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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13호 옻칠장 김을생 명인 "남원에 목기박물관 만들어 관광자원 활용해야"

대담 = 김재호 논설위원 - 1500년 목기 역사 스토리텔링·상품화 필요…자부심 갖고 전통의 가치 보존해야 일등국민

▲ 김을생 명인은 "많은 사람들이 전통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전통의 가치를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고 밝혔다.

추성수기자 chss78@

지난해 한국 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를 방문한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이 유네스코 각국 대사 등을 대상으로 사찰음식체험행사를 개최했다. 그리고 행사에 사용된 발우(鉢盂·바리)를 모두 선물했는데, 여기에 사용된 발우 110세트는 남원시 산내면에 있는 금호공예 김을생 명인이 납품했다.

 

남원은 목기의 고장이다. 특히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는 한국 목기의 발생지라고 할 만큼 유명하다. 실상사라는 큰 절이 목기를 필요로 했고, 목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다양한 수종의 나무와 옻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왕실에 진상됐고, 당시 궁궐 목기는 모두 남원산이었다.

 

남원목기는 지금도 전통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몇몇 장인들 덕분이다. 남원에는 목기와 옻칠 부문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명인이 5명이나 된다. 그 중 옻칠장인 김을생 명인(78)을 지난 24일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 금호공예에서 만났다.

 

-남원지역에서 목기업이 성하게 된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는지요.

 

"목기가 발달한 것은 간단히 말해서 목기 수요가 많은 실상사가 있어서 팔기가 좋았다고 봐야지. 실상사는 한 때 스님이 3,000여명에 달했다고 해. 당연히 제기, 바리때, 소반 등 목기 수요가 많을 수밖에 없었어. 또 지리산이라는 큰 산이 있으니까 나무와 옻을 구하기 좋았어.

 

-조부와 부친께서 가업으로 하던 목기 사업을 3대 째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목기업에 종사하지 않습니까.

 

"2남2녀 중 내가 장남인데, 동생은 해방 후 전주에 나가서 살고 있어. 나는 선대로부터 목기 일을 해 온데다 전라목기기술중학교에서 목기 만드는 일을 배웠기 때문에 목기에 눈을 떴지만, 당시는 목기업이 너무 어려워 가업 잇기가 힘들었어. 나도 처음엔 목기를 쳐다보지 않았어. 상품 가치가 없었거든. 그래서 전주공고에 진학하고, 군대도 공병소위로 임관해 1969년 공병대위로 예편했어.

 

전라목기기술중학교는 전통 목기를 전승할 목적으로 1951년에 세워졌는데 1968년까지 18회 동안 480여명이 졸업했다. 김을생 명인은 1회 졸업생이다. 목기기술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중학교 정규 교육과정도 병행했기 때문에 졸업 후 전주공고에 진학했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목기를 만들게 됐습니까.

 

"전방 GOP에서 군대 생활하는데 적막강산이더라고. 그래서 틈틈이 책을 많이 읽었는데, 일본인들이 전통 가업을 중시하고, 가업을 대대로 이어간다는 것을 알게 됐어. 그러면서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게 사는 것인가'를 고민하게 됐지. 그래 자연스럽게 고향의 목기를 생각했고, 전역 후 전통 목기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거야. 학교에서 목기 기술을 배웠지만 그 때는 확고한 신념이 없었지.

 

-군대 제대하고 곧바로 목기업에 뛰어들었나요?

 

"1969년 제대하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목기를 만들겠다고 나섰어. 하지만 농사 짓던 부모님 반대가 아주 심했어.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아시니까. 나는 선조들이 준 전통을 묻어두기 보다는 잘 살려야겠다는 신념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결국 목기를 시작했지.

 

처음 '원백일리 부업단지'라는 상호로 시작했는데, 그 후 금호공예라고 바꿨어. 당시 시골사람들은 밥먹고 살기가 힘들었잖아. 우리 공장이 일자리를 주었고, 동네사람들은 공장에서 돈 벌어 아이들을 가르쳤어.

 

-힘든 상황이었는데, 처음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당시에 목기공장은 없었고, 몇몇 집에서 농사지으며 부업으로 조금씩 만들었어. 전업으로 할 만큼 소득이 안되니까. 그 때문에 내가 공장을 세워 전통 가업을 잇겠다고 하자 주위에서 말리는 거야. 부모님이 크게 말렸어. 그 때 1천만 원은 컸어.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생각처럼 안되더라고. 논도 (저당)잡히고 해서 나중엔 재산이 다 넘어갈 지경이었어. 한때 '부모님이 말릴 때 들을 걸'하는 후회도 했지."

