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이경재 선임기자 - 예를 알아야 하고 도를 지켜야 하는 게 선비정신…우리 고유의 소리·맛·빛깔이 사라져 안타까워 다시 태어나도 고향에서'문인의 길'걸어갈 것
고하((古河) 최승범(81) 선생에겐 '풍류'와 '선비'가 따라붙는다. 두가지를 소재로 시를 많이 썼고 유유자적하면서도 자신한테 엄격한 생활태도 때문일 것이다. 이 시대의 선비를 꼽으라면 강암 송성용 선생과 함께 고하 최승범 선생을 꼽는 이들이 많다. 양병오 전북대 교수(54)는 스승인 고하에 대해 "문학정신은 여유롭고 낙낙한 풍류에 뿌리하고 있지만 세상을 살면서는 '줏대'를 강조하시는 외유내강형 성품"이라며 "이 시대 선비정신을 실천하고 계시는 몇 안되는 분"이라고 했다. 선비정신은 그의 예술과 학문을 지탱해 온 힘이다.
혹한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11일 고하문학관을 찾았다. 전주 성심여중고 남쪽 향교길에 있다. 최승범 선생은 고하문학관 관장이다. 집필실이기도 하고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다. 장서가 가득하다. 원로시인이지만 꾸준히 작품을 구상하고 시작(詩作)활동을 하고 있다. 얼마전엔 시조풍류를 엮은 '시조로 본 풍류 24경'이란 책을 펴냈다. 풍류란 '속기가 섞이지 않은 맑은 바람, 맑은 물의 흐름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풍류와 선비의 대명사인 고하 선생을 만나 여러 얘기를 들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집과 고하문학관(향교길)을 왔다 갔다 해. 운동 삼아 동문 네거리까지 1200보쯤 걸은 뒤 차를 타고 인후동 집까지 가요. 지인들 만나는 게 일이지."
-고하문학관이 사랑방 역할을 하겠군요.
"문학관에서 수필 시 이야기 등을 하며 지내. 오늘(11일)도 문인 다섯분과 만나 격주에 한번씩 회동하자는 얘기를 나누었어."
1996년 정년퇴임한 뒤 장서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중 신용금고를 경영하던 중학교 동창이 공간을 마련해 줘 1997년 문예관의 둥지를 틀었다.
그뒤 전주시가 성심여고 남쪽 향교길의 2층짜리 동사무소를 리모델링한 건물을 제공해 2010년 현재의 공간으로 이전했다. 고하(古河)는 최승범 선생의 호다. 호를 따 고하문학관으로 명명됐다. 3만여 권을 웃도는 장서가 있다. '고하문학관'이라는 한글 현판은 송하진 전주시장이 썼다.
-얼마전 '시조로 본 풍류 24경'을 펴내셨습니다.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데 근간의 집필활동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주로 밤에 옛 생각이나 현실의 느낌을 쓰는데 다음날 아침에 문학관으로 가져와 다시 보고 하는 거지. 산문은 원고 청탁이 들어와도 잘 써지지 않아. (나이 때문에) 긴 글은 이제 못 쓰겠어."
-어떤 분은 이 책을 '빼어난 시조들을 아우른 백과사전 같은 작품'이라고 소개했던데 어떤 작품입니까.
"'시와 문학'이라는 잡지를 펴내는 김재홍 교수가 황진이 시조를 소재로 원고지 50매씩 써달라는 청탁이 와 여러차례 썼는데 나중엔 황진이 이후의 시에 대해서도 계속 써달라는 거야. 이 때 쓴 작품들을 엮은 책이야. 가람선생이 '내 시조의 스승은 황진이'라고 할 정도로 뛰어났어. 가람 선생한테 배운 내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지. 황진이는 명기(明妓)이면서 예기(禮妓)였고 시기(詩妓)였어."
-평소 '풍류(風流)'를 소중히 여기고 천착해 오셨는데 풍류란 무엇이라고 설명하시겠습니까.
"글자 그대로 맑은 바람, 유유히 흐르는 물과 같은 것 아닌가. 최치원 선생이 맨 처음 이 말을 썼는데 인간의 교화도 풍류에서 찾아야 돼. 화랑도들이 산천을 유람하며 몸과 마음을 닦았던 호연지기도 바로 풍류에서 발원하는 것이라고 봐야지."
-선생님 문학의 바탕도 풍류정신이랄 수 있겠군요.
"대학 (교수)시절부터 문학정신을 풍류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恨)을 갖고 많이 이야기하지만 잘못된 생각이야. 찌들어지고 슬픈 한만 이야기 해서 뭐해. 풍류가 흐름이고 정신이야."
-많은 사람들이 풍류에 묻혀 살고 싶어하긴 하는데 현실이 용인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신경 쓸 일이 많으니까 그렇겠지. 안타까워."
-선비와 선비정신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쓰셨는데 선비정신이란 어떤 것일까요.
