적으로 말 해, 한 층 더 오르고 싶은가? 기능에 빠지지 않고 더 본질적인 것을 선택하면 된다. 어떻게 하면 선택의 순간에 더 본질적인 것을 고르게 되는가? 염치를 알면 된다. 최소한 부끄러워할 줄만 알아도 한 층 더 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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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25 16:25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자기 확신에 갇힌 몽환적 통치

송필용 작품 '무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철학자 주희가 차지하는 비중은 서양에서 칸트가 차지하는 그것 만큼이나 무게감이 있다. 그의 말이다. 오늘 배우지 아니하고서 내일이 있다고 하지 말며, 올해에 배우지 아니하고 내년이 있다고 하지 말라.(「勸學篇」) 더 나은 내일과 더 발전된 내년을 원하거든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 공부(배움)는 지적 활동이다. 미래는 지적 태도를 가진 사람이 연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철저하게 살다간 사람을 꼽을 때, 소크라테스는 빼지 못한다. 나는 숨을 쉬는 한, 그리고 지적 능력을 잃지 않는 한, 철학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훈계하고, 만나는 사람들을 위해서 진리를 명료하게 밝히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오.(『변명』) 세상을 진보시키려는 자신의 노력과 지적 능력의 발휘를 일치시켰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지적인 활동에 반대되는 행위는 이미 흡수한 신념을 자세히 점검하지 않은 채 계속 소유하면서, 자신을 거기에 맹목적으로 맡겨버리는 무책임한 태도이다. 이때 소유된 신념이 스스로 참되다고 확신하는 믿음(true belief), 즉 자기 확신이다. 이것은 지적 점검을 거친 지식(knowledge)과 구분된다. 중국의 철학자 장자는 이것을 정해진 마음 즉 성심(成心)이라 했다. 장자에 의하면, 제대로 된 공부는 성심을 깨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성심을 깨지 않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 미래는 점검을 거치지 않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지적인 점검 과정을 통해서만 열린다. 자기 확신은 지적 활동 능력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려는 지적인 노력이 바로 반성이고 점검이다. 그래서 지식을 점검된 자기 확신(justified true belief)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 확신에 빠진 사람은 비이성적이며, 감각이나 감성을 믿고, 과거 지향적이며, 소유한 것을 지키려 하고, 이념으로 현실을 지배하려 하고,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본다. 지적인 사람은 이성적이며, 논리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며, 소유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그다음으로 넘어가려 하고, 현실에서 이념을 생산하려 하고, 세상을 보여지는 대로 보려 한다. 세상을 보고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하는 대로 보는 사람은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는 사람에게 항상 진다. 점검하는 습관이 길러지지 않아서 지적 수고를 하려고 하지 않으면, 점검하고 생각하는 일을 귀찮아하면서 자기 확신에 빠지는데, 이때는 주로 프레임 씌우기로 날을 보낸다. 종북 좌빨이나 토착 왜구나 친일파나 반일파라고 하는 것들은 다 사유의 정지를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보지 못하고 봐야 하는 대로 보거나 보고 싶은 대로 보게 되는데, 그렇게 하도록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이 바로 이념이다. 현실에서 이념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으로 현실을 지배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어떤 생산적인 효율도 생기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선 채 시대를 과거에 묶어두기만 한다. 우리는 철저히 과거에 묶였다. 미래 담론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념가들은 지적인 진보가 멈췄거나 오히려 그것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에 진보 우파나 진보 좌파는 모두 사라지고, 그저 보수 우파와 보수 좌파만 남은 연유이다. 이념가들은 저 높은 곳에 이념을 걸어놓고 거기를 향해 과감하게 비상하려다 보니 현실을 구제하려는 사명감보다는 오히려 몽환적인 자기 확신에 빠진다. 몽환적인 감성과 확신 속에 도덕적 우월감이 깃들어 있지만, 이는 헛된 자기기만일 뿐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내로남불이 일상화 된다. 염치와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시모노세키에서 청과 강화조약을 체결하는데, 조약문의 제1조가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문에 대하여 청나라 대표인 이홍장은 양국 모두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추가하자고 했으나 일본이 거부하였다. 1876년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해서 강화도에서 조선과 조일수호조약을 체결하는데, 그 조약의 제1조도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청나라와 일본이 자기들끼리 전쟁을 한 다음에 조약을 맺으면서 제1조를 조선의 독립으로 삼았고, 일본이 우위를 점한 채 조선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제1조도 조선의 독립이었다. 당시 조선은 무능하고 무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896년 독립협회를 세워 중국 사신을 맞던 영은문을 부수고 독립문을 세웠다. 그즈음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1896년2월11일부터 1897년2월20일까지 세자 순종을 데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있다가 나와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갖는다. 이때 즉위식 행렬은 일본군이 호위를 했다. 대한제국에서 제국은 다른 나라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 독립국임을 의미하지만, 자주 독립국의 기상은 찾기 힘들다. 8년 후,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한다. 외교적 주권은 일본이 가져갔다. 그 후 다섯 해가 지나 1910년에 조선은 일본에 합병된다. 나라가 사라졌다. 지금도 우리는 이런저런 영은문들을 부수면서 자주와 번영과 독립을 확보한 듯한 심리적이고 몽환적인 자족감에 취해 있다. 자기 확신에 갇혀 몽환의 시절을 다시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1840년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영국 등의 서양 세력에 굴복당하고, 1853년 일본은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 당했다. 중국과 일본은 굴복당하고 나서 과감히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시대적 변화를 받아들이려고 전면적인 쇄신에 나섰다. 쇄신의 주요 내용은 서양 학습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무지몽매했으며, 무지가 만든 몽환적 자기 확신으로 서양을 배우기는커녕 오히려 무시하면서 위정척사로 편을 갈라 내부적인 싸움에만 골몰하였을 뿐이다. 내부적인 작은 싸움에 갇힌 채, 그것을 세계적인 큰 싸움인냥 착각하는 몽환의 상태였다. 점검되지 않은 자기 확신 때문이다. 이때도 모두 힘을 합치기만 하면 서양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결사 항전의 선동과 결기가 무성하고도 무성했다. 자기 확신에 빠져 선동과 결기만으로 버티다가 결국은 나라를 뺏겼다. 우리는 지금도 위정척사의 세월을 살고 있지 않은가. 자기 확신은 우리 전체 모두에게 해당하지만, 지금은 주도권을 가진 통치 세력의 그것이 더 큰 문제이다. 통치 주도 세력의 주요 인물인 문정인은 한국이 처한 상황을 북한의 민족 이익과 미국의 동맹 이익 요구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로 평하면서, 우리의 국가 이익을 위해 양쪽 모두에 쓴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시사IN』 제612호) 북한을 민족 이익을 수호하는 국가로 보는 것이 통치 주도 세력의 공통된 인식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핵무기도 민족 이익 수호 차원의 것이고, 미사일 발사로 하는 협박이나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악담이나 조롱들도 모두 민족 이익을 수호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 된다. 그래서 아무 반응도 못하는지 모르겠다. 이전의 글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밝혔듯이 국가와 민족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에서 북한을 민족 이익을 수호하는 국가로 본다는 것은 민족적 정통성을 북한에 두고 있다는 것으로 읽힌다. 북한 추종의 근거이다. 사실 여기서부터 모든 몽환적인 통치 행위가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을 민족 이익을 수호하는 국가로 보는 인식을 토대로 하여 우리가 형성한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종북굴중혐미반일(從北屈中嫌美反日)이다. 북한을 추종하여 무조건 이해하고 편을 들며, 중국에 굽신거리고, 미국을 미워하며, 일본을 반대한다. 문제는 추종하여 이해하고 편을 들어주지만, 북한은 계속 위협하고 조롱하며 업신여긴다는 점이다. 뒷골목도 아니고 국가 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어떤 위협과 조롱에도 말 한마디 못하고, 오히려 선의로 해석하려고 몸이 달았다. 세계 외교사 어디를 봐도 국가 사이에 이런 관계를 형성해서 자존을 지키거나 생존을 담보하거나 실익을 얻었던 예는 없을 것이다. 자존과 생존과 국가적 실익을 포기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더 중요한 어떤 몽환적 주제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면 불가능할 일이다. 