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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그리움…오래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한 반추

이성복 시집 '남해금산'…김저운씨 서평

 

 
 

이따금 고서점(차라리 헌책방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에 들른다. 거기 쌓인 책들이 내가 보기엔 참 쓸모없는 게 많은 것 같은데, 굳이 책을 구입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그 고적한 분위기 혹은 버려진 책들의 사연이 궁금해서다.

 

헌 책방엔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도, 이사를 다닐 때마다 버린 책들도 있다. 한때는 누군가에게 필요했고, 사랑받았을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 가운데 기웃거리거나 쪼그려 앉아 들춰보다 보면, 제법 괜찮은 글이 눈에 띈다. 간혹 1950~60년대에 출간된, 누렇게 바랜 책들을 보면 조상님이라도 만난 듯 진중해진다. 잘 아는 작가의 책, 그것도 그때는 미처 몰라서 읽지 않았던 책이, 그것도 고스란히 전집으로 꽂혀 있기라도 하면 반색을 하며 사온다. 그런가 하면 절친 작가의 책이 처박혀 있을 때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혹 어느 구석에서 내 책이 눈에 띌까 뜨끔해하다가 그럴 만큼 책을 내지 못했던 것에 금세 위안을 얻기도 한다.

 

그렇게 헌책방을 순례하던 어느 날, 이성복 시집 '남해 금산'을 발견했다. 이 시집은 내가 애장하는 것으로 책장의 맨 윗칸에 늘 꽂혀 있다. 흔히 말하던 '문지'즉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된 것이다. '사는 모양새가 어수선해서 한동안 잊고 있었구나…' 하는 심정으로 시집을 꺼내 한두 장 넘겨보았다. 그러다가 나는 멈칫했다. 한때 잘 알고 지냈던 사람의 싸인이, 그것도 선명하게 찍혀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한때 시인 지망생이었다. 나보다 더 시를 많이 읽었고 사랑했다. 그의 시를 본 적은 없지만, 시에 대한 애정과 탁월한 해석력으로 보아 허투루 쓸 사람은 아닌 듯 생각되었다. 문학청년이었던 그는 꽃처럼 아름다운 한 여자를 사랑했고, 그녀와 결혼했다. 바닷가 근처에 멋진 통나무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집에 있는 나무며 꽃이며 식탁이며 심지어 강아지까지 모두 어여쁘지 않은 게 없어 부러울 지경이었다.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연락이 끊겼다.

 

그렇게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우연히 그의 소식을 들었다. 가족과 헤어져 혼자 먼 나라로 떠난 지 오래라고 했다. 어린 두 아이를 외국에 유학시키기 위해 아내가 데리고 가 있어서 이른바 '기러기 아빠'가 되었는데, 아내도 아이들도 끝내 돌아오지 않아 우울증이 심했다고. 그러다가 혼자 여행을 떠났는데 그 뒤로는 아무도 소식을 모른다고…….

 

1980년대, 그러니까 벌써 이십여 년 전 나는 시 속에 푹 파묻혀 지냈다. 그 중에서도 이성복의 시를 참 좋아했다. 그의 시들은 너무도 치열하고 낯설어 고통스럽게 하면서도 나를 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집 맨 끝에 실린 시 '남해 금산'을 대했을 때, 가래처럼 나를 막고 있던 그 고통들이 울컥, 목울대를 건드렸다. 시인과 독자의 심장이 똑같은 형상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미사여구나 현학이란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가.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두어 번 남해에 간 적이 있다. 거기가 금산이었나? 멀리 산 위에 우뚝 솟은 커다란 바위가 보이자, 내 차에 동승했던 유상우가 혼자 중얼거렸다.

 

"누님! 저 돌 속에 갇혀 있던 그 여자가 떠났단 말이지요? 저기 가면 남해가 보일까?"

 

그의 아내 이경은이 까르르 웃으며 대답했다.

 

"난 여기서도 남해가 다 보인다, 보여."

 

그날 헌책방에서 나는 이 시집을 굳이 사들고 나왔다. 그리고 오래오래 길을 걸어보았다. '사랑','그리움'. 참 오래 잊고 있던 언어들이, 이성복의 시가, 줄곧 나를 따라왔다. 나이 들면서 삶의 목표만이 확실해져서 운전대를 꽉 잡고 앞만 주시하며 살고 있는 내 모습도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돌 속에 묻혀 있던 '그 여자'는 마음의 감옥을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만났을까. 내가 있는 이 자리가 바로 그 하늘과 바다 사이에 있는 경계가 아닐까…….

 

 

△ 부안 출생인 김저운씨는 수필과 소설을 쓰며 전북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산문집'그대에게 가는 길엔 언제나 바람이 불고'가 있으며, 현재 전주영상미디어고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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