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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서의 향기]자기희생의 극치 '烈女'

1893년(고종30)에 박승옥이 올린 격쟁원정(擊錚原情)에 대하여 예조에서 정려를 세워주도록 한 입안(立案)문서. ([email protected])

 

'저의 4대 조모인 연안 李氏께서는 시집온 이후 시부모를 극진히 모셔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하였으며 남편의 병이 깊어지자 약을 다리고 입에 맞는 음식을 구하여 병자의 구완을 지성스럽게 하였습니다.

 

집이 워낙 가난하여 어쩔 수 없이 몸소 품일을 하여야 함에도 지성스러움을 다하였습니다. 밤낮으로 일을 하여 피곤하고 지쳤을 터인데도 하늘에 빌고 자신이 대신 죽기를 기원하였으며 마침내 남편이 죽자 장제(葬祭)에 소홀함이 없이…-중략-'(관련고문서 고01378)

 

윗 글은 1893년(고종30)에 박승옥이 올린 격쟁원정(擊錚原情)에 수록된 그의 고조모 연안 李氏의 열행(烈行)이다. 원정이란 개인이 원통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이 딱한 사정을 국왕에게 직접 진소하는 문서이며 이를 위해서 어가가 지나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징을 쳐 하문을 기다렸다가 올리기 때문에 이를 ‘격쟁원정’이라고도 한다.

 

전주에 사는 前司果 박승옥은 1893년 9월 13일에 왕의 행차 근처에서 격쟁하여 자신의 고조모인 연안 이씨의 열행을 알렸고 왕명에 따라 예조에서는 이 사실을 확인하고 정려를 세워주도록 입안(立案)해주었으며 정려 수립시에 소요되는 인원과 각종 자재 일체를 관에서 지원하고 자손들의 각종 잡역을 면제해주도록 해당관에 지시하였다.

 

박승옥이 격쟁하여 원정을 올린 때부터 입안문서가 성급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단 열흘이었다. 이 입안문서를 보면서 몇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박승옥은 어째서 100여년전에 세상을 떠난 고조모의 烈行을 조정에 알리려고 했을까하는 것이며 단 열흘 만에도 해결될 수 있었던 일을 일반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천리길을 달려가서 가슴 깊이 맺힌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는 격쟁원정이라는 방식을 취했을까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정부에서 충(忠)· 효(孝)· 열(烈)을 장려하고, 거기에 두드러진 행적이 있는 사람은 삼강행실도에 올려 백성들의 사표로 삼기도 하였고, 또 정려를 내려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하기도 하였다. 충 · 효· 열의 정려가 내리면 세상에서는 이를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정려를 내려달라는 추천장이 많아지는데 그 절차가 상당히 복잡하였기에 일반 평민층에서는 사실 충 효 열의 행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정려를 받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사대부가에서는 조금이라도 근거가 있으면 통문을 만들어 상달하여 정려를 받기 위해서 애썼으며 조선조 末이 되면 믿기 어려울만큼 많은 정려가 내려진다.

 

전라도내에도 정려와 효열비가 2000여개나 되는데 이중 정려의 경우 거의 절반 이상이 고종 연간에 내려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열녀를 찬양하는 통문이 돌고 그녀들의 열행을 기리는 정려가 내려졌지만 이러한 일반적인 절차가 오히려 박승옥에게는 불가능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자신의 고조모의 열행은 가난한 집에서 품을 팔아가면서까지 시부모 봉양을 하고 남편의 병구완에 전력을 다하다가 남편의 대상(大祥)을 마친 뒤 下從(남편이 죽은 뒤 따라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자기희생의 극치를 보여주는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烈女像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일반적인 절차를 통해 정려를 받을 수 없는 현실이 더욱 분하고 원통했는지도 모른다.

 

목적이나 과정이 어떠하였든간에 후손의 격쟁원정을 통해서 한 이름없는 과부의 묻혀져 버린 처연했던 삶이 기억되고 사회적 지지를 받으며 그녀의 삶의 방식이 훗날 후손들에게 시혜를 베풀게 되는 과정을 위 입안문서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최윤진(전북대 강사, 전북대박물관 고문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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