이런 태도가 정권에는 의미가 있는지 몰라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인 나는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는다. 중국의 철학자 노자는 통치의 핵심적인 지혜를 간결한 언어로 남겼는데, 이런 대목도 있다. 최상의 통치는 아랫사람들이 통치자가 있다는 것 정도만 의식한다. 그다음 단계에서는 백성들이 통치자에 친밀감을 느끼며 떠받든다. 그다음은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 단계이다. 마지막 가장 낮은 단계에서는 통치자를 조롱한다.(『도덕경』17장) 국가 통치의 효율성이나 건강성의 정도를 순서대로 밝혔다. 조롱받는 단계에서 국가는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저기서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조롱을 당하는 일이 있다면,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조롱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조롱 다음의 단계는 순서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파국적인 일일 가능성이 크다. 조롱도 자기 의도에 따라 심리적이고 주관적으로 해소해버리고 나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살피지 않으면 조롱 다음에 예견된 파국을 막지 못한다. 자기 확신에 빠지면 감각을 믿고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심리적 기대를 객관적 사실로 착각하는 것이다. 지금 이 나라는 자기 확신에 갇힌 몽환적 통치에 의해 아무나 흔들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독도 주변의 카디즈나 영공에 중국과 러시아 비행기가 멋대로 들락거리고, 일본은 경제를 통해 한국 흔들기에 나섰고(미국이 뒤에서 함께 벌인 일일 수도 있다), 미국은 문재인 대통령 어투까지 흉내 내가면서 방위비 증액 등으로 압박을 하고, 한미동맹은 이혼 직전인 부부처럼 불안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한은 협박과 위협과 조롱에 거침이 없다. 대한민국은 어떤 자신감에 의한 것인지 몰라도 진정한 우방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이 상황에서 아무나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구호가 선동이나 결기에 머문 주장이 아닐 수 있을까? 종북굴중혐미반일(從北屈中嫌美反日)의 구도를 유지하면서 아무나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 비책은 무엇인가? 일본과 실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조건문으로 평화 경제만 이루어진다면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할 때,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망연자실할 뿐이다. 모든 경제 지표가 다 악화일로인데, 대통령은 경제의 기초체력이 튼튼하다고 한다. 몽환적 자기 확신에 빠져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보기 때문이다.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어야 가능한 정확한 현실 인식이 취약한 것 같다. 자기 확신에 빠지면 점검 능력과 반성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최소한의 지적인 능력이라도 있다면, 반성하고 점검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실수를 하더라도 반복하지 않고, 되도록 빨리 교정도 한다. 반성 능력이 떨어지면, 하던 실수를 반복한다. 나라들 사이에도 침략을 하던 나라가 또 침략을 하고, 침략을 당했던 나라가 다시 침략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반성과 점검 능력이 잘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정권도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임진왜란은 뼈에 새겨야 할 치욕이다. 임진왜란과 같은 치욕을 다시 당하고 싶지 않으면 분노하고 결기만을 보일 일이 아니라 우선 서애 유성룡이 남긴 『징비록』(懲毖錄)부터 읽어야 한다. 이 책에 반드시 새겨야 할 세 가지 교훈이 들어 있다. 첫째, 한 사람이 정세를 잘못 판단하면 천하의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둘째,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국방을 다룰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다. 셋째, 전쟁 같은 큰 일이 닥쳤을 때에는 반드시 나라를 도와줄 만한 우방이 있어야 한다. 차라리 섬뜩하지 않은가.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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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04 20:13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척박한 땅에서는 거친 풀이 자란다

광주일보를 붓 머리로 하여 전북일보, 경인일보, 매일신문 등에 국가란 무엇인가를 발표하고 나서 많은 지지와 격려를 받았다. 그러나 비난도 없지 않았다. 비난을 받을 때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잠깐이나마 의기소침해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생각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을 수밖에 없다.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아야 할 생각이 개수가 준 나머지 몇 개의 생각으로 뭉쳐서 활력을 잃는 것이 더 위험하다. 문제는 지지나 비난이 어느 높이에서 일어나는가가 중요하다. 지지가 되었건 비난이 되었건, 곰곰이 생각하고 하는 것과 그러지 않고 감(감각과 감성)으로만 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생각을 해야 도달할 수 있는 단계가 있다. 거기서는 지적 개방성이 최소한이나마 작동한다. 이리하여 싸움판 같은 논쟁이라도, 그것이 끝나는 곳에는 협치도 자라나고 합의도 피어나서 사회를 앞으로 미는 전진의 기운이 생겨난다. 최소한의 지적 개방성도 보장되지 않은 정도의 수준에서라면, 논쟁은 그저 비난전에 불과하다. 여기서는 한 치의 전진도 없다. 그저 제자리를 뱅뱅 돌거나 과거로 퇴행한다. 내가 보는 현재의 대한민국은 불행하게도 감각과 감성의 작동 기재에 갇혀 최소한의 지적 개방성도 허용되지 않는 매우 극단적인 양분 상태이다. 한 나라 두 국민이 된 지 이미 오래다. 어느 쪽에서나 내로남불을 대놓고 하고 얼굴색도 바뀌지 않는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일에는 마치 활시위를 당기듯이 결사적이다. 이젠 논쟁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차라리 장수하는 비결이 될 지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누군가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들어주는 경우가 아주 귀하다. 대개는 어떤 주장을 들으면서 우선 자기 맘에 드는지 안 드는지를 결정하고, 거기서 출발한다. 맘이 과학과 논리를 앞선다. 맘에 들면 맘에 들게 논리를 만들고, 맘에 안 들면 맘에 안 들게 논리를 만든다. 그러니 개념의 적용 범위를 무시하거나, 억지스럽거나, 논리적이지 않거나, 인신 공격적이거나, 프레임을 쉽게 씌운다. 국가주의니 획일주의니 패권주의니 하는 등등의 주의에 쉽게 갇힌다. 가치가 개입될 여지가 많은 철학이나 정치나 종교의 영역에서는 더욱 심하다. 지적인 훈련이 되어 있으면, 논리로 감각을 지배하지만, 지적인 훈련이 되어있지 않으면 감각에 논리를 복종시킨다. 감각에 논리를 복종시킨다는 말은, 논리를 편의대로 만든다는 말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정치적 주장에서 이런 경향이 매우 심하게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 지적 독립성이 훈련되지 못한 사람들은 정치의 늪을 피하지 못한다. 고도로 지적 훈련을 받은 증명서를 가진 지식인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정치가 모든 지적 활력을 다 빨아드린 후 소진 시켜 버리는 블랙홀로 기능한다. 정치라는 블랙홀의 흡인력에 얼마나 저항할 수 있는가가 얼마나 높은 강도로 지적 훈련을 받았는가를 증명할 것이다. 이것은 지식인이 정치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지적 훈련을 받은 사람답게 정치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감각과 감성을 이겨내라는 뜻이다.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지금 감성이 배제된(완벽한 배제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니다) 객관적인 대화를 하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다. 남북관계에서나 한일관계에서나 건강한 논쟁을 할 토양은 사라졌다. 논쟁을 통해 무슨 조그마한 소득이나마 산출할 토양이 아닌 것이다. 근본적인 면에서는 경제지표가 하락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큰 문제이다. 극단적인 이전투구 판에 있으면서도 죽기 전에 바늘 끝만 한 아름다움이나마 거두고 싶은 욕망이 남아 있다면 이 정도까지 천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어버린 내 나라가 나는 너무 슬프고 무섭다. 앞에서 지적 훈련이라는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학벌 좋고 가방끈이 긴 사람들끼리의 말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지적 태도라는 것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하는 가장 효율적인 한 방식일 뿐이다. 세계를 지적으로 다루는 사람은 세상을 더 넓고 깊게 접촉한다. 좁고 얕게 접촉하는 사람은 넓고 깊게 접촉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피상적인 수준에서 이기고 지는 승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와 의미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종합한 인생 전체에서의 승리 여부를 말한다. 지구는 평평한가, 둥근가? 배운 것을 즉각적으로 내뱉으며 둥글다고 아주 쉽게 말하지만,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경험하지도 않은 것을 자신 있게 말하기란 적잖이 조심스럽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전혀 경험되지 않는다. 