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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23)(주)보배-②창업기

20대 청년 문병량 군산서 양조장 인수 사업 첫 발…가난한 3대 독자 "집안 일으키자" 강한 집념

청년 문병량이 양조업에 뛰어 든 이유는 양조업은 소주 생산 등 업종전환을 통해 고부가가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mail protected])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해 출범한 익산시는 내륙이라는 입지 조건에도 불구, 산업단지가 잘 발달해 있다. 또 쌍방울과 보배, 광전자, 한국고덴시, OCI, 귀금속단지 등 굵직한 기업들이 활발한 생산활동을 벌이면서 역동적 발전을 해 나가고 있다.

일제시대 소규모 촌락에 불과했던 이리읍이 오늘날 인구 30만명이 넘는 익산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편리한 교통이다. 1907년 5월에 착공해 1908년 10월 개통된 전주∼군산간도로(노폭 7m, 길이 46.4㎞, 1975년 4차선으로 확장포장)에 이어 1915년 1월 이리역이 개통됐다. 전주 등 동부권과 당시 호남 최대 항만인 군산항을 잇는 전주∼군산간 도로에 이어 서울과 목포를 잇는 호남선 열차가 이리역을 통과하면서 사람과 물자, 자본이 이리역을 중심으로 대거 몰렸다. 그리고 이처럼 편리한 교통여건이 기업 입지로 이어졌다. 1973년 11월 호남고속도로(길이 195.16㎞)가 개통, 그야말로 교통 요충지가 된 익산은 요즘에도 여전히 기업들이 주목하는 곳 중의 하나이다.

옥구군 회현면이 고향인 보배그룹 문병량 회장이 군산에서 활동하다 이리에 둥지를 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8세때 아버지 여의고 고생

양조장에서 출발, 굴지의 주류기업으로 성장한 보배의 창업주 문병량 회장. 어려운 가정 환경을 극복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매사를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며 양조장을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문 회장은 지난 1996년 2월11일 향년 63세를 일기로 별세할 때까지 기업가로서 야망을 불태운 시대의 풍운아였다.

1933년 7월24일 옥구군 회현면에서 태어난 문병량은 8세에 부친을 여의고, 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3대 독자 외아들 문병량은 가산이 넉넉치 못한 상황에서 부친마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항상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며 성장했다. 고향 회현에서 회현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할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져 오랫동안 고생했다. 그는 군산 영명학교를 다녔지만, 거의 고학에 가깝게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성장한 문병량은 할아버지가 70대에 돌아가실 때까지 극진히 모시며 효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뼛속까지 사무치던 시절부터 조부모들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문병량의 가슴은 항상 '돈을 벌어 가세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강한 집념으로 가득했다.

1953년 무렵, 20세의 청년 문병량은 군산 미군비행장에 취직했다. 신장 180㎝인 문병량은 단단한 체격의 사나이였다. 하지만 3대 독자 외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군징집을 면제받아 미군부대에 취직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길러주신 조부모 고생을 덜어드릴 수 있었다.

 

 

양조장에서 출발, 굴지의 주류기업으로 성장한 보배의 창업주 문병량 회장의 장년시절. ([email protected])

 

 

군산 미군비행장에 취직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작업반장 지위를 확보했다. 그가 군부대 작업반장을 꿰찰 수 있었던 것은 항상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생활자세가 바탕이 된 통솔력이 크게 작용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성장한 문병량은 부지런하고, 근면 성실해야 각박한 사회에서 살아남고,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찍 부터 깨달았다. 그는 항상 5시쯤이면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생활을 평생 지켰다고 한다.

문병량은 군부대 작업반장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 취직도 주선하는 등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고생하는 이웃들을 위해 나름대로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 기업에 눈 뜨며 홀로서기 나서

1957년 당시 24세인 문병량은 군산시내에서 중상급 규모에 속하던 춘천양조장을 인수하며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춘천양조장은 군산시 대명동 속칭 '감독거리'에 자리잡은 막걸리와 약주 생산 공장이었는데, 기업에 눈을 뜬 청년 문병량은 3년여 동안 저금한 자금을 바탕으로 주변 자금을 끌어모아 양조장을 인수할 수 있었다.

당시 기업에 눈을 뜬 문병량은 군산지역에서 잘 나가는 도정업과 목재업, 양조업 등 3개 업종을 놓고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이들 3개 업종은 당시 군산에서 가장 잘 나갔다. 문 회장은 그 가운데 양조업을 택했고, 10개가 넘는 크고 작은 양조장 가운데 마침 매물로 나온 춘천양조장을 인수했다. 개인 문병량이 기업가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문 회장이 양조업을 택한 것은 나름대로 앞을 내다본 선견지명이 있었다. 도정공장은 시설비 등에 따른 막대한 자본이 부족, 인수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며 양식에 눈을 떴던 그는 우리나라도 경제발전에 따라 생활양식이 변하면 도정업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목재업의 경우 관련 정보 및 기술이 전혀 없어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나 양조장 사업의 경우 잘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비록 막걸리는 마진에 한계가 있지만 술 산업 전체적으로 볼 때 양조업은 소주 생산 등 업종전환을 통해 고부가가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 회장이 훗날 중국 보배원 설립과 죽엽청주를 바탕으로 한 외식업, 주류 수출입업 등에 진출한 것은 창업 초기부터 예고된 일이었던 셈이다.

1957년 당시 군산에서는 청주 생산업체인 대한주조(훗날 백화)가 연매출 2억3400여만원을 올리며 사세를 확장해 가던 때였다. 이제 막 창업한 청년 문병량은 대한주조는 물론 미룡주조장 등 대형 양조장들을 벤치마킹하고, 또 신세도 졌다.

이 때 문병량의 가슴 속에는 갈매기처럼 높이 솟아올라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기업가의 큰 뜻이 용광로처럼 부글거리고 있었다. 대한주조 강정준 사장의 대약진을 지켜보면서 청년 문병량으 꿈도 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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