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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18)쌍방울 ③성장기

꾸준한 기술개발·품질향상 노력…창사 10여년만에 전국기업 우뚝

1973년 3월부터 가동인 이리공업단지 공장은 최신 대규모 설비를 갖춰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이리공단에 건설한 쌍녕섬유 공장 전경. ([email protected])

전국적으로 판매량이 급증하자 쌍녕섬유는 1968년들어 종전 판매과를 판매부로 승격시키고, 인력도 30여명으로 대폭 증원해 전국 판매망을 포괄했다.

당시 섬유의 주원료인 면사의 국내 공급물양이 수요에 크게 미치지 못해 섬유업계가 원료확보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1970년대 초반에는 면사(綿絲)파동이 일 정도였다. 하지만 쌍녕섬유는 이봉녕 사장이 전국 방적공장을 찾아다니며 원사확보에 주력했고, 제품 판매 호조가 이어지면서 회사는 급신장했다.

1968년에는 우리나라 섬유업계 최초로 품질관리 시스템을 도입하고, 품질관리부를 운영했다. 염색기술자를 스카웃해 염색기술을 보강하는 한편 신제품 개발에도 주력했다.

제품도 다양화해 1966년 '파이렌'이라는 신사용 내의, 1967년 '뉴티'라는 티셔츠를 개발해 소비자들의 호평을 받는 등 외의류 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준비도 했다.

△ 해외시장에 눈을 돌리다

1963년 출범한 쌍녕섬유는 불과 4∼5년 후 전국 섬유 시장을 뒤흔들었고, 이봉녕 사장은 해외 시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0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관람한 이봉녕 사장은 참담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일본의 기술은 크게 앞서 있었고, 내의류 품질은 물론 종류도 다양했다. 시설과 기계가 고도화돼 있었고, 경영자나 종업원 모두 품질개선을 위해 연구개발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큰 충격이었다. 결국 이 사장은 견본용으로 가져간 쌍방울 메리야스는 내놓지도 못한 채 신형 편직기만 사들고 귀국했다.

그러나 일본 방문에서 이 사장이 받은 충격은 보약이 됐다. 포기할 수 없었다. 품질 향상을 위해 자신은 물론 종사자들 모두를 향해 채찍질했고, 2년 후인 1972년 다시 견본품을 들고 일본을 찾았다. 그리고 일본 시장에서 품질을 인정받은 쌍녕섬유는 수출 교두보를 확보, 상반기부터 수출에 들어갔다. 품질에 까다로운 일본 진출 그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었다.

△ 새로운 출발

쌍녕섬유는 1971년 당시 620개에 달하는 국내 메리야스 관련업 중에서 내수기반을 확고히 한 몇 개의 업체에 속했다. 국내의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에 힘입어 낮은 가격의 제품으로 수출하는 기업이 많았지만, 쌍녕섬유는 꾸준히 자본과 기술을 축적하고 품질을 향상시키며 국내 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지는데 주력했다. 그 결과 1970년대 중반 이후 쌍녕섬유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메리야스업체로 부각됐다. 당시에도 메리야스업계는 여전히 지역 대표업체들이 시장을 분할하고 있었지만, 쌍녕은 창사 10여년만에 전국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쌍녕섬유가 공장 설비의 대규모 확장을 계획한 것은 제품 판매량에서 선발업체들을 제치고 앞서나가기 시작한 1970년부터였다.

전주공업단지는 1967년 조성돼 입주가 시작됐지만, 이리공업단지는 1969년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봉녕 회장은 전주와 이리공단 입주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문제는 염색 공정에 중요한 수량과 수질이었다. 수차례의 수질 검사 결과, 이리지역의 수질이 낫다고 판단이 나왔다.

이리공단에 1차로 1만 평을 매입하면서도 원수를 충분히 끌어들일 수 있도록 공단 내에서도 가장 낮은 지역을 택했다. 마침내 1972년부터 공장부지 조성 및 공장 건설에 들어갔고, 1973년 3월에 새로운 설비를 갖춘 공장이 가동에 들어갔다. 기존 동이리공장에는 100여명이 잔류해 생산을 계속하고, 이리공단 공장에는 300여명의 인력이 가동됐다. 새 공장은 최신 대규모 설비를 갖춰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이제 쌍녕섬유는 이봉녕 개인 기업을 넘어서고 있었고, 새로운 출발이 필요했다.