 

-왜 그렇게 어렵게 된 겁니까.

 

"그때는 보부상이 있었어. 열심히 만들어서 그들에게 물건을 주었더니 돈을 떼어먹기 일쑤야. 원금의 절반도 안줘. 1년에 보리·벼 나올 때 두 번에 걸쳐 주거나 아예 떼어 먹어."

 

-어떻게 그 난관을 극복하셨습니까.

 

"공장이니까 사람을 써야 물건을 만들 수 있어. 그런데 목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하고, 초갈이하고, 건조하고, 재갈이 하고, 사포질하고, 몇 차례에 걸쳐 옻칠을 하는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돼. 인건비와 재료비 등 돈이 많이 든다고. 그런데 보부상들이 제품 대금을 떼어먹기 일쑤다보니, 아버님 재산까지 파산 직전이 되고 말았어. 뒤돌아보면 공장 만들고 4~5년은 참 힘들었다고. 애들은 커가고, 부모님 뵐 면목도 없고. 욕심 없이 바르고 가치 있게 살고자 했지만 갈수록 일이 풀리지 않아 참 힘들었어.

 

그러던 어느 날 집에 갔더니 일곱 식구가 냉방에서 자고 있더라고. 그걸 보고 악심이 생겼지. 그래 보따리에 물건 싸가지고 내가 직접 팔러 다니기로 했지.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소비자를 찾아 갔군요.

 

"당시 제기 1벌에 3000원을 남기고 보부상에 넘겼어. 15벌 1짐이 3만 6000원이었지. 그런데 내가 어떤 주문이 있어서 구례에 갔을 때 그곳 사람에게 가격을 물었더니, 제기 1벌 가격이 20,000원 가까이 되더라고. 큰돈이야. 중간상을 통하지 않고 소비자에게 직접 팔아야 한다는 걸 깨달은 거지.

 

제기는 1벌이 37개로 구성된다. 또 15벌이 1짐이다. 그런데 중간상들은 1짐을 생산자로부터 3만 6000원에 받아 소비자에 판매하면서 엄청난 이문을 남긴 셈이다. 비록 당시 운송 수단이 좋지 않아 1짐(제기 555개)은 커녕 한 벌도 배달하기가 힘든 여건이었지만, 생산자 입장에서는 중간상을 거치는 게 큰 손해였다. 김을생 명인은 목기업을 시작하면서 제기와 함께 쟁반, 소반도 만들었다. 대중적인 제품을 만들어야 자금을 회전하며 공장을 가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기나 소반은 부피가 커 배달이 힘들었지만, 발우는 부피가 작고 돈도 됐다. 게다가 사찰(스님)은 보부상처럼 떼일 위험이 없었다. 김 명인의 판단은 적중했다.

 

-그래서 발우를 만들었습니까.

 

"제기는 많이 만들기가 어려워. 그래 바리때를 주로 만들기로 했지. 바리때를 만들어서 스님들을 찾아갔어. 그런데 스님들이 바리때를 이리 저리 살펴보고선 '지금 이 세상에 옻이 어디에 있냐. 밥그릇인데 진짜 옻으로 만들어야지 화학재료를 쓰면 못써'하며 바리때 품질을 믿지 못하는 거야."

 

금호공예에서 발우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75년 무렵이다. 당시 우리 사회에서 옻은 귀했고 화학도료를 사용한 물건이 많았다. 스님들 공양에 사용하는 발우는 위생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스님들의 신중한 반응은 당연했다.

 

-어떻게 설득했습니까.

 

"'돈 안 받을 테니까 일단 써 보시라' 하고 바리때를 놓고 나왔지. 4~6개월 후에 믿음이 가면 대금을 치르라고. 몇 개월 후 물건을 준 스님을 찾아갔더니 좋은 바리때라며 사주더라고. 진짜 옻칠을 한 발우는 처음에는 새까만데, 한참 쓰다보면 붉어지면서 반짝 반짝 광택이 나거든. 스님들이 식사하면서 어느 곳의 누가 만든 바리때가 좋더라는 말이 있으면 그 정보가 빠르게 퍼지지. 그렇게 시작된 바리때 사업은 적중했어. 얼마 후부터 내가 만든 바리때가 전국 사찰에 들어가게 됐지. 그렇게 바리때를 짊어지고 전국 사찰을 찾아다니는 보부상을 5~6년 했는데, 처음에는 자동차가 없어 고생도 많이 했어."