"한마디로 말하기가 어렵지.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재물을 멀리 해야 해. 또 예(禮)를 알아야 하고 마땅히 지켜야 할 도(道)를 지켜야 하는 게 선비정신이지."
-선비정신은 억지로 실천하려 한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선비집안 자식은 이래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어. '양식이 없어 굶을 망정 기생해서는 안된다'는 것 같은 말을 들으면서 자랐지. 중학교 때 흉년이 들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집에 먹을 게 없는 사람 손을 들어라고 한 뒤 손을 들면 편지봉투에 서숙(조)을 담아 나누어 주었는데 나는 형편이 어려웠지만 손을 들지 않았어. 집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할머니는 '장하다 우리 손주. 그래야 한다. 없는 것 군색 떨면 안된다'고 등을 두드려 주며 기특하게 생각하셨지. 이런 게 몸에 밴 게 아닐까. 그런데 요즘엔 이런 가르침이나 문화가 없어."
-오늘날에는 선비정신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정신적 가치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내가 강조하고 잘 쓰는 말이 '줏대 없이 살지 말라'는 말이거든. 속 되게 살면 안돼. 회똥거린다는 말이 있는데 좌고우면 하면서 살면 안된다는 말이지."
-선생님을 두고 이 시대의 자상한 어른, 고고한 선비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인생의 좌우명이랄까 삶의 철학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죠.
"자식들이 어렸을 때 우리 집의 가훈이 있느냐고 물어. 그래서 '눈은 아래를 봐야 한다'고 가르쳤어. 사람을 보거나, 길을 가거나 눈을 치켜뜨고 보면 안돼. 그리고 봄이 왔다고 해서 봄을 그냥 믿어서는 안돼. 섣불리 옷을 벗어 제치고 했다가는 봄에 속아 넘어가는 수가 있어."
-선생님은 우리 시문학의 큰 기둥인 가람 이병기 선생을 스승으로 모신 현대시조의 산 증인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인연이 맺어졌나요.
"서울대에 재직했던 가람 선생이 6·25전쟁이 끝나자 전북대로 옮겨 오셨어. 그래서 스승으로 모시게 됐지. 당시 가람 선생의 제자들이 월북했어. 전쟁이 끝나자 이를 두고 학생들이 가람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부치면서 반대했지. 그러자 학장으로 있던 이병도 박사가 잠깐 내려가 있으라고 해서 전북대학교로 옮겨온거지. 당시 이병도 박사는 '가람이 다른 뜻이 있었다면 월북했을 것이다, 떳떳했기 때문에 서울대에 남아 학교를 지켰다'며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학생들을 타일렀지만 소용이 없었어. 나한테는 묘한 인연이 됐지."
-가람 선생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일제시대에 개명도 하지 않았어. 친일 내용은 한 줄도 쓰지 않았지. 누군가 어느 글에서 친일했다고 썼는데 알아보니까 가람 선생이 징용간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아들을 생각하며 글을 썼는데 이걸 두고 친일했다고 쓴 거야. 그 아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어. 가람선생에 대해서는 책도 쓰고 글도 여러번 썼는데 그때마다 나는 가람선생 발 뒤꿈치도 못 따라갈 만큼 모자란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 시험 보고 나면 잘못한다고 혼나기도 많이 했어. 당시 학적부를 보니까 C학점(국문학사 과목)이 하나 있었는데 가람선생 과목이었어. 학문은 정확하게 가르쳤지."
-난(蘭)에 얽힌 일화도 있던데요.
"가람선생은 평생 난을 가꾸며 사신 분이야.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도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난초가 담배연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거지. 난초는 술의 향기는 좋아하지만 담배 냄새는 싫어해. 정종을 마시고 난 뒤에 남아 있는 정종을 붓에 묻혀 난을 닦아주곤 했지."
-또 한분의 스승이 신석정 선생인데 석정선생은 장인이기도 합니다. 어떤 인연이 있었나요.
"석정 선생한테는 시론을 공부했지. 면전에서는 칭찬을 하지 않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사위한테 가서 물어보라고 술자리에서 자주 얘기하셨다고 해. 내가 문단에 등단한 것도 석정 선생 추천을 받은 게 아니야. 김동리 선생 추천으로 1958년 현대문학에 글이 나오면서 등단했지. 석정선생은 자신이 심사위원인데 사위를 추천해선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어. 요즘으로 치면 상피원칙이지."
-김동리 선생이 추천하게 된 특별한 계기는 있었나요.
"전주에 문학강연 왔다가 일번지다방에서 대학신문에 게재된 내 시를 보셨던 모양이야. 서울로 올라간 뒤 얼마 있다가 작품을 보내라는 엽서를 보내셨어. 그래서 '등고' '소낙비' '설경' 세 편의 시를 보냈는데 현대문학에 실려 등단했어."
-석정 선생 큰 따님하고 결혼하신 얘기 좀 들려주세요.