쌍녕섬유공업사는 1972년 6월7일 상호를 쌍녕섬유공업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자본금을 3200만원으로 총3만2000주의 주식을 발행했다. 대표이사는 이봉녕이었다.

△ 업계 선두에 이르기 까지

쌍녕섬유는 1973년 8월23일 편면 남 티셔츠 등 7개 품목에 대해 코튼마크 승인을 얻는다. 이는 당시 메리야스 내의류 생산업체 중 무궁화상사에 이어 두 번째에 해당한다. 코튼마크는 대한방직협회가 미국국제면화협회의 협조하에 1971년부터 시행한 것으로 면 제품의 우수성을 보증했다.

공장 규모가 커지자 1973년 8월부터는 매월 50∼60명의 종업원을 공개 채용하기 시작했는데 몇개월 후 쌍녕의 종업원은 거의 두 배 규모로 늘어났다. 회사는 항상 활력이 넘쳤다. 동이리공장은 쌍녕에서 분리 독립, 서안섬유주식회사가 됐다.

이 무렵 쌍녕은 성장일로였지만, 국내 경제와 섬유업계는 1973년 10월 중동전 발발과 함께 터진 석유파동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내수성장과 함께 수출까지 활기를 띠면서 국내 섬유업계는 1967년 20.7% 성장, 1973년 23.4% 성장 등 매년 20% 이상의 성장세를 달려왔지만, 석유파동 후인 1974년에는 불과 1.3% 성장에 그친 것. 석유파동과 선진국의 소비 둔화, 수입억제정책 등으로 인해 1975년에도 어려움이 계속됐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쌍녕이 약진을 계속해 1975년부터는 국내 최고 메리야스업체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던 것은 몇가지 이유가 있다. 석유파동 이전에 이리공단 이전을 마쳤고, 수출에 주력하지 않고 내수시장을 적극 공략해 경쟁력 우위를 점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자기혁신으로 경영을 쇄신한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974년 쌍녕의 내수부문 매출액은 5억 2000만원에 불과했지만, 1975년에는 29억 8900만원으로 무려 6배가 신장했다. 이어 1976년에는 전년대비 100% 성장한 56억 1200만원에 달했고, 1977년에는 112억300만원으로 처음 내수부문 매출 100억원을 돌파했다.

물론 쌍녕의 약진은 꾸준한 기술개발과 품질향상 노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1973년부터 일본의 가다쿠라공업주식회사와 기술교류를 시작했고, 1976년부터는 기존 제품과는 달리 직조방법과 소재를 다양화한 제품을 본격적으로 개발해 선보였다. 추동절 내의시장을 겨냥한 순모 내의, 앙고라, 리플, 론샤니 등이 그것이다.

1976년 말에는 증설과 보수작업을 마무리하고, 이 과정에서 신형 기계를 도입했다. 1977년에 설치한 자동선염기와 신형 표백기 설치로 염공시설의 자동화를 이뤘다.

또 1977년에는 1일 2500톤의 폐수를 처리할 수 있는 현대식 폐수처리 시설을 준공, 생활환경 개선과 수질오염 방지에 획기적 전환점을 이루었다.

1977년 들어 그동안 부진하던 수출도 호조세를 보였다. 일본 최고 품질을 인정받고 있는 가다쿠라 등 4개 업체와 수출계약을 하고, 새로 개발된 리플 내의류는 중동시장에서 호평을 받았다. 미국 앤더슨사오하 스포츠 티셔츠 수출 등 일본과 중동, 미국, 유럽 시장으로 수출이 크게 늘어났다.

이처럼 경영이 안정 궤도에 오르면서 쌍녕섬유는 방적업에 진출한다.

이봉녕 사장은 1977년 3월4일 자본금 10억원으로 쌍녕방적주식회사(대표이사 이봉녕)을 출범시키고, 그해 3월25일에는 쌍녕섬유주식회사 상호를 '주식회사 쌍방울'로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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