 

전국에 사찰이 3,000여개 된다. 절에서는 발우 외에도 불전이나 생활에서 사용하는 목기와 소반이 많다. 전통의 가치를 녹여 만든 그의 제품은 스님들의 마음을 끌었고,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그러면서 느낀 것도 많았을 것 같아요.

 

"사람은 어려움을 겪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 어려움을 어떻게 대처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거든.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어려움을 너무 모르고 사는 것 같아 안타까워."

 

-평생 목기를 만들어 왔고,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명인의 반열에 올랐다. 마음 속에 두고 있는 좌우명은?

 

"신용이 최고야. 나는 평생 신용을 지켜왔지. 전통 가치를 이어가려는 집안의 물건과 얼렁뚱땅 만들어 돈을 벌려는 집안의 물건은 하늘과 땅 차이가 있어.

 

나무는 잘 말리지 않으면 나중에 비틀어져. 예를 들어 바리때는 4개 이상의 그릇 중 가장 큰 그릇 안에 작은 그릇들을 차례로 포개어 하나처럼 만드는데, 포개어진 그릇끼리 부딪치지 않고 빙글빙글 잘 돌아야 해. 근데 돈이 급하다고 대충 만들면 돌지 않아. 불량품이야. 나는 처음부터 품질과 신용을 중시했어. 처음에는 어려워도 한번 신용을 얻으면 만사가 풀리게 돼 있어.

 

-발우는 수작업으로 만듭니까?

 

"가끔 스님들이 은사로부터 받은 금강산 바리때가 낡았다며 옻칠을 해달려고 가져오는데, 살펴보니까 세 사람이 수작업 한 것 같아. 추정해 보면, 원목을 긴 줄로 한차례 감은 뒤 양편에서 두 사람이 당기는 작업을 서로 반복하고, 기술자가 작업 칼을 이용해 빙글 빙글 도는 원목을 깎았어. 지금은 원동기를 이용해서 깎아.

 

-목기 제품은 어떤 과정을 거쳐 생산됩니까.

 

"제기, 바리때, 소반, 쟁반 등 만들 물건을 정한 후 그에 맞는 목재를 구해. 그리고 제품 크기에 맞게 절단하지. 바리때용으로 잘랐다면 먼저 초갈이를 하고, 음지에서 1년 정도 건조 과정을 거쳐. 1년 후 초갈이한 것 중에서 갈라지거나 뒤틀리지 않은 좋은 백기만 골라 재갈이를 해.

 

-목기 종류별로 쓰는 나무가 다릅니까.

 

"발우는 은행나무 은사시나무, 제기는 물푸레나무 자작나무 오리목나무, 소반은 은행나무를 쓰지"

 

-제기, 발우 모두 옻칠을 하는데, 옻은 어떻게 구합니까.

 

"여기서 가까운 곳에 있는 경남 마천은 우리나라 3대 옻나무 주산지 중 하나야. 산내에서 목기가 발달한 것도 나무와 옻을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야. 옻나무에서 칠을 내려면 세 사람이 필요해. 나무에 흠집내고, 칠을 긁어내고, 그릇에 담는 사람이 필요하지. 옻 내는 사람은 꼭 문둥병자처럼 피부가 좋지 않아. 그만큼 작업이 힘들기 때문에 누가 일하려고 하지 않아.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옻 50그램이 12만원씩 해. 게다가 인건비도 비싸서 이윤은 많지 않아."

 

-옻칠하는 작업장 조건은.

 

"화학칠은 햇빛만 좋으면 잘 말라. 그러나 천연 옻은 날씨가 좋다고 마르는 것이 아니야. 조건이 맞아야 돼. 습도 85%, 온도 섭씨 30도 조건이 모두 맞아야 옻이 말라붙는단 말이야. 그래서 별도의 칠장을 만들어서 습도와 온도를 인위적으로 맞추는데, 그런 상태면 하루 만에 말라. 단, 여름에는 밖에서도 잘 말라."

