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이후 성장 가도 고속으로 달려…93년 고속버스 면허받아 다른 회사 경영권 인수도
1945년 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일본 자본은 철수했다. 꿈에도 그리던 광복의 감격으로 사회 전체가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전북여객자동차주식회사는 최승렬 사장과 종업원 대표 결합 체제 하에서 차질없이 운행을 계속했다.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주식 1만9081주는 광복 1개월 후인 9월19일 공포된 관재령 제10호에 따라 미군정 관리에 들어갔다.
당시 전북여객은 1944년 일제가 자동차운송사업 통제를 위해 내놓은'조선자동차사업령'을 계기로 15개 군소 운송회사를 통합한 전북지역 유일의 운송기업이었다. 광복과 함께 전북여객에 투자한 일본 자본이 철수하면서 최승렬 사장 체제의 전북여객은 점차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전북여객의 운명은, 조국의 운명처럼 그리 녹록하게 풀리지 않았다. 1950년 6월25일 6.25전쟁이 터지면서 전북여객 보유 98대의 버스 중 39대와 택시 20대가 인민군 등에 의해 약탈·파괴·방화됐다.
황의종 사장은 "그 와중에서 버스를 지키고자 노력했던 회사 임직원들이 큰 고초를 당했습니다. 당시 최한규 사장이 사망했고, 일부 간부사원들은 북으로 끌려가거나 행방불명되는 등 인명 피해가 컸습니다. 정상적인 버스 운행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죠"라고 전했다.
하지만 얼마 후 9.28 수복과 함께 전북여객도 정상 운행에 나서 전쟁 속에서 묶인 도민들의 발이 됐다.
전쟁 중에 임직원들이 버스 운행 정상화를 위해 팔을 걷어붙였고, 파괴되지 않은 버스 59대로 회사를 재건했다. 정부에 귀속됐던 일본인 주식 1만9081주를 불하받았고, 전북대학교 후원회 재단 1만3081주와 전북향교재단 6000주도 불하받음으로써 자본금 200만환에 총주식 4만주 규모였다.
▲지입제에서 직영체제까지
전쟁이 끝나고, 사람과 물자 운송량이 많아지면서 운송업은 성장 일로에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우리나라 자동차운송업계의 경영방식은 일본에서 2차대전 패전후 성행했던 지입제였다. 지입제는 차주가 자동차운송사업면허를 갖고 있는 회사에서 운송업을 영위하며 이익을 얻는 대가로 일정액의 수수료를 지불하는 형식이다. 이 때문에 재정력이 부족해 운송사업을 할 수 없는 사업자들도 차주들이 넣은 지입차량 몇대를 갖고 사업을 벌였다. 음성적인 지입차량이 많아졌고, 기업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이같은 사정은 전북여객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정부가 1957년 5월8일 자동차운송사업면허의 제한방침을 공고(5·8조치)하고, 자동차운송사업면허를 사실상 동결했다. 하지만 자동차운송사업면허를 동결한 정부가 한쪽에서는 계속 자동차 면허를 내주는 바람에 음성적 지입제가 만연되는 등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이는 사업자와 차주 모두의 이익 때문이었다.
사업자는 잠시 명의만 빌려주고 짭짤한 지입 수수료를 챙졌고, 지입차주도 수입이 좋았다. 시발차(최무성이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은 지프의 엔진, 변속기, 차축을 이용, 드럼통을 펴서 만든 지프형 승용차. 첫 국산차) 1대를 8만환에 구입해 15개월 운행, 차값의 9배 수입을 올렸다. 15개월 후 중고차로 내놓아도 35만환을 받았으니 부자들이 지입차에 눈독을 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정부는 1960년 5월27일 5.27고시를 통해 차주신고제를 도입했지만 업계 반발에 부딪쳐 실패했다. 하지만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반전돼 정부의 운송사업 기업화 정책은 속도를 냈다. 그렇지만 지입제가 영세 사업주와 차주들에게 주는 이익이 워낙 커 대부분 버스운송사업체의 직영 경영체제는 거의 형식에 불과했다.
▲창업 이래 최대 전성기 누려
지입제를 둘러싼 시비에도 불구, 1960년 이후 전북여객은 창업이래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자본금을 증액하고, 차량을 증차 또는 인수하는 등 사세를 크게 확장해 나아갔다.
1962년 8월7일 운송사업경영면허 갱신시 총 노선수가 134개에 달했고 1일 운행횟수 219회, 1일 총운행거리 1만9782㎞였다. 회사는 성장을 거듭, 1986년 차량 보유대수 548대, 종업원수 1500명, 연간 수송인원 9800만명에 달했다. 이는 전국 여객회사 중 제일 많은 차량과 수송인원으로 기록됐다.
1968년 12월19일 1급자동차정비공장 인가를 받아 차량 정비업에 진출했고, 1971년 10월7일 진안 공용정류장, 1974년 4월15일 전주시외버스공용정류장을 인수하여 정류장 사업도 겸하게 됐다. 사업 다각화 차원에서 1983년에는 주택건설사업 면허를 획득, 아파트 건설을 하기도 했지만 실적 저조 등 문제점이 발생해 면허를 반납했다.
벽지 오지주민 교통 편익을 위해 무진장, 임실, 순창 등 산간부의 20호 정도되는 마을까지 버스를 운행하면서 도민의 사랑을 받았다.
전북일보 창간과 전북은행 창립 시에 자본을 투자하며 협력했고, 씨름선수단 육성, 불우이웃 돕기 등 각종 지역사회와 경제에 큰 도움을 주었다.
벽지노선 운행과 관련해 대통령표창, 장관표창을 다수 수상하고, 지역사회 경제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돼 은탑산업훈장(1회), 석탑산업훈장(2회), 대통령상(3회), 장관상(10회) 등을 수상했다.
또 정부인가를 받아 평화여객(현 안전여객), 제일여객, 군산여객, 우성여객을 설립케 했고 금일여객, 남원여객, 무진장여객, 임순여객, 풍남여객을 설립하는 등 전라북도 대중교통 발전을 선도해 왔다.
전북여객은 1993년 12월 고속버스사업 면허를 받으면서 상호를 전북고속으로 변경했다. 이어 1996년 전주고속을 인수하고, 1997년에는 풍남여객 경영권까지 인수해 계열사로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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