감각과 본능으로 보면 지구는 평평하기만 하다. 가만히 생각하고 자세히 따져 봐야 둥글다. 지적이라는 것은 지식의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생각하고 자세히 따져 보는 능력을 발휘하는지의 여부이다. 지구를 평평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세계를 접촉하는 범위는 좁고 얕을 수밖에 없다. 가만히 생각하고 곰곰이 따져 봐서 지구를 둥근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세계를 넓고 깊게 접촉한다. 삶의 효율성이 누구에게 더 있을지는 길게 말할 필요 없다. 이렇게 보면, 지적 태도는 우선 감각과 본능을 극복하는 태도이다. 감각과 본능을 극복한다는 말은 감각과 본능을 소멸시키거나 제거한다는 뜻이 아니라 곰곰이 생각하는 지적 능력으로 감각과 본능을 정련시킨다는 말이다. 지적이면 가만히 생각하고 곰곰이 따지면서 반응하기 때문에 덜 감성적이고, 지적이지 못하면 생각을 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정련되지 않은 감각이 그대로 튀어나와 훨씬 더 감각적이며 감성적이다. 지적이면 생각을 하고, 지적이지 못하면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학력이 아무리 높아도 지식의 양만 넘쳐나고 곰곰이 따지는 능력이 배양되어 있지 않다면, 지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대신 학력이 낮거나 지식의 양이 적더라도 곰곰이 생각할 줄 알면 지적인 사람이다. 이것은 세계와 반응하는 기술이자 태도이다. 곰곰이 생각할 줄 알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커지는 데도 인간은 왜 곰곰이 생각하지 않은가? 생각이라는 것은 하나의 정신적인 수고이다. 힘이 든다. 감각과 감성은 정신적인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자극에 맡겨 본능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면 된다. 특정한 이념에 갇혀도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그 이념만 기준으로 사용하면 되기 때문에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념가들이 더 감성적인 이유이다. 분명한 것은 이념이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는 점이다. 이념을 강하게 소유하면, 진실하고 헌신적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져서 과거를 지키거나, 거기에 자발적으로 갇힌다는 문제가 있다. 이념적이다, 과거에 갇혔다, 생각이 없다, 감성적이다라는 표현들은 서로 매우 가깝게 있다. 이런 사람들이 만일 권력을 갖게 되면 쉽게 자기 확신에 빠진다. 자기 확신에 빠져, 자기가 만든 진실에 자기가 도취 되어 역사에 철저한 태도로 헌신한다는 느낌을 스스로 제조한다. 그래서 현실을 보지 않고 자기 이념을 본다. 현실에서 이념을 생산하는 수고를 하지 못하고, 이념으로(그것이 낡은 이념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제어하려는 무모함을 행한다. 봐야 하는 대로가 아니라 보여지는 대로 보는 승리의 길을 포기하고 자아 도취에 빠져 몽환적 정치를 하게 되는 노정은 이와 같다. 일상과 현실이 아무리 피폐해져도 오히려 그 피폐함을 진실에 접근하는 통로로 간주한다. 곰곰이 생각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점은 이렇게 중요하다. 감각과 감성에 의존하는 태도를 갖느냐 지적인 태도를 갖느냐 하는 점은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든다. 우리의 근대 역사에는 동학 혁명이라는 불꽃같은 기록이 있다. 우리는 동학의 정신을 잘 살피고 더욱 계발해야 한다. 동학도 없었으면,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다. 여기서 우선 김태유 교수의 패권의비밀; 4차산업혁명시대, 부국의 길이라는 제목을 단 유투브 영상을 소개해야겠다. 모두 꼭 한 번 보시기 바란다. 김태유 교수에 의하면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에 의해 3만명 사살될 때 일본군은 한 명 죽는다. 엄청난 격차다. 무기가 달랐다. 일본군은 전설의 소총인 스나이더 소총을 자신들의 신체에 맞게 개선한 무라다 소총을 썼고, 우리는 여전히 화승총을 들었다. 무라다 소총은 엎드린 자세에서 장전하며 1분간 15발을 쏠 수 있었고, 사거리는 800미터였다. 반면 화승총은 2-3분 동안 선 채로 1발을 장전하여 쏠 수 있었고 사거리는 120미터였다. 이런 화승총에 죽창을 곁들인 무력으로는 아무리 큰 결기로 뭉쳤다 하더라도 무라다 소총을 든 적을 이길 수 없다. 결국 산업화의 결과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고,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무라다 소총과 화승총의 차이는 산업화의 차이를 상징한다. 그럼 왜 누구는 산업화에 성공하고 누구는 산업화에 성공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세계에 반응하는 태도가 좌우한다. 무엇을 제작한다 혹은 개선한다는 것은 이미 있는 것을 그대로 소지하는 태도가 아니라 불편함과 문제를 느껴서 그 다음을 알려고 하거나 설명하려고 하는 강력한 의지가 발현된 것들이다. 이미 있는 것을 그대로 소지하는 태도를 가지면 곰곰이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주로 감각과 본능이나 감성을 표하는 것으로 자기 태도의 대부분을 채운다. 반면에 그 다음을 곰곰이 생각하는 태도를 가지면, 불편이나 문제를 발견한 후 그것을 붙들고 늘어지는 수고를 스스로 감당한다. 이것이 지적인 태도이다. 스나이더 소총을 무라다 소총으로 개선했다는 것은 일단 감각과 본능을 극복하여 지적인 태도로 문제를 대했음을 알 수 있다. 있던 화승총을 별 개선 없이 계속 썼다는 것은 우선 곰곰이 생각하는 지적인 태도로 세상을 대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곰곰이 생각하는 지적인 태도를 우리보다 먼저 혹은 더 철저히 발휘했던 일본은 우리보다 더 인간적으로 살았고, 상대적으로 그러지 못했던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을 그들에 의해서 짓밟히는 치욕을 살았다. 이런 의미에서 헤르만 헤세도 『데미안』에서 이렇게 말했는지 모른다; 세계를 그냥 자기 속에 지니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알기도 하느냐, 이게 큰 차이지. 그러나 이런 인식의 첫 불꽃이 희미하게 밝혀질 때, 그때 그는 인간이 되지. 알려고 하는 태도는 머무르려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향한 욕망이다. 그것이 바로 지적인 태도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해주는 근본적인 힘이다. 알려고 하면(곰곰이 생각하면) 인간의 주체성을 지키며 살 것이고, 알려고 하지 않으면(곰곰이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기 약 20여 년 전, 지금 일본의 기초를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여러 저술을 통해 일본을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도록 한다. 그의 성공은 바로 우리의 고통이었다. [네이버 열린논단]에서 한 미야지마 교수의 강연 내용에 의하면, 1872년에서 1876년 사이에 후쿠자와 유키치가 출간한 『학문의 권장』이라는 계몽서가 300만부나 팔렸다. 당시 일본의 인구가 3500만명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조금 과장하여 당시 일본인 10명 가운데 한 명은 이 책을 읽었다고도 할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하는 평가는 뒤로 하고, 그의 시대에 그가 300만의 독서 인구를 가졌다는 그 사실이 부럽고 놀라울 따름이다. 독서는 곰곰이 생각하는 훈련이 아주 잘 된 사람들이 남긴 결과(그것이 책이다)를 접촉하여 자신도 곰곰이 생각하는 능력을 갖게 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다. 우리는 무라다 소총과 300만 독서 인구의 존재가 같은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300만 독서 인구와 후쿠자와 유키치는 따로 존재하는 두 개가 아니라 하나다. 300만 독서 인구를 가진 당시 일본 사회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토양이다. 우리가 일본에 패배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곰곰이 생각하는 능력의 차이 때문이었다. 곰곰이 생각 해야 지식이 나오고, 또 거기서 산업이 나오고, 국력이 커지는 이치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곰곰이 생각하는 지루한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는 미덕이 사라졌다고 해도 될 정도로 많이 줄어들었다. 그 대신 생각하는 수고를 포기한 감성의 배설과 감각적 판단이 요즘은 난무한다. 이미 소지한 각자의 신념을 지키는 일로만 세월을 보낸 지 이미 수십 년이다. 이제는 프레임 씌우기가 더 자연스러워져 버렸다. 빨갱이라는 프레임 씌우기로 고통받은 적이 있던 사람들은 위치가 바뀌자 친일파라는 프레임 씌우기에 바쁘다. 이런 토양에서 건설적인 정치와 외교와 정책이 실현될 수는 없다. 척박한 땅에서는 거친 풀이 자란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에게 더 나은 사람이란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감각과 감성보다는 숙고와 사실에 기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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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07 20:45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국가란 무엇인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즉 국가의 명칭을 100년이나 사용하고도 새삼스럽게 다시 국가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매우 복잡한 일이다. 아니 내게만 갑자기 복잡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대한민국의 지성계나 정치계를 둘러볼 때, 나만 혼자서 심사가 복잡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가 미쳤는지 스스로 의심이 된다. 그렇더라도 나를 복잡하게 하는 이 질문을 그냥 넘기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우리는 지금 국가를 국가의 단계에서 대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일단 미쳤을지도 모를 사람이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해본다. 