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천 '90000리'...문학평론가 정철성 서평
상상 속에서 만남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 다음에는 그들이 어떻게 만났는가를 차근차근 보여주는 것이 순서이다. 이것이 작가가 스스로를 일컬어 “수공업자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라고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풀려나왔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게 그리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구절은 작가의 말을 배신한다. “시간에도 어쩌면 틈이란 게 존재하는지 모른다. 문틈이나 바위틈처럼… 그 틈새에 놓인 사람들은 이 때문에 서로 만나지 못한다. 그냥 같은 공간만을 공유할 뿐. 그렇지 않다면, 그리메와 에데사 성기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무리가 만나지 못한 일을 설명할 도리가 없어진다.”
작가가 열심히 설명하려고 애쓰는 모양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소설의 몫은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90000리’에서 추적의 테마는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 제국의 북군 교관 융커가 그리메와 달하의 뒤를 쫒는 장면에 다음과 같은 묘사가 있다. “부하 중 한 놈은 어떤 동물적인 감각을 갖추고 있는 듯했다. 길 위에 남겨진 말 발자국뿐 아니라 풀잎을 뜯어 냄새를 맡거나 때로는 입안에 모래를 한 움큼 집어넣어 맛을 보면서까지 치밀하게 그리메와 달하의 행적을 좇았다.” 모래 맛의 자극보다 “어떤 동물적인 감각을 갖추고 있는 듯했다”는 표현의 섬세함, “갖추고 있었다”라고 설명하지 아니하고 “있는 듯했다”고 망설이는 필세가 독자로 하여금 작중화자의 동선을 따라가도록 손을 내밀고 등을 떠미는 역할을 한다. 이런 묘사가 작가의 언어 구사력이 여전히 1급수처럼 맑음을 보여준다.
거시적인 틀에서 ‘90000리’의 얼개는 하늘, 나라, 별, 곱자 등의 핵심어 위에 세워져 있다. 나라가 과연 무엇일까? 잃어버린 나라, 고조선에 대한 향수는 식민과 분단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한국인의 심성을 자극할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국가 또는 민족이라는 다른 용어로 번역되는 순간, 그 의미의 확장은 순식간에 동이족을 넘어가 버린다. 좋건 싫건 세계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2000년 전의 나라는 어떤 의의를 제시하는가? 시작을 돌아본다는 뜻에서 이런 문제 제기는 숙고의 기회를 제공하는 미덕을 발휘한다. 그렇지만 황금으로 바뀐 기적의 곱자가 몽금척 설화를 통하여 근세조선으로 연결되는 지점은 불편하다. 조선이 계승과 극복 어느 한 쪽으로 접근할 수 없는 대상일진대 유구한 전통이 종종 계승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제사장 성기와 그의 아들 그리메가 나라를 되찾는 방법을 두고 대립하는 것은 여느 조직에서나 강온파가 대립하는 보편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그들이 각자 추구하는 해결 방식이 구만리 여정에 가장 큰 긴장으로 작용하고 있다. 칼리와 융커 역시 잃어버린 초원의 나라에 대하여 상이한 접근법을 주장한다. 갈석산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구만리의 여정은 그 규모로 말미암아 인물들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은 각자의 특성을 보여주려고 부단히 움직이고 있다. 이렇게 방대한 배경 속에서
※ 이 글은 지난 6월 전북작가회의 월례문학토론회에서 발제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 문학평론가 정철성씨는 전주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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