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4-12-04 08:40 (수)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경제 chevron_right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일반기사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16)쌍방울 ①태동기

속옷·야구·리조트 등 도민 가슴속 깊이 남아…함경도 간 소년 이봉녕…탄광 일 하며 장사 시작

형제사회는 형제가 함께하는 상회라는 뜻을 담고 있다. 형제상회는 노점상 시절에 취급하던 양말 외에 메리야쓰와 잡화도 취급했다. 사진은 형제 상회를 기념하기 위해 훗날 그린 그림. ([email protected])

전북 대표 향토기업 쌍방울은 내의와 무주리조트 개발 등을 통해 지역사회에 일자리와 희망을 안겨주었다. 창업주 이봉녕 회장의 인생 역정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었고, 프로야구단 쌍방울레이더스는 도민들에게 애향심은 물론 인생의 재미도 주었다.

이봉녕 회장 일가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지난 10여년동안 외지 자본이 쌍방울을 경영하고 있는 동안에도 쌍방울은 도민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 속옷 기업 쌍방울, 방적회사 쌍방울은 도민이 어려울 때나 기쁠 때나 항상 도민과 함께하며 어려웠던 개발시대를 극복해 왔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 이봉녕

쌍방울의 역사는 창업주 이봉녕 회장의 인생 역정과 궤를 같이한다.

연안(延安) 이씨인 이봉녕 회장은 1924년 2월 5일(음력) 완주군 초포면 송전리에서 아버지 이영옥과 어머니 최병옥의 5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 회장의 선대는 완주군 구이면 일대에 일가를 이루고 살았으나, 증조때부터 초포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업을 유지했다.

 

 

 

1970년대 이리 공단 쌍방울 공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이 재단·봉제 작업을 하고 있다. ([email protected])

 

초포는 전주에서는 불과 20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1975년 전주시에 편입된 곳. 그러나 당시의 초포는 시골 오지였고, 소위 일본식 신식학교도 없었다. 이 때문에 이봉녕은 서당에도 못가고 어깨 너머로 천자문을 익히는 정도의 교육을 받았다. 이봉녕이 10살 되던 1934년 초포에 소학교(초등학교)가 설립됐지만, 생활이 너무 어려워 그 마저도 갈 수 없었다. 이봉녕 부친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학교인데다, 살림도 어렵다는 이유로 이봉녕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봉녕은 친구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이 너무 부러웠고, 아버지 몰래 학교에 가 첫 입학생 33명에 끼어 교육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학교에서 나눠준 교과서와 공책 몇권을 무명베 보자기에 휘감아 허리에 매고 5리길을 오갔지만, 어린 이봉녕은 학교 생활이 너무 즐거웠다.

1939년 3월 초포 소학교를 졸업한 이봉녕은 현 초포초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궁핍한 시절이었다. 16세가 되던 1936년 이봉녕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외숙이 살고 있는 함경북도 성진으로 갔다.

16세 소년이 감당하기 힘든 혹독함이 예상되는 행로였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을 배우고 현실을 이겨내기 위한 홀로서기의 첫 걸음이었다.

▲두만강에서 장사에 눈을 뜨다

 

 

 

장년 시절 이봉녕 회장. ([email protected])

난생처음 고향을 등지고 성진에 자리잡은 이봉녕은 처음 1년은 둘째 외숙을 따라다니며 페인트 칠 일을 했다. 이후 책방을 하는 막내외숙의 집으로 옮겨 살면서 서점 점원 생활을 했다. 이때는 이봉녕이 책을 가까이 하며 견문을 넓힐 수 있는 소중한 기간이었다. 2년여간의 서점 점원 생활을 마치고, 이봉녕은 함경도 아오지 탄광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석탄으로 휘발유를 만드는 조선석탄공업주식회사에 취직, 급사(심부름 하는 일)로 일했다. 그러나 급사는 월급이 적었다. 이에 이봉녕은 석탄가루가 날리는 현장노동일을 자청했고, 야간근무도 마다하지 않는 생활력을 발휘했다.

아오지 생활에 정착한 이봉녕은 고향에 있던 동생 창녕을 불러왔다. 두 사람은 돈을 벌수 있는 궁리를 한 끝에 두만강 건너 만주에서 옷 장사를 하기로 하고 실행에 옮겼다.

이봉녕 형제가 생각한 방법은 토요일과 일요일을 이용하여 여러 켤레의 양말과 옷가지를 두툼하게 껴입은 채 두만강을 건너가 그곳 사람들에 벗어 파는 것이었다. 매달 월급의 일부를 떼내어 양말 등을 구입한 뒤 한 달에 3회 정도 두만강을 건넜고, 수입도 짭짤했다.

이 때 이봉녕에게 징병통지가 날아들었다. 1924년생인 이봉녕은 1945년 3월에 징병 1기로 끌려갔다. 하지만 이봉녕은 사지에서 살아남았고, 징집 5개월만에 조국이 해방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방 후, 이봉녕은 23세 때 김복래 여사와 결혼하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가난했던 이봉녕은 1949년 농촌생활을 포기하고 전주를 거쳐 처남이 사는 이리(익산)로 이사했다.

처남은 무명베 장사였다. 이봉녕은 처남을 따라 다니며 장삿일을 배울 수 있었는데, 장날에 맞추어 팔 물건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무명베를 적정한 가격에 구입해 놓아야 많은 이문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점상에서 형제상회까지

그러나 무명베 장사도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살길은 있었다. 장사에 관심이 많아졌던 이봉녕은 전쟁 중에 양말장사를 시작, 장래 성공의 기틀을 다져간다.

이봉녕은 시골 아낙네들이 장날에 가져오는 양말을 사서 시장 한켠에서 노점을 벌였다. 생산자들이 장날에 팔아달라고 맡기면, 이 물건들을 판매해 이익을 남겼다.

이 과정에서 이봉녕의 신용도가 높아졌고, 소문이 나면서 이봉녕의 노점은 크게 발전했다. 밀려오는 많은 물량을 노점에서 소화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이봉녕은 시장 인근에 방을 하나 얻어 물건을 보관해야 했고, 양말장사는 계속 번창해 나갔다.

노점상이 나날이 발전, 어느날 양말 도매상으로 커졌다. 인근 지역에서 생산된 양말들이 이곳에 집중되면서 양말 유통본부 수준에 이르렀다. 나중에는 동생 창녕도 가세했다.

이봉녕은 노점에서 양말을 팔기 시작한지 3년만인 1954년 3월 이리 파출소 앞에 10여평의 점포를 얻어 형제상회를 개업했다. 형제상회는 이봉녕과 이창녕 형제의 각별한 우애가 담겨져 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경제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