"당시 김준영 선생이라고 계셨는데 석정 선생의 부안 집에 놀러가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함께 갔는데 석정 선생이 아이들을 불러 인사를 시켰어. 정원에서 술 한잔씩 하고 놀다 다음날 떠나면서 뒤돌아보니 큰 딸이 정원에 서 있었고 시선이 마주쳤지. 마주치자 마자 둘 다 시선을 돌렸지만 묘한 감정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 뒤 김 선생이 사귀어 보라고 했고 가람 선생도 좋다고 하셔서 사귀었지. 아버지께서는 바닷가 쪽(부안)이라 내키지 않으셨지만 시인 집안의 딸이니 괜찮겠다며 승락하셔서 결혼했어."
-맨 처음 문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아버지께서는 고등고시를 (준비)했으면 했어. 그런데 할아버지는 공부를 할려면 먼저 사람이 돼야 한다며 소학을 읽게 했지. 나는 어깃장을 내기도 하곤 했는데 책을 많이 읽었던 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어. 할아버지는 60년대에 돌아가실 때까지 상투 틀고 평생 갓을 벗은 일이 없어."
-지금까지 펴내신 저술이 상당량에 이를 텐데요. 몇권이나 됩니까.
"나도 잘 몰라" 그러면서 저술, 시집, 수필집 목록을 건네주었다. 세어 보니 58권이었다.
-좋은 시란 어떤 시일까요.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좋은 시를 얘기하겠어. 나는 정지용의 '고향' 같은 시가 좋아, 순수시."
-특히 사라져 가는 옛것들에 대한 애착이 강하신 것 같아요. 소리, 맛, 빛깔 등이 그러한 소재들인데 특별한 동기라도 있는 겁니까.
"평소에 우리 것, 우리적인 것인 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지. 전통계승이나 선비정신에 대해 원고청탁도 많이 받았고. 그럴 때마다 애착을 갖고 우리 것이 뭐 있겠는가 챙겨본 거지. 그런 중에 우리 고유의 소리나 맛, 빛깔 등이 사라져 가고 있더란 말이야. 안타깝고 그리워서 소재로 삼았던 거지."
-선생님은 '풍미산책'을 쓰시고 미식가로도 정평이 나 있습니다. 요즘 음식들은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콩나물 하나를 쓰더라도 맛이 다 달라. 안타까워. 이 근방에 손칼국수집이 있는데 바지락 같은 재료를 새벽에 일찍 장보기 하고, 또 밀가루를 두드리고 밀고 하는 것도 주인 혼자 다해. 정성이 들어가니까 맛도 좋을 수 밖에 없어. 내가 자랑하고 싶은 음식점이야. 근방에 등갈비집이 하나 있는데 엉터리야. 하도 맛이 없어서 노동부 근처 잘하는 곳을 알려주면서 배워오라고 했더니 처음엔 그 맛을 못내. 여러번 채근했더니 자체 개발을 해서 이젠 아주 맛있게 잘 해. 갈비도 손대기 좋게 다루고 쌀도 장수에서 가져온 좋은 쌀로 밥을 짓고…. 음식은 결국엔 정성과 노력에 달려 있어."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이 있다면 어떤 걸 들 수 있겠습니까.
"범우사에서 '남원의 향기'라는 책을 낼 때인데 작품을 30여편 골라달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못 고르겠어. 그래서 조교선생이 알아서 골라 주도록 했지. 지금도 마찬가지야."
-시를 쓰면 밥 먹고 살기 힘들다고들 하던데요.
"책을 사지 않는다고 하던데 문제야.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해야 하는 세상인데 시를 읽을 틈이 어디 있겠어. 안타까워."
-요즘의 후학이나 후배 시인들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충고 한토막 해 주신다면.
"내가 어떻게 충고를 해. 큰 일 나. 일본 작가가 한 말이 있어. '은근하고 점잖은 고답적인 문장에 짜증나는 전후세대의 반격이 시작되고 있다'고. 안타까운 현상이지." 이 작가는 하야시 마리코(58)로, 베스트셀러 작가다
-학자로서, 문인으로서 외길 인생을 사셨는데 후회나 미련은 없으시나요.
"정년퇴임 때 이런 말을 했지. 가정이 남원이고 대학도 전북이고 문인의 길을 걸어왔는데 다시 태어나도 이 고장, 이 길을 걸어가겠다고. 지금도 후회는 없어."
-나이 들어 세가지 즐거움을 갖고 사신다고 들었습니다.
"첫째가 문을 닫고 책을 읽는 즐거움, 둘째가 문을 열고 밖에 나가 자연을 소요하는 즐거움, 셋째는 찾아온 친구들과 술 한잔 하며 담소하는 즐거움인데 이제 그럴 친구들이 없어."
-사회에 대해, 세상에 대해 하실 말씀은 없나요.
"세상에 말할 게 뭐 있나. 이 상태로 살아가게 해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인데 가당치 않아."
-대통령 선거철입니다. 선거 때마다 문인들이 보수-진보로 나뉘어 특정후보 지지선언을 하는데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다 자기 길을 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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