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환(군산대 철학과 교수)
금강은 전북 장수에서 발원해 충청남북도를 거친 뒤 강경을 기점으로 충남과 전북의 경계를 나누며 흐르다 군산을 통해 서해로 들어간다. 역사적으로 금강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인 문물교류의 현장이었다. 동아시아에서 본격적인 해로가 개척된 시점은 기원전 4세기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대륙이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전국 중엽의 제나라 위왕(魏王, BC356~BC319) 시기에 대륙의 동쪽 발해 바다 깊숙이 신선들이 사는 삼신산이 있다는 소문이 일어났다. 소문은 주로 발해에 접한 제나라와 연나라에서 유행했고, 두 나라의 여러 왕들이 발해에 탐사대를 파견해 삼신산 찾기에 나선다.
그리하여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 한무제 시기에 이르기까지, 장장 3백 년 동안 삼신산을 찾는 탐사대가 계속 동방으로 떠난다. 이 탐사에서 제일 유명한 군주가 진시황이다. 진시황은 여러 방사들을 발해로 파견했는데, 그 가운데 한종이라는 인물이 있다. 한종은 많은 동남동녀를 이끌고 발해로 나와 끝내 귀환하지 않았는데, 그가 마한에 정착했다는 설이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다. 한 예로, 조선 후기의 학자 이익과 그의 제자 안정복이 마한을 한종의 후예로 추정하기도 했다. 여러 정황상 한종이 마한을 열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한종이 마한에 이르렀을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그가 선단을 이끌고 마한지역에 들어왔다면 당연히 금강 수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한편 중국 사서에는 진나라의 노역을 피해 마한으로 망명했다가 마한 왕이 동쪽 땅을 내줘 진한(辰韓)에 정착한 주민의 이야기가 보인다.『삼국사기』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이것은 진시황 시기에 적잖은 망명객과 난민들이 중국 동부 해안에서 출발해 금강을 통해 마한으로 이주했음을 증명한다. 또한 기원전 2세기에는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에게 밀려 무리를 이끌고 마한으로 건너와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금마(金馬) 마한'이라고도 하는데, 익산시 금마면 미륵산에 준왕이 쌓았다는 성이 지금도 '기준성'으로 불린다. 준왕은 해로를 통해 남하했으므로, 그 역시 금강하구를 거쳐 마한 땅으로 들어왔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금강은 이미 2천여 년 전부터 동아시아 교류의 주요 통로였다. 한사군 시기에는 낙랑과 대방의 교역로였고, 백제의 문물이 흐르던 주된 수로이기도 했다. 백제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의자왕이 당나라로 압송되면서 배에 올랐던 한 많은 물길도 금강이고, 663년에 백제부흥군과 왜군 그리고 신라와 당나라가 격돌한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해전인 백강전투의 현장도 금강하구이다. 금강하구는 또한 고려 말 최무선이 세계 최초의 함포대전인 진포대첩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까지도 금강은 수많은 조운선과 상선이 드나들던 내륙수로로, 한반도 중서부의 문화와 물류가 흐르던 대동맥이었다. 하지만 근대 이후 내륙육로 중심의 교통망 발전과 하구의 댐건설 등으로 번성했던 금강의 포구들이 지금은 이름만 남아있다.
이런 금강은 한강·낙동강·영상강과 함께 대한민국의 큰 물줄기를 이루니, 요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4대강 정비 사업'의 현장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전라북도는 금강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무심하다. 다른 지역이 온통 '강'을 화두로 벌집마냥 웅성거리는데 말이다. 금강 정비 사업에 찬성하던 반대하던, 이제는 금강에 시선을 돌리고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할 때라고 생각한다.
/김성환(군산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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