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버려야 한다' 의미 깨닫는 순간 진정한 생 살게 돼
서른 살 무렵 나는 늘 허무에 시달렸다. 지긋지긋한 허무와 우울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는데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에 등짝을 후려치듯 강렬하게 영혼을 뒤덮었다. 인간은 죽음에 대해 무기력하다. 눈을 감는 순식간에 우주가 사라져 버리는 불가사의한 미래는 앞으로 나가는 생에 의미를 잃게 한다. 죽음이라는 목표를 향해 빠르게 흘러가는 생, 까뮈는 그것을 정지시키는 힘은 예술만이 갖고 있다고 〈무어의 집〉을 통해 명시한다. '삶의 이성적인 틀 위에 예술이 있고 일치된 공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생의 한계를 넘는 예술의 세계를 통해 위안 받는다. 그래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훌륭한 것을 대할 때 '예술적'이라는 말을 쓴다.
어릴 때 까뮈의 '이방인'을 읽으며 고통을 관조하는 도도한 태도에 감탄했었다. 인간은 모두 고통을 두려워하고 고통 앞에서 무릎 꿇는다. 살이 타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제 동료를 발설하지 않는 투사들은 이를 앙다물고 고통을 참는데 이방인의 'K'같은 인간들은 제게 불어 닥치는 불행과 고통을 까마귀처럼 관조한다. 고통의 소용돌이 안에서 담담하다. 자신의 고통 앞에서 담담할 수 있는 상태를 이해하기 힘들어서 까뮈의 산문집들을 읽었다. 〈무어의 집〉과〈안과 겉〉 등.
'알베르 까뮈', 이름이 주는 어감이 부드럽고 정교하다. 고급스러운 이름과 달리 그의 생은 혹독했다. 아버지는 알제리로 이주한 알사스 출신 노무자였는데 1차 세계대전 때 받은 부상으로 사망했으며 어머니는 빈민지역에서 가정부 일을 하며 두 아들을 양육했는데 문맹이었다. 까뮈는 알제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철학을 공부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자동차부품판매, 선박 중개사, 도청 직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까뮈가 생의 고통을 관조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렇게 가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는지 모른다.
나 또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홀로 되신 어머니가 가족의 생계를 꾸리셨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직장생활을 했고 삼년 후 대학에 입학해 다니면서도 온갖 일을 했다. 접시 닦기, 학원 강사, 시청 직원 등. 홀로 견뎌야했던 힘든 시간 속에서 나를 담담하게 들여다보게 해준 것은 까뮈의 관조적 아포리즘이었다. 그 당시 나는 그림도 그리고 판화도 하고 악기도 배웠다. 공부와 일을 병행해야 하는 생활에 육체도 그렇지만 정신이 더 피로했다. 밤을 새워 판화를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 정신적인 피로를 잊곤 했다. 당시 유행하던 예술영화도 봤고 틈틈이 음악회도 다녔다. '예술에는 시간과 공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까뮈의 말에 매료되어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냈다. 피죽을 먹고 살더라도 예술적 인간이 되고 싶었으나 결국 그렇게 되진 못했다. 생활 속에서 예술적 인간이 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목표를 잃으면 사람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때부터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시간, 무의미하고 부질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자신을 잃는 것이다. 자신(自身)도 그렇고 자신(自信)도 마찬가지다. 서 있는 자리에서 나를 돌아보는 것,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엎어져 코를 박고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 무릎에 묻은 먼지를 툴툴 털고는 다시 걷도록 만드는 힘은 자신(自信)이다. 오랫동안 묶어두었던 원고의 먼지를 털고 새로이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나를 믿기로 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과 내가 만나는 이미지가 내안에 오롯이 박힐 수 있도록.
성공하는 삶 뿐 아니라 비참하게 일그러지는 삶조차도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나의 세상이기에 값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시간을 뜯어먹고 사는 나 또한 값지다. 울고 있는 내가 불쌍해 연민을 갖기보다 그 상황 속에 녹아서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야 까뮈가 말했던 예술을 하기 위해 '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버리라는 것의 의미는 방치하라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지 마라는 것이었다는 것을. '예술'을 하고 싶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해야 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진정으로 원했던 내가 바라는 생을 살도록 나를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똑바로 걸을 수 있도록 온갖 잡다한 욕구에 시달리고 있는 나의 마음을 맑게 비워둬야 한다.
파랑, 초록, 갈색 선들이 그어져 있는 〈무어의 집〉, 책장을 덮으며 허무하고 우울했던 서른 살의 나를 쓰다듬는다. 바람 속 먼지 같이 아무것도 아닌 나는 나를 깨닫는 순간 우주가 된다. 그래서 진정한 나의 생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윤수하 시인은 계간 〈시에〉 신인상으로 등단. 현재 전북대 국문과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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