개인의 세계가 가장 넓게 확장된 공적 영역은 국가이다. 한 개인은 자신의 사고나 가치 혹은 생활의 영역을 자신의 주관적인 뜻대로 5대양6대주나 우주까지 확장할 수도 있겠지만, 법적인 제약을 공유하면서 보호를 받고 권리를 주장하는 공적인 영역으로는 국가가 가장 크다. 자기가 속한 국가를 벗어나서도 최소한의 보호나 권리를 향유하려면 여권을 사용해야 한다. 그것마저도 국가 간의 협의를 거쳐 허락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니 개인의 삶이 보호되고 또 허용되는 일이 일어나는 가장 큰 단위는 국가이다. 보호와 허용은 이미 정해진 규칙에 따른다. 이 규칙은 누구나 한 국가 안에서 다 지켜야 하기 때문에 공적 영역이다. 다시 말해, 공적인 체계를 구성하고 공유하면서 서로 북돋우고 견제하는 삶의 장치로는 아직까지 국가보다 더 큰 것이 개발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앞으로도 상당 기간) 개인에게 가장 큰 공적 공간으로 국가를 넘어선 것은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국가는 안전과 이익을 공유하는 배타적 집단이다. 국가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은 배타성이다. 배타성은 배타적 동일성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그래서 동일성은 대내적으로 적용되고, 배타성은 대외적으로 적용된다. 배타성을 발휘하고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힘이 폭력이다. 그래서 국가는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배타적 집단이라고 해도 된다. 국가 안에서 폭력은 관리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폭력을 임의대로 사용하면 국가가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가진 모든 폭력성을 다 거두어서 국가가 총체적으로 관리한다. 국민은 폭력을 사용하면 안 되고, 국가는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 국가가 대외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때는 군대가 나서고, 대내적으로는 경찰이 나선다. 군대와 경찰로 한 국가의 폭력은 관리되고, 내외적으로 생명과 재산이 보호되는 것이다. 국가가 안전과 이익을 공유하는 배타적 집단임을 감안할 때, 결국 최종적인 일은 전쟁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국가는 전쟁을 하는 집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한 국가의 자부심과 역량은 최종적으로 군대로 표현된다. 그래서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가 된다. 대통령을 규정하는 어휘 가운데 대통령과 가장 일치하는 것이 바로 군통수권자이다. 헌법 제66조에서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규정할 때, 그 핵심적인 내용은 군통수권자라는 뜻이다. 제74조에서는 따로 대통령을 군통수권자로 명문화해놓고 있다. 군 통수권자로서의 대통령은 다른 나라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고 또 강화도 할 수 있다.(헌법 제73조) 따라서 국가의 목표는 단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부국강병을 이루는데,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국가 단위에서는 배제되어야 한다. 문중이나 시민단체나 동아리나 정치집단 등에서는 부국강병과 다른 길을 가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에게는 부국강병만이 유일한 길이다. 사실 부국강병에서도 부국이 강병을 위하는 것인 만큼, 국가에게는 강병이 최종 목적지다. 그래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병(强兵)이 빠진 부국(富國)은 체력은 없이 체격만 커진 꼴과 같이 허망(虛妄)하다. 이 허망함을 감추려다보면, 정신승리법으로 겨우 버티는 아큐(阿Q)가 된다. 우리는 이미 아큐(阿Q)인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김원봉을 언급하여 많은 논란이 일었다. 대통령도 말했듯이 현충원은 살아있는 애국의 현장인데, 애국(愛國)이라고 할 때의 국(國)은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다.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습니다.고도 했는데, 애국으로 통합되어야 할 보수와 진보는 중국의 보수와 진보도 아니고, 미국의 보수와 진보도 아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보수와 진보도 아니다. 배타적으로 대한민국의 보수와 진보일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말을 할 때, 말로는 애국이라고 하면서 느낌은 민족을 가졌을지 모른다. 민족적 의미에서 기려야 한다면, 민족적으로 기리면 된다. 애국의 현장은 대한민국만을 중심에 놓고 배타적으로 적용해야만 한다. 국가는 원래 이런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에 기여하고, 6.25 전쟁 중에 대한민국의 파괴를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한 사람을 애국의 한 전형으로 제시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직 논리적으로 부족하다. 하지만, 민족과 국가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면 논리를 좌충우돌 끼워 맞추려 할 것이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권력을 배타적으로 응집하여 완전한 독립의 상태에서 자력으로 국가를 세우지 못했다. 해방 자체를 우리 힘으로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나라도 근본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도와서 선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누가 더 자주적이었는가 하는 논쟁은 정치적인 우격다짐일 뿐이지,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근대 국가를 세워본 경험도 없이 독립을 상실한 우리는 일본에 저항하고 독립의지를 키우기 위해서 민족이라는 개념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민족은 근대국가 안에서 국가를 이루는 구성 중심이 되지만, 굳이 구분해서 말한다면 국가가 민족을 리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국가가 민족 개념을 리드해서 국민 국가를 이룬 프랑스와 달리, 독일은 여러 요인 때문에 민족 개념으로 국가를 리드하려다가 나치즘에 빠지는 우를 범하였다. 우리의 민족관은 아직 과거의 독일 쪽에 더 가까운 특성을 보인다. 우리는 국가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삶의 뿌리에서 인식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가를 가졌기 때문에 국가를 국가의 높이에서 다룰 실력이 아직 부족한 것으로 나타난다. 국가보다 민족이 더 생생한 상태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이다. 언어나 문화나 풍습을 공유한다는 믿음으로 구성되는 정서적 공동체이다. 법률로 관리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민족에 빠지면 감정적이고 정서적이 된다. 국가는 감성과 정서를 배제한 법률과 이성으로 관리된다. 민족은 따뜻하지만, 국가는 차가울 수도 있다. 민족은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기대가 허용될 수도 있지만, 국가는 철저히 이성적이고 사실적 효과에만 기댄다. 민족에 빠지면 호소하려들고, 국가관이 투철하면 힘을 길러 판을 조정하려 한다. 힘을 믿지 않고 설득과 호소와 간절한 눈빛과 따뜻한 태도를 앞세워서 일을 이루려고 한다면, 이는 아직 국가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을 앞세우면 이런 태도들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의 일은 국가적 단계에 맞는 태도로만 성사된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원수이지, 민족의 지도자가 아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나라의 모든 일이 복잡해지고 해결이 난망해진다. 모든 것이 꼬일 수 있다. 외국의 귀빈이 방문하면 군인들로 이뤄진 의장대를 사열하곤 한다. 의장대의 사열을 베푸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따뜻하고 친근함을 표현하려는 의도로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자국의 군대가 얼마나 군기가 잡혀 있으며, 얼마나 강한지를 과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국의 폭력성이 얼마나 잘 정련되어 있는지를 알게 해주려는 것이다. 국군의 날도 마찬가지이다. 대내적으로는 자국의 국민들에게 국가의 폭력성이 얼마나 잘 훈련되어 있고 잘 관리되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서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이 잘 지켜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려는 것이고, 대외적으로는 우리가 이렇게 강하니 함부로 건들지 말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국군의 날은 무력 과시의 날이지, 흥을 돋우고 위로를 나누는 날이 아니다. 그런 일은 따로 하면 된다. 유엔참전용사의 희생과 헌신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열창하는 날이 아니다. 국군의 날은 참전용사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는 날이 아니다. 그런 날은 따로 있다. 군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날이 아니다. 그런 일은 날을 따로 잡아 해야 한다. 군사퍼레이드도 없이 야밤에 가수들 불러 쇼로 국군의 날을 보내는 일이 처음으로 벌어졌다는 것은 이제 국가가 무엇인지 모르는 단계를 벗어나 국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방치의 단계로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국가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면, 과연 상관있는 것은 무엇인가. 군대와 대통령의 마음속에 국가보다 더 상관있는 것이 있다면, 이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아덴만에서 임무를 마치고 귀항한 해군 청해부대의 최영함 입항 환영 행사 도중 사고로 군인 한 명이 사망하고 네 명이 부상을 당했다.