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개척하는 자 변혁 꿈꿀수 있다 황산대첩 이야기
그는 바른 남자였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 세상은 언제나 ‘칼끝 위의 맨발’이었다. 다행히 그는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창끝에서 춤을 추는 방법을 알았다. 웃음은 부드러웠고 여유가 있었으며, 삶의 진실을 투명하게 응시하는 맑은 눈을 가졌다. 소설가 서권(1961-2009).
글에 대한 그의 집념은 무서운 것이었다. 집필실이 없었던 그는 자동차에서도 글을 썼다. 때론 김제 금평저수지 곁에 차를 세우고 1,000자 원고지나 학생들이 쓰고 남은 OMR답안지 빈 공간을 깨알 같은 글씨로 채워나갔다. 엉덩이가 짓무르면 화장실 변기를 방석처럼 깔고 앉았다. 그 독한 의지는 그의 마지막 작품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려 말, 마흔 여섯 살 백전노장 이성계의 건곤일척(乾坤一擲). 남원 인월의 황산에서 이성계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며 벌인 황산대첩을 그린 〈시골무사 이성계〉(2012·다산책방)다.
이미 잘 알려진 역사적 사건을 소설로 구성하면서 그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 장대한 결전의 시간을 ‘단 하루의 전쟁’으로 설정한 것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작가의 패기는 차고 넘친다. 고려군과 왜군의 진영, 무사들의 세밀한 전법과 전투와 무기 사용 등에 대한 묘사는 작가가 14권 분량으로 써 둔 소설 「마적」에서 쌓은 내공으로 고금무쌍(古今無雙) 전개된다. 전투가 막바지에 치달을 무렵 수백 개의 풍등이 달처럼 떠오르는 장면과 화살을 쥐는 들숨과 당겼던 살을 푸는 날숨의 찰나는 책을 내려놓지 못할 만큼 박진감이 넘친다.
그는 강원도에서 군복무 중이던 1984년 〈실천문학〉에 ‘서소로’란 필명으로 시 「황사바람」을 발표하며 시인의 이름을 얻었다. 그 시에서 그는 ‘이 나라 어느 강가를 돌아도 흐린 황토물 거기 미꾸라지 몇 마리 흐르는 물 휘저으며 살찌우고 있나니, 함께 걷혀다오.’라며, 지배계층만을 위한 신화를 깨고 민중의 허기진 배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고, 의식의 자유를 소망했다. 호흡이 좋은 시를 쓰고 맥이 탄탄한 소설을 써도 현실이 마음을 아프게 하던 살벌한 시대. 그는 더 살벌한 군대에 있던 그때에도 글을 통한 외로운 투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시에서 소설로 장르를 바꾼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그는 2007년 〈실천문학〉에서 단편소설 ‘검은 선창’으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뒤늦게 소설가의 신고를 치렀다. 그때 그는 “인간이 사회의 큰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문학도 이 범주에서 움직인다. 사회 현상을 직시할 수밖에 없다. 문학은 사회 변혁에 희망을 주어야 한다. 삶의 터전에 근시적 애정을 가지고 문학의 몫을 다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저항정신의 원형과 본질의 환기. 그에게 등단은 목적이 아니라, 외연을 넓히기 위한 작은 걸음이었던 것이다.
〈시골무사 이성계〉에도 그 의미는 살아 있다. 이성계에게 황산의 전투는 ‘지면 죽음으로 답해야 하고, 이기면 그것으로 그만인 싸움’이었다. 슬프지만 당찬 이성계의 운명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작가 서권은 소설을 빌어 윽박을 지르지도, 부추기지도 않고 나직이 말한다. 아무리 늦었다고 해도, 모두가 망상이라고 해도, 자신이 처한 현실에 맞서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길 수 있는 사람만이 아름다운 변혁을 꿈꿀 수 있다고. 아픈 시대의 상처는 걷어내야 한다고. 이 책에는 묵묵히 세상을 향해 시위를 당기는 어느 시골 무사와 소설가가 있다. 변방의 거친 ‘시골무사’에서 혁명의 주인공이 되어가는 이성계와 참담한 역사에 분개하며 한민족의 쓸쓸한 역사를 주시하고 있는 ‘시골작가’ 서권이다.
“내가 한 일에 후회가 없도록. 어두워 깊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네. 나는 후회 없이 살아왔다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네.”(2007년 서권이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난세의 시대, 그의 고고한 향기가 더 그립다.
※극작가 최기우씨는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한 이후 연극·창극·마당극·뮤지컬·창작판소리 등 무대극에 집중하고 있다. 희곡집 〈상봉〉과 창극집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인문기행서 〈전주, 느리게 걷기〉 등을 냈다. 현재 최명희문학관 학예연구실장과 전주대 국문과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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