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옥구 출신 문병량 씨 1963년 익산서 남선양조장 설립…70년대 1도1사때 전북대표 소주 우뚝
사람사는 세상에서 술은 '약방의 감초'격이다. 희로애락의 순간마다 술은 흥겨움을 더해주고, 울적한 기분을 달래주고, 사기를 북돋워준다.
이같은 술 문화는 발효와 누룩이 발명된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과 함께 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한시대 조상들은 한 해의 풍년농사를 위해 맑은 곡주를 빚어 조상께 먼저 바치고, 춤과 노래와 술을 즐겼다. 삼국시대의 술은 주국(酒麴)과 맥아(麥芽)로 빚어지는 주(酒)와 맥아로만 빚어지는 례(醴, 감주) 등 두가지였다. 이들 중 고려주와 신라주는 그 우수한 품질이 중국 송나라에까지 알려져 송나라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황금주(黃金酒), 백자주(栢子酒), 송주(松酒) 등 술의 재료와 특성을 담고 있는 술이 등장했다. 또 고려시대에는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증류주가 제조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만들어진 술 제조법, 유명 술은 대체적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 술은 고급화 추세를 보였는데, 제조 원료가 멥쌀에서 찹쌀까지 확대됐고 발효기술도 단(單)담금법에서 중양법(重釀法)으로 바뀌었다. 이 시대 유명주는 삼해주(三亥酒), 이화주(梨花酒), 국화주 등이다.
조선 후기에는 지방에서 빚어지는 명주들이 전성기를 이뤘다. 익산 여산의 호산춘(壺山春)을 비롯해 충청의 노산춘(魯山春), 김천의 청명주(淸明酒) 등이 명주로 꼽혔다.
◆ 한국의 전통술
우리나라의 전통술은 막걸리인 탁주, 그리고 약주, 청주, 소주다.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 탁주는 민족의 토속주로서 예로부터 각 가정마다 독특한 제조 방법으로 만들어 마셨다. 탁주와 약주는 큰 구별이 없다. 같은 원료를 사용해서 탁하게 빚으면 탁주, 맑게 빚으면 약주가 되기 때문이다. 탁주와 약주는 곡류와 기타 전분이 함유된 물료나 전분당, 국 및 물을 원료로 사용하는데, 발효시킨 술덧을 여과 제성했는가 여부에 따라 탁주와 약주가 구분된다. 약주는 탁주의 숙성이 끝날 때 쯤 술독 위에 맑게 뜨는 액체 속에 싸리나 대오리로 둥글고 깊게 통같이 만든 '용수'를 박아 맑은 액체만을 떠낸 것이다. 익산 호산춘과 같은 약주는 좀더 섬세한 과정을 거친 것이다.
약주는 우리나라에서 '약으로 쓰이는 술'이라는 뜻의 약용주가 아니다. 조선시대 서유거(徐有渠)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좋은 술을 잘 빚는다는 소문이 났다. 마침 그의 호가 약봉(藥峰)이고, 그가 약현동(藥峴洞)에 살았다고 하여 '약봉이 만든 술''약현동에서 만든 술'이라는 의미에서 약주로 불리었다고 한다.
청주는 백미로 만드는 양조주이며, 탁주에 비해 맑은 술이다. 청주는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졌다. 일본 '고사기(古史記)'에 따르면 백제의 인번(仁番)이 응신천황(應神天皇, 270-312년) 때 일본에 건너가 새로운 방법으로 미주(美酒)를 빚었으며, 그를 주신(酒神)으로 모셨다. 미주는 청주의 전신으로 풀이된다.
◆ 소주의 역사
탁주나 양주는 오래 보관할 수 없는 결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소주는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다. 발효원액을 증류해 얻은 술이기 때문이다.
소주는 고려시대에 원나라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소주는 인도나 이집트 등지에서 4000년 전이나 2800년 전부터 제조됐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중국 원나라때 처음 제조됐고, 우리나라에는 징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가 일본 원정을 위해 한반도에 진출했을 때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원나라군은 개성에 본진을 두고 안동과 마산, 제주도 등에 전진기지를 두었는데, 소주는 이곳들을 중심으로 제조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까지 세력을 확장했던 원나라는 페르시아의 증류법을 우리나라에 전달한 셈이다.