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은 국방장관을 대동하고 바로 달려와야 한다. 여의치 않으면, 빈소에라도 와야 한다. 대통령이 비서관을 통해 조화를 보내고 직접 조문하지 않은 것은 군통수권자로서의 사명감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서해 수호의 날에 대통령이 연속 참석하지 않은 것은 국가가 무엇이고, 대통령은 어째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민간 사고의 희생자보다 군 사망자들이 대접을 덜 받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이런 일들이 국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일어났어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누군가를 배려하고 눈치를 보느라 그리되었다면,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은 없을 것이다. 골목에서야 배려하고 눈치를 보며 굽실거리면, 무엇인가 얻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는 절대 그렇지 않다. 국가가 이렇게 하면 아무것도 못 얻고 치욕만 남긴다. 골목과 국가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골목길의 평화는 싸울 의지를 보이지 않고, 비굴한 태도를 보이고, 망신을 당하고도 그냥 모른 체하고 넘어가면 얻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라의 평화는 싸울 의지를 더 분명히 하고, 당당한 호전성을 거침없이 과시해야만 얻어질 수 있다. 북한 비핵화는 한 걸음도 진척이 없는데, 군 대비태세를 스스로 허물고 있는 것도 국가를 국가의 높이로 경영하고자 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군대에는 언제나 목적한 일이 다 풀리고 난 후, 마지막 단계에서나 겨우 조금 손을 댈 수 있다. 우리는 비핵화 진행과정에서 가장 나중에 손을 대야 할 군대에 가장 먼저 손을 댔다.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볼 필요를 느끼게 한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문제는 국가를 국가의 높이에서 경영하지 않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가와 민족 사이에서 대통령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민족의 시각으로는 국가의 문제를 풀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시각으로는 민족의 문제를 풀 수 있다. 국가가 민족을 살리지, 민족이 국가를 살리는 일은 없다. 게다가 우리는 민족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다. 국가들과는 다 등을 돌리고, 민족이라고 상상하는 북한에만 목을 매고, 그 북한과 가까운 중국에만 굽실거리는 것으로는 국가의 높이에 있는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阿Q가 되어 풀리지 않은 현실을 풀린 것으로 정신승리하는 것이 전부일 수도 있다. 심지어 북한과 중국도 민족적 처신을 하고 있지 않다. 철저히 국가적 처신을 하고 있다. 우리만 그것을 애써 알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우리만 환상 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크다. 국가란 무엇인가, 이제부터라도 다시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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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07 19:40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종속성의 극복과 자유로운 삶

인간의 독립성은 근본적으로 생각, 즉 사유의 독립으로 보장된다. 정치적 독립도 사상과 사유의 독립이 뿌리다.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왕조인 과거 조선시대를 들여다봐도 우리는 우리의 사유로 살지 못했다. 중국이란 땅에서 중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생산된 주자학을 우리는 우리의 땅에 그대로 적용하려 무던히 애를 썼다. 정치 외교적으로도 중화질서를 지키고 수행하는 데에 치중했다. 이것이 당시 세계 질서의 큰 판이었고, 어쩔 수 없었으며, 생존의 한 방식이었고, 형식적으로는 그리 보여도 내용적으로나 실질적으로는 독립적이었다는 등의 여러 얘기들을 할 수 있겠지만 총체적으로는 종속적이었다. 중화 질서 속에서 형성된, 그것도 긴 시간동안 형성된 종속성은 아직도 다양한 방면에서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이것을 자각하고 있는가. 종속성의 끝은 식민지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로 36년을 살았다. 종속성을 내면화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해방 후에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했고, 우리는 미국의 그것을 수용했다. 북한과 남한 사이에 서로 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지를 다투곤 한다. 그러나 오십보백보다. 종속성에 갇혀 있으면 나타날 수 있는 대표적인 심리 현상이 주도적인 사고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한 생각을 추종하거나 따라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라지고 외부의 어떤 것이 들어와 자기 대신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 종속성이다. 더 나아가서, 외부의 것에 지배되어 나타나는 종속성에 익숙해지면, 자기 안에 내면화된 기존의 이념이나 신념을 반성 없이 그대로 수호하려고만 하고 세계의 흐름에 맞춰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못한다. 이것도 종속성의 한 표현이다. 종속성은 외부의 것을 추종하는 형식으로도 있지만,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이념을 변화 없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형식으로도 있다. 지금 우리는 이 두 형식 모두에 사로잡혀 있다. 독립적이면 부드럽고 유연하지만, 종속적이면 뻣뻣하고 경직된다. 독립적이면 주도적인 사고력을 갖지만, 종속적이면 사고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독립적이면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자각하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만들려고 덤비지만, 종속적이면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그대로 들여와 쓴다. 종속적이면 자기 필요를 각성하지 못한다. 남의 필요에 의존한다. 자기는 남의 그 필요를 내면화 한다. 독립적이면 자기가 직접 보고 만지는 것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그리지만, 종속적이면 타인이 좋아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그린다. 독립적이면 나를 그리지만, 종속적이면 남이나 우리를 그린다. 독립적이면 나를 노래한다. 그러나 종속적이면 남이나 우리를 노래한다.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그리지 못하고, 주입된 관념을 그리는 것이다. 독립적이면 선례를 만들려 하고, 종속적이면 선례를 찾는다. 독립적이면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 종속적이면 습관적으로 벤치마킹을 시도한다. 독립적이면 내 언어와 내 문자를 쓰지만, 종속적이면 외부의 그것들로 나의 그것들을 흐트러뜨린다. 독립적이면 지적인 경향을 보이고, 종속적이면 감각과 본능에 더 의존한다. 독립적이면 전략적이 되고, 종속적이면 전술적 단계에 머문다. 독립적인 나라에서는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좋은 명분이고, 종속적인 나라는 명분을 추구하는 것이 좋은 명분이다. 독립적이면 선진국까지 올라서고, 종속적이면 중진국이 오를 수 있는 최고 높이다. 독립이 습관이 된 나라의 정치는 사실에 의존하고, 종속성이 팽배한 나라의 정치는 도덕에 붙잡힌다. 독립적이면 몸이 앞으로 기울어 미래를 향하지만, 종속적이면 뒤로 기울어 과거에 갇힌다. 독립적이면 본질을 선택하고, 종속적이면 기능을 선택한다. 독립적인 나라의 정치는 국가 전체를 조망하며 나아가고, 종속적인 나라의 정치는 극히 편향적이거나 진영을 위주로 한다. 그래서 박정희 비판하다가 김일성을 향하게 되고, 미국 일본 비판하다가 중국으로 기울어 버린다. 박정희 비판할 때 사용하는 도구를 김일성한테는 적용하지 않고, 미국 일본 비판할 때 쓰는 기준을 중국에는 적용하지 않는 비이성적 감성에 함몰된다. 독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로 내 노래를 하지 않는 일이나, 내가 본 것보다는 다른 사람이 본 것을 그리는 일이나, 내 물건을 내가 만들지 못하는 일이나, 정치가 진영에 갇히는 일이나, 외교가 객관적 사실보다는 심리적 기대에 의존하는 일이나, 실용보다는 이념에 빠지는 일이나, 정치에 협치가 실현되지 않는 일들이 다 같은 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들일 뿐이다.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번영과 생존은 독립을 다시 생각해야만 보장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종속적인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까지 이미 도달했다. 새로운 도전은 종속성을 극복하여 한 번 독립적 단계로 올라서는 일로만 의미를 가질 것이다. 독립성은 독립적 사고와 독립적 생활 방식으로 훈련된다. 일상에 가까운 일부터 먼저 돌아보자. 일상부터 독립적인 태도로 살아야 사유의 독립이 가능하다. 일상이 종속적이면 삶이나 공동체가 독립적일 수 없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우리를 외부의 어떤 것과 비교하면서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 드는 경우가 많다. 송도, 통영, 김포, 부산, 평택이 모두 한국의 베니스라는 간판을 경쟁적으로 앞에다 건다. 송도가 송도면 되지, 왜 꼭 베니스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가. 월악산, 노고단, 대관령이 서로 한국의 알프스라고 한다. 영남에는 아예 영남 알프스가 있다. 대관령이 대관령으로 존재해야 진정한 가치를 부여받지, 알프스에 인정받음으로써만 대관령이 될 수 있다면, 대관령은 위대해지기 어렵다. 걷는 길을 만들어놓고는 서로 한국의 산티아고 길로 불리려고 안달이다. 