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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재발견 현장답사] ⑥남고산성에 어린 역사와 문화

창암 이삼만 선생이 글씨 쓴 남고진사적비…역사의 향기 그윽

남고산성 서문지(왼쪽)와 남고진사적비. ([email protected])

13일에 진행되는 전주재발견 현장답사 주제는 '남고산성에 어린 역사와 문화'이다. 사적 제294호인 남고산성은 남고산 계곡을 둘러싼 조선시대 석성이다. 남고산성에는 성곽 자체뿐만 아니라, 우리 전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유적이 다수 존재하고 있다.

 

전주 부성의 남쪽에 위치한 남고산은 그 자체의 지형이 천험의 요새지일 뿐만 아니라, 동쪽의 중바위와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좁은목을 이루는 요충지 해당한다. 따라서 전주성의 남쪽을 방어하고,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해 이곳에 산성이 수축되었다.

 

남고산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에 대하여는 역사기록이 확실하지 않다. 조선 후기의 자료인 「완산지」에 의하면 후백제의 견훤이 처음 쌓았다고 전해오지만, 그 이전부터 산성이 존재했을 가능도 없지 않다.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조선 전기의 사서에는 '고덕산 석성' 또는 '고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증보문헌비고」 등 조선 후기 사서에는 폐지되어 없어져 버린 것으로 나타난다.

 

그 뒤, 순조 11년(1811)에 전라감사 이상황이 조정의 허락을 받아 성을 다시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순조 13년(1813)에 완성하고, 이곳에 남고진을 설치하고 남고산성이라 이름하였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남고산성의 성곽은 바로 이때 수축된 것이다.

 

당시 성곽의 규모는 둘레가 2693보, 여장이 1946타였으며 동문, 서문, 서암문 등의 성문이 있었고, 그 위에 문루가 세워졌다. 성내에는 남장대와 북장대를 위시해서 진장아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며, 제언이 4개, 우물이 25곳, 민가 113호가 있었다.

 

지금은 성내에 있던 각종 시설들은 없어지고, 성곽 또한 상당 부분이 무너져 버렸지만, 북서쪽의 성곽은 아직도 상당히 양호하게 남아 있다. 산성 내에는 관찰사, 산성별장 등의 공덕비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최근 몇 년에 걸쳐서 북쪽과 동쪽의 성곽이 복원되었다. 그러나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이끼가 낀 성돌을 없애고, 새로 채석한 튼튼한 돌로 굳게 쌓은 성벽, 그리고 이상하게 처리한 여장 부분을 보면 어쩐지 어색한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남고산성의 서문지 옆에는 순조 때 남고산성을 수축하고 남고진을 설치했던 경위를 기록한 남고진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최영일이 짓고, 창암 이삼만이 글씨를 쓴 것으로 헌종 12년(1846)에 세워진 것이다. 남고진사적비를 쓴 이삼만은 전주 출신으로 원교 이광사, 추사 김정희와 함께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알려진 인물이다. 남고진사적비는 남고산성을 수축하고 남고진을 설치한 역사적 내력을 전해주는 사료일 뿐만 아니라, 창암의 서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남고산성 내에는 신라 문무왕 8년(668) 열반종조 보덕화상의 수제자인 명덕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하는 남고사가 자리하고 있다. 보덕은 고구려로부터 고덕산 남쪽에 내려와 경복사를 창건하고 신라 열반종을 성립시킨 인물이다. 남고사는 고덕산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신라 열반종을 이해할 수 있는 불교사에서 의미가 있는 사찰이다. 조선 후기 남고사에서 전주 부중으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는 전주의 전원적 풍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라 하여 '남고모종'이라는 전주 팔경의 하나로 꼽혔다.

 

남고산성의 만경대의 남쪽 바위에는 고려말의 충절로 알려진 정몽주가 지었다고 하는 시가 새겨져 있다. 만경대는 기암괴석과 수목이 어우져 경치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전주 부성을 내려다 보면 한 폭의 그림으로 보이는 곳이다. 따라서 많은 시인 묵객들이 만경대에 올라서 경치를 감상하면서 시를 짓곤 하였다. 고려 말 정몽주가 이성계와 함께 운봉에서 황산대첩을 거두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 올라와 전주를 내려다 보면서 고려왕조를 걱정하는 우국의 시를 읊었다고 한다.

 

남고산성 안에는 관우를 무신으로 받들어 제사 지내는 사당인 관성묘가 위치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초부터 관왕묘를 건립하고 관우을 숭배하는 관성신앙이 일반 서민에게까지도 널리 유포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정유재란 때 명의 장수의 요구로 처음 세워지게 되었다. 전주의 관성묘는 고종 10년(1884)에 남고산성 별장 이신문과 전라관찰사 김성근의 발기로 세워졌다. 관성묘에는 조선 말기의 화가인 채용신이 그린 '삼국연의도' 10폭이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버리고 말았다. 채용신은 서울 출신으로 20세 때 고종의 영정을 그리는 등 초상화를 잘 그렸던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채정산이라 자칭하며 익산 금마, 정읍 신태인으로 옮겨 살다가, 1941년에 7월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남고산성으로 들어가다 보면 충경공 이정란을 모신 사당인 충경사가 위치하고 있다. 이정란은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로 침공하던 왜군이 웅치를 넘어 안덕원까지 쳐들어왔을 때, 전주성을 지키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전주부윤 겸 삼도소모사가 되었던 인물로 순조 때 충경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충경사는 1981년 남고산 기슭에 세워졌다.

 

이번 답사는 충경사에서 시작하여 서암문지, 만경대의 정몽주시, 서문지와 남고진사적비, 남고사, 억경대, 관성묘 순으로 이어진다. 남고산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한 나절의 여유를 즐기고, 남고산성에 어려있는 전주의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하태규 교수(전북대 사학과)

 

 

* 이번 답사는 '남고산성에 어린 역사와 문화'(안내 하태규 전북대 교수) 13일 오후 2시 충경사 출발

 

충경사 → 남고산성 서암문 → 만경대(정몽주시) → 남고사 → 남고진비 → 역경대 → 관성묘

 

* 다음 답사는 6월 27일 '호남 선비 문화의 역사'(안내 유종국 전북과학대학 교수)

 

* 답사신청은 전주문화사랑회(www.okjeonj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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