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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서의 향기] 한 아버지의 아들, 신분 달라

1736년 9월에 전라도 남원부에 거주하던 이유가 전라관찰사에게 제출한 소지로 자신을 욕보인 서얼 이정량을 처벌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한 가문 내에서의 적서간의 갈등이 어떠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email protected])

지금에 와서는 많이 달라졌지만, 종래 가부장제 사회의 대표적인 유산인 족보와 종중은 남성들만의 것이었다. 여성들은 성이 기재되었지만 성(姓)은 아버지를 표시할 뿐이었고 여성자신의 이름 대신, 남편의 이름이 기재되었다.

 

차별은 여성들만 당한 것이 아니었다. 남자들 가운데에서도 적서의 차별이 엄격하였다. 따라서 족보를 보면 남존여비는 물론 적서의 차별이 엄격하게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사회는 일부일처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첩을 인정하는 이중적인 가족제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처는 1명이지만 다수의 첩을 인정하였고 이에 따라 처와 첩의 자식들도 위계를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법제적 조치가 곧 ‘서얼금고법’이다.

 

첩의 소생인 서자는 서얼이라고 통칭하기도 하였는데 어머니의 신분이 양인이면 서자(庶子), 천인이면 얼자(孼子)라 하였다. 이들은 본부인에게 태어난 (嫡子)에 비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당했으며, 재산상속이나 가족 내에서도 아들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이러한 적서의 차별은 양반의 특권과 권위를 소수가 독점하기 위한 양반사회의 자기도태 작용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러한 서얼의 차별은 가족 내의 일로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1736년 전주 이씨 종중회에서 일어난 일은 서얼의 문제가 단순한 집안의 문제만이 아님을 잘 알려주고 있다. 당시 이유(李?)의 집안에서는 적서(嫡庶)를 가리지않고 동안(洞案)에 올렸는데 서얼의 경우 적자 밑에 기재하고 이름에 표시를 하였다. 서얼인 이정량은 이름에 표시한 것을 없애줄 것을 요구하자 이유는 적서를 분명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정량은 좌중에서 오히려 이유에게 적서를 운운할 자격이 없다며 창피를 주자 분을 삭이지 못한 이유는 관찰사에게 적서를 분명히 가려줄 것을 요청하며, 감히 얼자인 이정량이 적자인 자신에게 대들고 욕보인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처벌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관찰사는 엄연히 적서의 법이 존재하는데 서자가 적자를 능멸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상세히 조사하여 엄하게 처벌하라는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그 후 이정량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문서는 없으나 서자가 적자를 능멸한 행위는 현행의 법률로 말하자면 형사처벌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실학자 박지원(1737∼1805)은 당시 서얼의 인구를 ‘거의 전국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고 있다’ 고 밝히며 서얼의 사회적 문제의 심각성을 토로하였다. 서녀로 태어난 황진이가 기생이 된 이유나, 허균(許筠)이 소설에서 홍길동이 집을 떠난 이유를 적서의 차별로 설정한 것도 이러한 적서차별의 현상이 얼마나 심각한 사회문제였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정성미(원광대강사, 전북대박물관고문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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