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현 (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연극배우)
2년 전 소극장에서만 10만 관객을 동원했던 「민들레 바람되어」를 21일부터 다시 공연한다. 주인공 남편 역을 이번엔 자이언트에서 '미친 존재감'이란 신종 호칭을 얻으며 제 2의 전성기를 누리는 정보석씨와 함께 하기로 했다. 이번 연극에서 정보석씨를 다시 만나면서 처음 그를 만나던 때가 떠올랐다. 1989년 난 대학로에서 연극을 막 시작하던 배우 초년생이었다.
대선배(기주봉·김학철)들과 하이네밀러작 '청부'라는 연극에 출연을 하고 있었고 운이 좋게도 포스터에 두 명의 선배와 함께 나오는 행운까지 얻었다. 그런데 거기다가 포스터가 기가 막히게 나왔다. 일단 내 키가 180cm는 되어보이게 나왔던 것이다. 나는 긴 의자에 앉아있고 키가 조금 큰 김학철 배우는 뒤에서 있고 키가 많이 작은 기주봉 선배는 내가 앉은 긴 의자 위에 서 있는 그런 구도였다. 기주봉선배의 키도 작았으나 나의 앉은 키가 남부럽지 않았던지 나와 별 차이 없이 포스터에 나온 것이다.
문제는 이 포스터를 보고 영화사에서 연락이 온 거다. 이문열 원작·곽지균 감독·정보석 주연의 '젊은날의 초상'이란 작품에 운동권 친구역으로 나를 보자는 것이다. 조연급이었으나 신인인 나로서는 정말 좋은 기회였다. 꽃단장을 하고 충무로에 있는 영화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감독님과 관계자분들이 일제히 청바지에 운동화 신은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시더니 아무 말 없이 서로 얼굴을 보며 작은 소리로 뭐라고 대화를 나누시는 거다.
"키가 좀 작지않나."
"좀이 아니라 역할하고는 안 맞는데, 많이 작아."
"운동권학생이 굽 높은 구두를 신을 수도 없고…."
"그런데 얼굴은 좋네." (캬~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정일성 촬영감독님의 말씀이셨다.)
나원참, 사람 키가 고무줄도 아니고 어쩔 수 없었다. '아! 키 때문에 이 좋은 기회를 놓치는구나'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부모님도 원망스럽고, '그래도 얼굴은 되는데 키는 어떻게 좀 안 될까요?' 라고 속에서만 외치고 있었다. 그때 감독님께서 나의 서운함을 읽으셨던 걸까? 우리가 다른 배우 몇 명을 더보기로 되어있으니 일주일 후에 다시 보자는 얘기셨다.
그날 무거운 마음과 마지막 작은 희망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보고 아무리 생각해도 키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며칠을 고민해도 아니 고민으로 해결되지 않는 거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머리에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 목 있는 운동화를 신고 그 안에 뭔가를 넣어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것저것 넣고 실험하다가 합판을 잘라서 차곡차곡 쌓아 5cm 넣었다. 발이 몹시 불편하고 아팠다. 하지만 틀림없이 키는 커보였다.
약속한 날 영화사로 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감독님과 관계자들로부터 만장일치로 캐스팅 당했다. 나의 연기 초년시절은 이렇게 키높이 기적과 함께 시작되었다. 나는 배우 생활을 하며 내가 나태하거나 초심을 잃을 것 같을 땐 항상 키높이 신발을 생각했다. 올해를 시작하며 다시 한번 키높이 신발을 생각해 본다. 그 시절의 치열함과 절실함 그리고 설렘을….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그 당시 보단 생활도 나아졌고 좋은 집에 살고 있고 차도 더 좋은 차를 탄다. 배우로서도 제작자로서도 어느 정도 인정도 받으며 문화예술 전반에 관여하며 일도 하고 있다. 그 시절 보단 정말 나 자신도 나를 보는 시각도 나아진 건 확실하다.
그러나 그 시절에 내 가슴과 머리에 꽉 차있던 절실함과 치열함은 지금 얼마만한 크기로 나에게 있는가를 반성해본다. 굳이 어려운 시절을 그리워하며 허리띠를 다시 졸라매자는 구태의연한 말을 늘어놓고 싶은 게 아니다. 물질은 풍요로워졌으나 오히려 우리를 설렘으로 이끌 무언가를 놓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한 번 되짚어 보고 싶은 것이다.
이 겨울, 유난히 춥다. 추위로 움츠린 겨울을 녹일 뿐만 아니라 생명력 넘치는 봄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키 높이의 기적'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혹은 마음 깊은 곳에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그 기적의 기억을 되살려 낼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 조재현 (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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