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시인)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이 되면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있다. 바로 '명절증후군'이다. 실제 이런 용어는 없지만 명절 전후에 나타나는 신체적·정신적 증상들을 통칭해서 흔히 명절증후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올해에도 어김없이 명절은 찾아왔다. 많은 웹사이트에는 명절증후군을 극복하는 방법들이 소개되었다. 유용하게 쓰일 것 같진 않지만, 명절만 되면 부엌데기 신세로 전락해야 하는 여성의 처지나 명절문화에 대한 진지한 고찰의 서두로는 썩 괜찮은 듯 싶다.
일 년에 몇 차례 지나지 않는 명절이지만 핵가족화 된 생활에 익숙한 주부들이 일시적으로 가부장적인 대가족 제도로 합쳐짐으로써 발생하는 육체적·심리적 변화, 그에 따른 부적응이 원인이 되어 나타나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전통적인 관습과 현대적인 생활 사이에 발생하는 일종의 문화적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굳이 정의하자면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에서 발생하는 '문화증후군'정도일 것 같다.
여기에 증상을 더욱 악화시키는 원인으로 귀향 과정의 장기이동과 생활리듬의 변화라는 기본적인 스트레스 외에 명절을 준비하고 치르는 과정에서 강도 높은 가사노동과 휴식 부족으로 인한 육체적인 부담. 이러한 과정에서 느끼는 성차별과 시댁과의 갈등, 친정 방문의 상대적 소홀, 동서간의 경쟁의식, 생활경제 수준의 차이에 따른 경제적 부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또한 가족이나 친척과의 오랜 갈등이 다시 수면위로 드러나는 계기가 되니 이만하면 더 없이 훌륭하다 하겠다.
그러나 명절증후군은 비단 며느리나 주부만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발언권이 없고 위축된 가장이자 남편도 그럴 수 있으며, 평생 자식만 바라보고 살았지만 정작 권위마저 상실한 늙은 부모도 명절증후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결혼이 늦어지거나 취직이 힘든 아들, 딸들에게도 명절은 '공포'다. 어른들의 덕담이 이들을 공포의 문으로 친절히 안내하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명절을 기피하고 싶은 사람들의 이런 공포는 실제 우울증이나 자살충동 등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친족, 가족들간의 갈등과 스트레스는 명절의 의미와 기능이 이 시대에 맞지 않게 되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고향과 조상의 의미를 생각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가기에 그동안 우리 사회는 너무 멀리 왔다.
평상시에 잊고 살았던 어쩌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와 연관된 주제를 일깨워 주는 것이 그나마 명절이다. 명절이 되면 엄청난 인원이 고향으로 대이동을 하는 현상은 삶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거나, 흩어진 가족을 한번쯤 되돌아보는 의례라고 할 수 있다. 즉 과거의 명절이 화려한 축제의 마당이었다면 현대의 명절은 내가 존재하는 근거나 뿌리가 정말 제대로 잘 있는가 하는 안녕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그 의미가 크다. 결국 제사나 명절 같은 의례만을 공유하는 것이 지금의 실상인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농촌 문화의 유물로서 가치를 가졌던 명절은 이제 시대에 맞게 새로운 의미로 탈바꿈해야 한다. 일상생활에 묻혀 잊고 지냈던 친족들과의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등 새롭게 명절의 의미를 살려갈 부분도 분명히 있다. 다만 '명절증후군'도 이 시대의 병이라면 참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부끄러워 할 줄 알며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치유해 나가야 할 것 같다.
/이현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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