전래 당시 소주는 감로(甘露), 아라키(亞刺吉)라고 불렀는데, 아라비아의 아라크(Araq)라고 했다. 아라키라는 이름은 아라비아의 아라크에서 유래한 것이다.
원나라에서 들어온 소주는 오랫동안 약용으로 사용됐고, 조선시대 들어 술로서 대중화됐다.
소주는 지역마다 명칭을 달리했는데, 개성에서는 아락주, 평북에서는 아랑주, 전라 충청 일부에서는 새주, 세주라고 했다. 진주에서는 쇠주, 하동과 목포, 서귀포 등지에서는 아랑주, 연천에서는 아래지, 순천과 해남에서는 효주라고 불리었다.
◆ 오늘의 소주
소주는 전통적으로 증류식으로 생산됐다. 우리나라는 곡류를 누룩으로 발효시킨 다음 고리를 사용하여 증류식 소주를 생산했다. 증류 장치인 고리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밑부분은 아래가 넓고 뒤가 좁다. 하지만 위의 것은 밑이 좁고 위가 넓다. 위쪽에 숨이 나오는 주둥이가 있는데, 이 곳에 주발을 대놓고 소주를 받았다. 전라도지역에서는 흙으로 만든 토고리를 많이 사용했다.
1920년대 이후 소주는 일본에서 보급된 발전된 양조기술로 생산됐다. 흑국균을 입국(粒麴)으로 배양해 쌀과 보리, 옥수수 등의 술덧을 발효시키고, 증기 취입식 단식증류기로 증류해 소주를 생산했다.
증류식 소주는 제국과 담금, 증류, 저장 등의 공정을 거쳐 제조됐는데 1960년대 초까지 생산됐다.
식량난에 시달리던 정부는 1965년 1월부터 곡류를 사용하는 증류식 소주 생산을 금지시켰고, 주정공장 업자들은 희석식 소주 생산에 나섰다.
희석식 소주는 증류한 순량의 알코올(주정)을 물로 희석한 것이다. 증류식 소주에 비해 알코올성분 외의 성분이 극히 적기 때문에 맛이 단순하다. 희석과 정제, 첨가, 제성·여과 과정을 거쳐 생산된다. 알코올 성분이 주로 25%였지만, 최근에는 20∼15%의 저도주가 상품화되고 있다.
◆ 전북의 소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전통적 농도인 전북에는 도정공장과 주정공장이 많이 발달했다. 광복 후 군산에서는 강정준 씨가 일본인의 주정공장 시설을 이어받아 백화양조를 창업, 청주와 소주를 생산했고 익산에서는 군산 옥구 출신의 문병량 씨가 양조장을 창업한 뒤 1963년 익산시 중앙동 3가에서 남선양조장을 설립, 전북의 술 보배가 그 첫 걸음을 내디뎠다.
본관이 남평(南平)으로 1933년 7월24일 옥구에서 태어난 문병량 씨는 원광대 법학과를 졸업한 인물이다. 그가 남선양조장을 세운 1963년 그의 나이가 30세였으니, 늦지 않은 나이에 사업에 뛰어든 셈이다.
1976년 이리상공회의소 회장,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1986년 보배장학문화재단 이사장 등 대외적 활동에도 열심이었던 그는 일개 양조장으로 시작한 사업을 크게 확장시켰고, 1994년 보배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1970년대 1도1사 소주 시대가 열리면서 그동안 백화소주와 출혈경쟁을 벌였던 보배소주는 지역 대표 소주로 우뚝 섰고, 도민의 사랑을 온몸에 받으면서 성장했다.
1968년 이후, 40대 이상 도민이라면 귀에 익고 정다움을 느낄 수 있는 보배소주 CM송을 기억할 것이다.
"보배로구나 보배로구나
소주는 뭐라해도 보배가 보배야
마시는 기분 취하는 기분
소주는 뭐라해도 보배가 보배야
아무리 마셔도 뒤탈없는 보배
쿨쿨쿨 쿨쿨쿨 마셔보는 보배
소주는 뭐라해도 보배가 보배야"
당시 라디오 광고방송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온 CM송'보배로구나'는 송해 씨가 정감을 다해 불렀고, 아이들도 거리를 다니면서 부르고 다닐 정도로 보배소주와 함께 인기를 모은 노랫가락이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