이런 일들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다. 한국의 스티븐 호킹, 한국의 나폴리, 한국의 간디, 한국의 파바로티. 한국의 마돈나, 한국의 퓰리처상, 한국의 센트럴 파크, 한국의 조르바, 한국의 라이온 킹, 한국의 히말라야, 한국의 이치로, 한국의 아인슈타인, 한국의 호날두, 한국의 알랑드롱, 한국의 로버트 파커, 한국의 로버트 타우니, 한국의 로버트 드 니로, 한국의 톰 크루즈, 한국의 톰 행크스, 한국의 톰 포드, 한국의 마이클 볼튼, 한국의 마이클 잭슨, 한국의 마이클 조던드버그, 한국의 에디슨, 한국의 슈바이처, 한국의 페스탈로치, 한국의 다빈치, 한국의 헐리우드, 한국의 만델라, 한국의 빅토르 위고, 한국의 레이 찰스, 한국의 주윤발, 한국의 테일러스위프트, 한국의 샤론스톤, 한국의 아브라함 링컨, 한국의 MIT.. 등등. 다 셀 수가 없다. 자신을 자신의 특징으로 증명하려는 의도가 거세된 종속적 습관이다. 남의 이름에 연관되어야만 비로소 자기가 된 느낌. 자기를 자기의 눈으로만 보면 왠지 부족한 감이 드는 느낌. 모두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에 빠져 있다는 것은 독립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정서적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어느 섬에서 걷기 대회를 하는데 이름이 슬로우 걷기 대회라고 한다. 느리게 걷기 대회라고 못하는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지방자치단체도 옐로우 시티, 판타지아, 국제 슬로 시티 등의 표어들이 앞에 붙어 있다. 공공 기관의 표어치고는 너무 외부 의존적이다. 자주성과 독립성의 최후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국방부도 국방 헬프콜을 운용한다. 국방 도움전화는 왜 안 되는가. 어떤 부대는 구호 자체가 필승이나 단결이 아니라 아이 캔 두(I can do.)인 것을 보았다. 자기가 자신의 언어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면, 자신이 자신의 언어로 확인되지 않을 것이다. 용기는 자기가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자기로 살기 위해 발휘하는 주체적인 활동이다. 자기 언어에서 스스로 소외된 주체가 용기를 발휘할 수 있을까? 이처럼 우리나라는 지금 일상의 종속성까지도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외부의 것에 의존해서만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는 지경이고, 더욱이 외국말로 포장해야 만 더 권위 있게 보이는 줄 안다. 언어를 다루는 방송도 마찬가지다. 프로그램 제목들에서 종속성이 습관이 되어버린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마이베이비, 배틀트립, 시니어 토크쇼, 돈워리스쿨, 미스터리 키친, 애니멀 레스큐, 맨인블랙박스, 나이트 라인, 모닝 와이드, 스포츠 다이어리, 해피 투게더, 스포츠 투나잇 등등. 굳이 이래야만 하게 된 우리는 누구인가. 언어가 주체의 독립을 지키는 근본 장치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언어를 소외시키는 방송은 또 우리에게 무엇인가? 조선 전기부터 중기까지 조선의 화가들은 조선을 그리지 않았다. 산천도 조선의 산천이 아니라 중국 산천을 그리고, 옷이나 집이나 물건들도 모두 중국의 것을 그렸다. 조선의 그림에 나오는 소도 조선의 소가 아니라 긴 뿔이 난 중국 남방의 소였다. 그림을 매개로 나를 표현하는 예술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 주입된 종속적 관념을 재현하기만 했다. 자기 세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 그린 것이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남이 주입한 관념을 그리면서도 그것을 보고 감탄을 하고 서로 칭찬을 주고받으며 산 것이다. 그런 태도를 주입한 사람들이 볼 때는 얼마나 우스웠을지 짐작이 된다. 조선 후기에 와서야 비로소 조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소위 겸재의 진경산수이다. 외부에서 주입된 관념을 그리는 것도 진경산수가 아니지만, 내게 만들어진 이념을 수십 년 간 바꾸지 못하고 계속 그리던 것만 그리는 것도 진경산수가 아니다. 수십 년 간 변한 세상과 호흡하지 못하고, 정해진 자기 이념만을 고집하는 것도 자신의 세계를 그리지 못하고 주입된 관념을 그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독립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그리지 못하고, 장기간 내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정해진 관념이나 외부에서 온 관념만을 그리는 종속적 태도는 본질보다는 기능에 빠진 삶을 살게 한다. 이것이면 어떻고 저것이면 어떤가. 멋있게만 보이면 되지.나 오마이베이비면 어떻고 애니멀 레스큐면 어떤가. 멋있게만 들리고 시청률만 높으면 되지.라는 경박함에 빠진다. 이것은 인성이 좀 나쁘면 어떤가, 공부만 잘하면 되지.라고 하는 말과 완전히 일치한다. 기능에 빠진 삶으로는 독립적 단계에 오를 수 없다. 기능에 빠진 태도를 가진 사람은 독립을 모른다. 독립을 모르면 창의가 없다. 독립과 창의가 없다면, 부강하고 자유로운 삶을 이룰 수가 없다. 이제는 종속성을 자각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할 때다. 그러지 않으면 생존이 위협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건명원 초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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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19 20:33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높이에서 새로 살자

멈춰야 하는가, 달려야 하는가. 버려야 하는가, 가져야 하는가.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하는가, 그만 내려놓아야 하는가. 쉼 없이 근면해야 하는가, 이제 그만 소위 힐링을 구해야 하는가. 지지부진한 삶 속에서도 이런 질문들은 종횡무진 파고든다. 이 질문다발은 결국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로 합쳐진다. 참 어려운 일이다. 누구는 이렇게 해야 옳다 하고, 다른 누구는 또 저렇게 하라고 한다. 이렇게 살라는 사람이나 저렇게 살라는 사람 모두 틀리지 않아 보이니 선택은 더욱 어렵다. 모두 틀리지 않아 보이는 이유는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맞아서라기보다 필시 자기만의 각성이 이뤄지지 않았거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뭘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무명(無明)에 빠져있으면 돌고 도는 윤회의 틀을 못 벗어나는 것과 같다. 당연히 삶의 무대를 알아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말하기 전에 어디서 사는지를 알아야 한다. 연극배우도 연기를 잘하려면 자기가 서는 무대의 정체에 밝아야 한다. 인간이 사는 무대는 두 덩어리로 되어 있다. 하나는 인간이 만든 덩어리, 다른 하나는 인간이 안 만든 덩어리.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인간이 만든 것 아니면, 안 만든 것이다. 인간이 안 만든 덩어리는 인간과 별 관계없이 자기가 가진 원칙에 따라 자기 알아서 스스로 돌아간다. 자기 알아서 스스로 돌아가는 것을 자연(自然)이라고 한다. 다른 한 덩어리는 인간이 만들었다. 문명(文明)이다. 문명(文明)이라 할 때의 문(文)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다 인간의 손이 닿았다는 뜻이다. 인간이 만든 것이다. 문자(文字)는 인간이 만든 기호이고, 문학(文學)은 인간이 만든 이야기에 관한 지적 활동이다. 문명은 문화(文化)라고 하는 인간의 독특한 활동이 만든 결과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하거나 만들어서[文] 변화를 야기[化]한다. 이런 의미로 인간은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화적 존재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일을 가장 근본적인 사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만년필을 만들었다 치자. 만년필이 없던 세상과 만년필이 새로 등장한 세상은 다르다. 어찌 되었건 이제 세상은 만년필이 있는 세상과 없던 세상으로 갈라진다. 달라진 것을 변화라고 한다. 만년필을 만든 사람은 이 세상에 변화를 야기한 격이다. 변화를 야기함으로써 인류의 삶은 더 넓어지고 편리해진다. 인류에게 하는 중요한 공헌이다. 만년필을 만든 사람은 인간 삶에 변화를 야기하였고, 만년필을 만들지 않고 사용만 하는 사람은 야기된 변화의 결과를 그저 수용했다. 물론 만년필을 수용하여 사용하면서, 자신만의 다른 변화를 야기할 수도 있다. 이것도 문화적 활동이다. 인간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화적 존재다. 즉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존재다. 이 정의가 내려지는 순간, 인간은 두 층으로 격이 나뉜다. 누군가는 변화를 야기하고, 누군가는 야기된 변화를 받아들인다. 변화를 야기하는 문화적 활동을 하는 사람을 자유롭다, 주체적이다, 독립적이다고 표현하고, 야기된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종속적이다고 칭한다. 인간이 근본적인 의미를 잃지 않고 활동하면, 자유롭다-독립적이다-주체적이다는 말을 듣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 문화적인 높이로 산다는 뜻이다. 만년필을 만든 사람은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이고, 누군가 만든 만년필을 수용하기만 하면 종속적이다.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이 하는 활동이 창의적 활동임은 매우 자명하다. 그래서 자유-독립-주체-창의는 같은 차원에서 하나로 모여질 수밖에 없다. 문명은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다. 가장 낮은 층을 이루는 것이 물건들이다. 물건은 보이고 만져지는 것들로서 분명하고 구체적이다. 대포, 컴퓨터, 군함, 연필 등등이다. 물건은 물건 자체의 역량으로 그냥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는 길과 돌아다니는 길이 잘 만들어져 있어야 좋은 물건이 나온다. 물건이 나오고 돌아다니는 길을 제도라고 한다. 도시, 농촌, 민주제, 공화제, 사회조직 등등이다. 이것은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이다. 좋은 제도는 좋은 물건이 등장하도록 보장한다. 그런데 제도는 또 좋은 세계관이나 생각의 방식, 즉 철학에서 비롯된다. 철학은 추상적이다. 