 

-옻칠은 1,000년을 간다고 들었습니다. 특성은.

 

"옻은 나무에 대한 침투력이 강해. 화학 칠은 석유를 묻히면 닦이지만, 옻칠은 절대 벗겨지지 않아. 그리고 방수가 잘되기 때문에 나무가 절대 썩지 않아.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보물선이 썩지 않은 것도 옻칠 때문이라고. 또 살균 살충효과가 있고, 처음 새까맣던 색이 갈수록 붉은 빛을 띠면서 윤기가 나는 것도 옻칠의 장점이지."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는 작업에 남다른 열정을 쏟는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이 인터뷰를 하는 이유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전통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전통의 가치를 계승 발전시켰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지. 목기든 뭐든 전통으로 하는 것은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그런데 정치하는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는 게 문제야. 예를 들어 남원에 목기박물관을 만들면 좋을 텐데 관심이 없어. 남원목기와 칠을 전승하는 전국 유일한 시설이 들어서면, 목기 만드는 체험도 하는 등 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고, 일자리도 늘어나니 좋지. 남원목기의 1,500년 역사를 (스토리텔링해서) 문화 상품으로 만들어야 돼. 대한민국 목기의 전통은 남원 목기야. 이곳에 목기박물관을 세우면 외국인들도 많이 방문하고 제품도 사갈 거야."

 

-발우를 만들고,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스님들과 인연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은사 스님들은 제자에게 세 가지를 물려주는데 가사와 장삼, 그리고 바리때라고 해. 스님이라면 반드시 이 세 가지는 지니고 있는 거지. 그래서 일을 하면서 항상 스님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어. 일타스님, 서암스님 등은 이곳을 지나면서 꼭 들러주시고, 이런 저런 조언도 해 주시고, 바리때도 팔아주었지.

 

-금호공예 전시장 앞 화강석에 '복 짓는 법'을 새겼던데요.

 

"사람들은 복을 받고 싶어하는데, 복을 받기 전에 복을 지어야 해. 복을 지으려면 씨를 뿌려야지.

 

복전(福田)의 첫째는 남에게 베푸는 거야. 보시(普施)야. 내가 도움을 준 그 사람이 잘 되면 그 복이 내게 돌아오게 돼 있어. 둘째, 경전(敬田)이야. 어른한테 공경할 줄 알아야 해. 셋째, 은전(恩田)이야. 부모 은혜를 잘 알라는 것이지. 그리고 비전(悲田·남을 불쌍히 여김)과 시전(施田·가난한 자를 돕고 병자를 구제)도 있어.

 

끝으로 낙전(樂田이)은 극락세계를 안다는 뜻이야. 우리가 좋은 마음을 갖고 좋은 일을 하면 극락세계로 간다는 마음을 가져야 복을 짓고 세상살이가 즐거운 것이야. 그 중 가난한 자와 병자를 구제하는 것이 복을 짓는 으뜸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지.

 

-칠시(七施)는요.

 

"일곱가지 보시야. 부족한 사람 돕고, 항상 웃는 눈빛과 얼굴, 상냥한 말씨로 응대하면 복 받는 거지.

 

-동네 입구에 제심서원(濟心書院)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던데, 직접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1980년에 만들었어. 사람이 자기 마음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야. 이 일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문, 한학을 가르쳤어.

 

지금 우리가 한문, 한학을 하지 않으면 안돼. 우리말 어원의 80%가 한자에서 나왔다고. 그걸 배우지 않으면 조상 근원도 몰라. 읽을 수도 없고 어떤 뜻인지도 모르잖아. 공자는 파당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했어. 학자들이 한글과 한문 파당을 만들고, 한문을 못하게 하는 것은 큰 문제야.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다운 가치를 가져라, 전통을 이어가면서 선조 혼을 잊지 말라고 말해 왔어. 한 때 세계를 호령한 칭기즈칸의 나라를 봐라. 전통이 보잘 것 없잖아. 우리는 좋은 전통을 많이 갖고 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전통을 세워야 일등국민이 돼. 그러기 위해서는 국방이 중요해. 나라는 한 번 지키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고 말아. 그런 가치, 근본을 잊어선 안돼.

▲ 김을생 명인이 본보 김재호 논설위원에게 목기제작 과정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추성수기자 chss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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