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먹는 여우' 박태건 시인 서평
내가 사랑한 것은 여우였다. '이솝우화'의 여우와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 내가 만난 여우들은 삶의 중요한 순간에 찾아와 내 옆에 조곤히 앉아 이야기 하곤 했다. 진정성과 삶의 의미에 대해.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로 여유가 없어지고 여우는 점점 잊혀졌다. 여우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이제는 전설과 동화에서나 볼 수 있는 여우, 보드라운 털이 생각나는 날이다.
프란치스카 비어만의 동화 '책 먹는 여우'는 읽기와 쓰기에 관한 이야기다. 여우는 책을 좋아했다. 좋아해도 아주 많이 좋아해서 책을 꿀꺽 먹어치울 정도였다. 식성이 얼마나 좋은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매일 책을 먹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책으로 교환할 가구도 다 사라지자 여우는 눈여겨 본 건물을 털기로 한다. 구수한 종이 냄새가 솔솔 풍기는 도서관이다. '으음 맛있겠어, 맛있겠어!' 서가의 책을 한 권씩 먹어 치우는 여우. 얼마 지나지 않아 사서는 책의 행방을 쫓기 시작한다.
'배고파, 배고파'하며 책을 먹어치우던 여우는 중학생 시절 내 모습이다. 그 시절 나는 200원짜리 도서관 매점 라면을 300그릇 쯤 비웠다.(가끔 한 번에 두 그릇을 먹은 적도 있었다.) 친구들은 '수학정석'이며 '성문종합영어'를 펴 놓고 머리를 쥐어짰는데, 나는 '맨투맨' 보다 '좋은 냄새가 나는' 다른 책들이 더 좋았다. 독서는 우울한 사춘기를 건너는 방법이자 다른 세계로의 모험이었다.
그 도서관에 후줄근한 관리인 아저씨가 있었다. 종종 낮술에 취해서 직원에게 지청구를 듣던 그는, 도서관 로비를 뛰어 다니는 아이들을 허우적거리며 쫓곤 했다. (놀려주고픈 마음이 절로 들었다.) 언젠가 도서관 담에 기댄 그를 본 적이 있다.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가 필터까지 타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젖은 눈으로 뭔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다닥다닥 붙은 금암동과 인후동의 낮은 지붕들이 보였다. 어른이 된 후, 꼬질꼬질했던 관리인에 대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빨간 눈의 여우처럼 우리의 기억에서 잊힌 '휴전선'의 시인 박봉우였다.
어느덧 나도 후줄근한 나이가 되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지지 않던 결핍과 규율에 저항했던 시인의 시대는 가고, 경쟁과 성과 위주의 시대에 산다.
시집을 읽는 대신 지식과 정보를 습득(먹는)하는 데 급급하다. 요즘 나의 독서는 허기를 넘어선 강박증 같은 것. 먹고 사는 문제로 책을 읽다가 가끔 여우를 생각했다. 주차장 나뭇가지에 맺힌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다가, 막힌 욕조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집어내다가 문득, 여우의 울음을 들을 수 있었던 때는 얼마나 아름다웠는가 생각한다. 누군가의 울음에 귀 기울였던 여우의 시절이 나에게 있었다. 눈물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깨끗하게 하는지 오래 잊고 살았다.
봄이라지만 저녁 바람이 아직 춥다. 나는 아파트 유리창에 충혈된 눈을 대고 어두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 여우를 생각한다. '책 먹는 여우'의 여우처럼 아직 절박함이 부족하더라도, 나는 안다. 내가 사랑한 것은 여우였다고.
/ 박태건 (시인, 원광대 글쓰기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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