좋은 철학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구체적인 일상의 삶은 좋은 물건으로 보장되고, 구체적인 좋은 물건은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좋은 제도가 만들며, 좋은 물건들과 좋은 제도는 추상적인 좋은 철학이 책임진다. 한 사회 구성원들의 시선이 물건에만 가 있으면 후진국, 물건과 제도에 가 있으면 중진국, 물건과 제도와 철학에 모두 가 있으면 선진국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선진국이라 불러도 그냥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높은 단계에 와 있지만, 아직은 중진국이다. 우리 사회의 격렬한 논쟁들은 여전히 제도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공수처를 만드느냐 안 만드느냐, 내각제로 바꿔야 하나 아니면 대통령 중심제를 유지해야 하는가, 대학입시에서 수능을 몇 퍼센트로 하고 자사고를 폐지하느냐 유지하느냐, 선거제를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재벌을 개혁해야한다 말아야 한다 등등 수준 높은 거의 모두가 제도와 관련된 것들이다. 의식도 매우 제도 의존적이다. 자녀들을 교육 시키고 싶은 방향은 이런데, 교육 시스템 때문에 그렇게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따라간다고 하는 말이나 나는 이렇게 살고 싶었는데 내 삶이 사회구조 때문에 이리 되었다고 하는 한탄들도 결국은 모두 제도에 깊이 의존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교육은 자신과 사회를 독립적으로 책임질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다. 여기서는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가, 어떤 사람을 만드는가가 당연히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교육은 입시 제도에 함몰되어 있다. 고등학교라는 제도에서 대학이라는 제도로 이동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 대학이나 고등학교라는 제도를 이용해서 어떤 사람을 만드는가나 어떤 사람이 되는가는 옆으로 밀쳐져 있다. 교육 현장의 황폐화는 교육의 정신과 철학이 사라지고, 제도를 지키려는 종속적 습관에서 비롯된다. 우리 사유의 높이는 제도까지는 도달했으나 문화나 철학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는 중진국 상위 단계까지는 왔으나 선진국으로 진입은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종속적 단계로는 가장 높지만 자유롭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모든 말들을 다 묶으면 결국 우리는 아직 문화적이지 않다는 말로 귀결된다. 우리는 어느 단계에 사는가. 자유롭고 독립적인가. 아직 아니다. 우리 삶을 채우며 편리와 풍요를 제공하는 거의 모든 물건 가운데 우리가 만들기 시작한 것은 거의 없다. 우리가 독립적으로 만들어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한글이 거의 유일하다. 우리는 제조업 강국이라 물건을 잘 만들고 또 수출해서 먹고 산다. 그러나 아무리 잘 만들어 수출까지 하는 물건이라 해도 우리가 만들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에서 만들기 시작한 것을 들여와 따라 만들었을 뿐이다. 물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제도를 우리가 만들어서 쓰고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 우리 삶의 구체적 구성물인 물건과 제도 모두 외부에서 들여왔다. 독립적이기 보다는 종속적인 구조 속에서의 번영과 발전이다. 지금 단계에서 우리가 시도해야 할 새로운 도전은 매우 분명하다. 제도적인 차원이 아니라 문화적인 차원에서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는 일이다. 정치적이고 감성적인 독립이 아니라 삶의 독립, 생각의 독립,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높이의 독립이다. 인간을 규정하는 말들은 적지 않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수, 호모 파베르, 호모 루덴스, 호모 이코노미쿠스 등등.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드는 일을 기준으로 한 분류들이다. 이런 모든 분류를 하나로 통합하여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인간은 문화적 존재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도전에 나서지 않는 인간은 인간적이지 않다. 문명은 인공적이고 조작적인 것이며, 이런 문명을 쌓는 인간은 인공적이고 조작적인 활동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 인공과 조작을 거부하고, 그냥 아무렇게 하거나 내버려 두는 것을 자연이라고 하면서 높은 차원의 것으로 인식하는 흐름이 있는데, 이는 인간적이라기보다는 패배적인 자세일 뿐이다. 문명을 건설하는 사명을 가진 인간에게 자연적이라는 말은 인위와 조작적 활동의 결과를 원래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경지까지 끌어올린 것이지, 인위와 조작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인간적인 삶은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삶이다. 다시 말해,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이고 창의적으로 사는 삶이다. 이런 삶의 태도는 있던 곳에서 없던 곳으로 나아가게 한다. 즉 변화를 야기한다. 아직 인식되지 않은 곳, 아직 경험된 적이 없는 곳으로 이동한다. 그래서 근본적인 의미에 닿아있는 인간이라면 머무르지 않는다. 혁명의 깃발을 완장으로 바꾸지 않는다. 지속 부정과 새말 새몸짓으로 무장한다. 지금 우리에게 새말 새몸짓은 무엇인가. 제도의 높이에서 멈춘 상태를 넘어서서 삶의 태도와 관점의 혁신을 감행해야 한다. 철학과 과학과 문화적인 높이로 상승하는 일이다. 중진국의 함정에서 벗어나 선진국 높이로 올라서는 도전을 감행해야 한다. 바로 문화적이고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단계로 상승하는 일이다. 건국과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신화는 물건과 제도의 높이에서 이룬 발전이다. 후진국과 중진국 정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제 이런 성공 신화를 뒤로 물리치고 한 단계 더 높고 새로운 신화를 써야 한다. 산업화 세력이 건국 세력을 도태시키고 새로워졌듯이, 민주화 세력이 산업화 세력을 밀어내며 나라를 새롭게 했듯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새말 새몸짓으로 무장한 새로운 세력이 민주화 세력을 도태시키는 도전이다. 민주화 단계까지 올라서면서 하던 얘기와 주장을 아직도 계속하면서 그것을 지키려고만 하고 있다면, 당신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하더라도 아직 인간적이지 않다. 권력과 재력으로는 어쩔지 모르지만, 인간으로는 미성숙 상태에 있다. 깃발을 완장으로 바꿔 차고 그저 그렇게 살고 있는 사소한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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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29 20:02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프롤로그

전북일보사 등 전국 주요 9개 신문사로 구성된 한국지방신문협회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건명원 원장의 글을 기획해 게재합니다. 최교수는 한국의 인문학 바람을 이끄는 대표적인 철학자로 삶과 세상을 읽는 통찰력과 혜안을 제시할 것입니다. 새로워져야 할 때, 새로워지지 않으면 현재 가지고 있는 새로움 정도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급속하게 더 낡아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한 단계 도약해야 할 때, 도약하지 못하면 지금 수준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급속한 하강을 하게 되는 것 또한 세상의 이치다. 우리는 지금 답답한 처지에 있다. 중진국의 함정이라고도 한다. 말레이시아, 태국, 브라질,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나 칠레도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대표적 사례다. 우리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말들이 있어 온지 오래다. 2013년 한국 경제를 끓는 냄비 속 개구리에 비유하면서 한국의 침체와 하락 가능성에 경종을 울렸던 컨설팅 업체 맥킨지가 2018년에 한국 경제가 더 나빠졌다고 재차 경고를 했다. 한국 경제는 여전히 물이 끓는 냄비 속 개구리 상태다. 5년 전보다 물 온도는 더 올라갔다. 나는 이 말 속에서 날카로움도 읽지만 조롱도 발견한다. 이런 조롱을 받을 나라는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세계에서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표현하면서 박수를 보내주던 일이 그리 오래전도 아니다. 현대사에서 한강의 기적을 말할 때, 독일이 이룩한 라인강의 기적도 함께 말하지만, 기적이라면 한강의 기적만이 기적이다. 독일의 그것은 있다가 없어진 것을 회복한 것이지만, 우리는 없던 것을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적을 이룬 나라고, 기적을 이룬 국민이다. 이런 기적을 이룬 나라는 사실상 인류 현대사에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식민지 시절을 보내다 독립하여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룬 나라가 대한민국 외에는 없다.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룬 유일한 나라다. 원조 받던 국가에서 원조 하는 나라로 탈바꿈한 것도 우리가 유일하다. 자원과 기초적인 물적 토대 없이 이 정도의 발전을 이룬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해냈다. 다른 나라들은 모두 식민지 착취를 통해서 발전의 토대를 갖췄지만, 우리는 외부의 착취 없이 우리만의 힘으로 이룬 것이니 발전의 내용 또한 다른 나라와 비교 하자면 더 도덕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높이는 딱 여기까지라는 점이다. 끓는 냄비 속에 있으면서도 뜨거워지는 줄을 모르는 형국이다. 기적을 이룰 정도로 그렇게 근골을 잘 사용하고 영특하던 우리가 끓는 냄비 속에 있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무지 속으로 빠져버렸다. 