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평양에 첫 생산공장 가동 57년 관련업체 전국 1107개까지
우리나라에 메리야스 제품인 양말류가 전래된 것은 1780년대 쯤으로 추정된다. 천주교 선교사들이 들여온 것으로 보이는 양말류는 버선에 비해 편리하고 실용적이어서 관심을 끌었다. 개화기 무렵, 고무신과 양복, 양말류는 대중화 단계에 들어갔다. 면화 재배가 성행하고, 면포도 생산됐다. 그러나 개화기 이후 조선은 일본 방적산업의 원료 공급지에 불과했다. 일제에 눌려 조선 자본이 성장할 틈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서울과 평양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직포공장, 메리야스공장, 고무신공장 등이 성장하고 있었다. 1900년 서울 종로에 종로직조사가 설립됐고, 1919년 설립된 경성방직은 순수 민족자본에 의한 면방직산업의 맥을 이어갔다.
1920년대 들어 평양을 중심으로 양말공장이 대거 들어섰다. 당시 평양에서 생산된 양말은 전국 생산량의 60% 정도를 차지했다.
1933년 평양에 설립된 조선메리야스합명회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메리야스 내의류 생산업체였다. 조기, 횡기, 태환기 등 일본에서 들여온 설비를 갖춘 조선메리야스는 전량 주문생산 방식으로 제품을 생산했다. 이처럼 메리야스공업이 활기를 띠면서 평양 중심의 메리야스공업은 서울과 부산, 대구 등 각지로 확산됐고, 20여개 업체는 중국으로 설비를 옮겨 생산하기도 했다.
1941년 기준 국내 메리야스업체는 482개였는데, 평남 163개 서울·경기 103개, 전북 5개 등의 분포를 보였다.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구와 부산, 경남북지역의 메리야스 공업이 발달했다. 평양의 조선메리야스합명회사 박형준 사장과 삼공양말의 손창윤 사장 등이 설비를 남한으로 옮겼고, 영남지방은 6.25 전화 속에서 인민군의 포화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활필수품인 메리야스류의 공급이 부족하자 정부가 전후복구사업 측면에서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UN의 구호 면사 방출, 시설 확충을 위한 산업기계자금 지원 등에 힘입어 메리야스산업은 시설 확장 및 현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 당시 원조물자는 제분·제당·면방산업 등 이른바 삼백(三白)산업 형성의 토대였다.
그러나 전후 의류 절대부족 상황을 벗어나고, 미국 원조도 끊긴 1957년 이후 메리야스업계도 대대적인 재편의 회오리에 휩싸였다. 1957년 내의류와 양말·장갑 생산업체는 무려 1107여개에 달했지만 이후 영세·부실업체들이 대거 퇴출되고, 새로운 기업이 탄생했다.
1954년 형제상회를 설립, 자본을 축적하던 이봉녕에게는 다시없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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