우리는 한계에 갇혔다. 우리를 한계에 가둘 정도로 몸에 밴 익숙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따라 하기라고 표현할 수 있는 종속성이다. 해방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룬 발전과 번영은 이 따라 하기의 속도와 효율성이 빚어낸 결과다. 우리는 물건을 우리가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돈을 벌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기 시작한 것을 들여와 만들어 돈을 벌었다. 우리가 만든 제도로 우리 삶을 제어하고 북돋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제도를 들여와 우리 삶을 거기에 맞췄다. 우리가 독립적으로 한 생각으로 우리의 세계관을 삼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철학을 우리의 비전으로 하며 살았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이룬 발전과 번영의 속살이다. 이 일을 세계 유례없이 잘해냈다. 그러나 따라 하기로 살 수 있는 높이는 여기까지다. 따라 하기에 습관이 되면 삶의 태도와 사유 구조가 한 쪽으로 치우치거나 종속적인 삶을 살기 쉽다. 그렇게 되면, 이익보다는 명분에 집착하고, 지적이기 보다는 감각적이고, 실재보다는 도덕에 빠지며, 본질보다는 기능에 집중한다. 명분과 도덕은 정해진 기준을 수행하는 일이므로 과거의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태도에서는 미래를 여는 도전보다는 과거를 헤집는 일에 빠진다. 당연히 이미 알고 있는 것이나 믿고 있는 것만을 수행하려 들지, 그것들을 바꿔 새로움을 기약하는 혁신적 도전에 나서지 못한다. 사회가 멈추고 썩기 시작하는 이유다. 새로워져야 할 때 새로워지지 못하면, 썩는다. 도약해야 할 때 도약하지 못하면 하강한다. 우리는 조선 말기에 이미 경험했다. 이 나라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우리가 다급한 이유는 조선 말기 다산 선생의 이 절절한 경고가 지금 우리에게 어느 하나 어긋남 없이 해당되기 때문이다. 국가 단계의 높이에서 통치력을 행사했던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이 마지막이다. 김대중 대통령 이후의 통치력은 감성적 민족주의에 매몰되거나 권위주의적 시대가 남긴 탐욕과 특권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과거의 운동권 이념을 넘어서지 못한 상태에서 반대쪽 진영을 부정하려는 기능적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정도 이상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이명박과 노무현 사이나 박근혜와 문재인 사이에 있는 수평적 차이를 수직적 차이로 착각하지 말자. 높이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다. 같은 높이에서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있을 뿐이다.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로 시작한 진영이 이젠 이건 나라냐라는 말을 듣는다. 이게 나라냐라고 주장한 쪽과 이건 나라냐라고 주장한 쪽 사이가 얼마나 멀까? 4대강 보를 만든 쪽과 허무는 쪽 사이는 또 얼마나 멀까? 같은 높이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방송 장악은 어느 정권에서나 똑같다. 안하무인의 인사, 어용 기자들의 득세, 표현의 자유 억압, 불통, 협치 실종, 권력의 청와대 집중, 낙하산 인사, 블랙리스트 등은 어느 정권에서나 모두 나타났다. 다름이 없다. 같은 높이에 있으면서는 사실 다르기가 더 어렵다. 다름이 없는 이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아무리 다르다고 각자 주장해도 모든 진영이 실제로는 같은 높이의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계를 뚫고 올라서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점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자. 즉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으로는 이미 할 일을 다 해버린 민족이라는 사실이다.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도달할 그 높이에 이르는 도전 이외에는 가져야 할 사명도 달리 없다. 중진국의 한계에 이른 우리는 이제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도전에 나서야 한다. 전술적 차원에서의 사고를 전략적 차원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 대답에 익숙한 지적 활동성을 질문을 시도하는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 건국 세력이 산업화 세력에 의해 도태되고, 산업화 세력이 민주화 세력에 밀려나는 과격한 운동을 통해서 우리의 역사가 진보했듯이 이제는 민주화 세력도 도태되어야 한다. 민주화 세력도 이미 구세력이다. 민주화 세력을 도태시킬 새로운 세력의 형성을 도모해야 한다. 당연히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삶의 태도가 필요해진 이유다. 따라 하기로 갈 수 있는 최고점까지 왔으니, 따라 하기가 아닌 방법으로만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 다른 결과는 다른 방법으로만 얻을 수 있다. 다른 결과를 기대하며 방법과 태도를 바꾸는 것을 혁신이라고 하지 않은가. 그런데 전략적이고 선진국적인 높이로 상승하는 일이 가능하기는 한가?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문명의 파라다임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상황에서라면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1820년 대분기 이후에 후진국과 선진국 사이의 교체는 없었다. 이 말은 한 번 후진국은 계속 후진국에 머물기 쉽고, 한 번 선진국은 계속 선진국이기 쉽다는 말이다. 각 단계를 결정하는 높이의 시선에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축복이 왔다. 바로 몇 백 년 계속되던 파라다임이 깨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기존의 파라다임에 균열이 생기고 틈이 생긴 것이다. 후발 주자들이 자신의 단계를 뛰어넘어 한 단계 더 상승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존의 파라다임이 깨져야 하는데 우리의 국력이 가장 강해진 지금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 문제는 우리가 그 축복을 직시하고 있는가의 여부와 그 축복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가의 여부다. 애석하게도 아직까지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본질보다는 기능, 실재보다는 도덕, 이익보다는 명분, 질문보다는 대답에 더 비중을 두는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시선이 항상 미래보다는 과거를 향해 있다. 미래를 여는 도전보다는 먼저 과거를 한 점 오차 없이 헤집는 일을 해야 더 진실하게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도록 훈련되었다. 따라 하기에 익숙해지면 결국 미래보다 과거를 더 중시하게 되는 심리를 갖게 된다. 입으로는 미래를 말하지만 사실은 과거를 산다. 그래서 과거의 규정으로 미래의 전개를 제어한다. 과거에 정해진 규제로 있어본 적이 없던 미래의 변화를 제어하는 일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빅데이터의 시대에 데이터를 모으지 못한다. 초 융합 연결의 시대에 원격 의료를 막는다. 4차 산업혁명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인 공유경제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이것은 과거로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해야 진실한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우리가 훈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일어나는 문명적인 혁명의 시기에도 과거로 과거로만 계속 회귀하려 한다. 이 절박한 시점에 삶의 방식이나 태도가 전면적이고도 근본적인 각성을 통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각성이 없으면 여기까지만 살다 가지 이 이상의 삶을 누리지는 못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후손들에게 영광이 아니라 치욕을 물려줄 수도 있다. 진영 지키기에 빠진 우물안 개구리들은 역사의 열차에서 내려야 한다. 낡은 문법을 지키는 투사들은 이제 필요 없다. 차라리 경쾌한 도전에 나서는 젊은 무모함이 더 의미 있다. 우리가 어떻게 생존해 온 민족인데, 우리가 어떻게 되찾아 어떻게 발전시킨 나라인데, 여기까지만 살다가도 괜찮겠는가? 낡은 문법과 결별하여 새로운 문법으로 무장하고 새로운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밖에 없다. 부질없다, 부질없다. 정해진 모든 것.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모든 언어들, 모든 생각들. 백설의 새 바탕에 새 이야기 새로 쓰세. 새 세상 여는 일 말고 그 무엇 무거우랴. 새 말 새 몸짓으로 새 세상 열어보세. -최진석(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 ■필자 약력 ◆글:최진석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건명원 초대원장 서강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 석사, 베이징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 저서 탁월한 사유의 시선 나는 누구인가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저것을 버리고 이것을경계에 흐르다 ◆삽화:송필용 전남대 미술교육과, 홍익대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서울 학고재갤러리, 이화익갤러리 등 개인전 20회, 1996년 제2회 광주미술상 수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작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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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2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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