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간 닫혀진 카세트테이프 폐공장
비일상 공간 벗고 문화예술 놀이터로
젊은이 떠난 삭막하고 매연많은 지역
살아 숨쉬는 사람들의 마을로 변신해
“이거, 쓰레기더미예요?”
“아니예요. 이거 ‘작품’이에요.”
“이것도 작품이에요?”
“이니요. 그건 ‘쓰레기더미’예요.”
전주 팔복동에 살고 있는 김민구 씨는 요즘 한창 신이 나 있다. 2016년부터 팔복예술공장 도슨트(docent)로 일하게 되면서부터다. 황량한 공단에서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오래간만에 신기한 놀잇감 하나를 얻은 것마냥 즐거워한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예술가와 접할 기회가 없던 김민구 씨. 이 곳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생활하고, 숨을 쉬고, 말을 섞는다. 예술가와의 대화 내용이란 다소 엉뚱하기도 하다. 그 엉뚱함에서 김민구 씨는 한없이 매력을 느낀다.
팔복동은 공단지구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규격봉투마냥 각이 져 딱딱한 느낌의 건물들이 즐비하다. 황량하고, 삭막한 기운이 감돈다. 이 건물들은 사람들에게 네모난 생각과 네모난 세계를 환경으로 제공해주는 것만 같다. 네모 외에 둥글고, 세모나고, 마름모진 생각 같은 건 어울리지 않을 법한 풍경. 하늘빛도 공단지구를 닮은 것 같고, 길과 사람들과 꽃들도 그런 팔복동을 닮아 있다.
그러나, 변화는 아주 엉뚱한 곳에서 온다. 무려 25년 동안이나 밖으로 향하는 문을 닫아건 채 시대에서 잊혀진 ‘비일상의 공간’이 문화예술교육센터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카세트 테이프 공장의 혁신적인 변모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이들도 많다. 낡은 테이프 잡음만 음산히 남아 있던 육중한 폐건물을 저들은 과연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특히 공단지역이라 늘 바쁘고, 도태된 삶의 쳇바퀴를 돌리던 팔복동 주민들에게는 더더욱 믿기지 않는 광경이다. 하지만 ‘예술’이 쓰레기더미를 ‘작품’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주민들은 몰랐다. 그리고 그 어떤 난관도 뚫고 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것이 예술이라는 것을 말이다.
예술창작공간과 문화예술교육센터로 또 한 번 변모의 진통을 시작한 팔복예술공장. 이 곳의 터박이로 있는 한민욱 기획팀장은, 굳이 교육이라기보다는 예술을 통한 ‘놀이 중심의 공간’을 만들어가고자 온 힘을 쏟아 붓고 있다. 산업단지 특성에 따른 예술, 과학과 인문이 결합된 상상예술놀이터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예술교육 시설이 부족한 전주 서북권의 예술교육 거점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충직히 해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전주는 오랫동안 예향의 도시로 자리매김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술교육 면에서는 아주 취약한 상황입니다. 하여 ‘예술의 힘’을 통해 전통과 현대 문화예술이 실험적으로 만나고 있는 문화 플랫폼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예술교육은 삶의 질과의 관계입니다. 굳이 다른 많은 예술 공간들과의 차별성을 둔다면, 활용한 ‘공간의 다름’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예술공간은 일상적인 공간으로서의 폐교 활용이었지만, 이 곳은 일상적 공간을 넘어선 생산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만큼 생활문화와 예술과의 차이 규정을 정확히 해서 운영자 중심이 아닌 참여자 중심으로 운영해 가고자 합니다.”
팔복예술공장 상주예술가들과 시민, 학생이 함께 만드는 예술놀이터. 무엇이든 살리려고 안간힘 쓰는 사람은 눈빛부터 다르다. 전주시 교육 관련 기관과의 협업을 통해 앞으로 예술교육 프로그램의 전문성을 기대하는 한민욱 팀장의 그것처럼. 열의가 뿜어져 나오는 건, 이곳을 찾는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예술 공간이라는 것이 중심가도 아닌 도외지 공단에 생긴 것부터가 거리감이 느껴지던 이들.
“저는 팔복초등학교 졸업생입니다. 지금껏 공단 논두렁 사이에 있는 학교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후배들에게 물려준 것이 고작 황량하고 메마른 환경뿐이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직간접적으로 예술을 체험하고,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것은 기적입니다. 저부터도 예술가들과 접하게 되면서부터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이 달라졌는걸요? 이것의 답은 이것이다,라는 일반적인 관점의 틀에서 벗어나게 된 거니까요.”
그러다보니 무슨 일에서든 융통성이 생기고, 생각의 폭까지 넓어졌다는 김민구 씨. 평소 예술가라고 하면,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무엇을 보든 간에 ‘이것도 작품이 될까?’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곤 한다. “마치 내가 예술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는 민구 씨는, 이제는 제법 예술가들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알게 되었다.
회화를 전공한 한 작가가 밤샘 작업하는 것을 보며, 처음엔 그저 측은지심이 일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완성된 작품을 보았을 때는 달랐다. 세상에, 하룻밤 사이에 어둡고 칙칙한 공간이 눈앞에서 완전히 달라져 있던 것이다. 그 때부터 저마다의 개성으로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이 위대해보이기 시작했다고. 볼 때마다 감동을 하게 되는 것도 그 때부터다. 별다를 게 없는 사물에도 스토리를 넣어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예술가라고 말이다.
꼭 그 마음으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작가들의 작품을, 팔복예술공장 내 공간의 내력을 안내해주는 베테랑 주민 해설사가 되어가고 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많이 생각하게 하는 예술가들. 그들의 눈높이로 민구 씨 자신 스스로 올라진 듯해 한없이 기쁘다는 말도 한다.
현재 팔복예술공장에 들어와 일하는 주민 중에는 카페 운영자도 있다. 맨 처음 예술공장이 들어서면서부터 주민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묻자, ‘카페 운영’이라는 대답이 있었다고 한다. 해서 지금은 4명의 동네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운영하는 카페 <써니> 가 들어서게 되었다. 공간이 넓고, 예술작품들이 많아 분위기가 남다르다. 창밖으로는 공단을 가로지르는 기찻길이며, 이팝나무가 늘어서 있다. 이곳이 공단지구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공간이다. 설령 공단이면 어떤가. 오뉴월 길가 이팝꽃이 흐드러지면, 이전의 흉물스러웠던 카세트 공장의 기억도 저 멀리 멀어 있을 텐데. 써니>
밤에는 캄캄해서 다니지도 못했던 길이 환하게 밝아져서는, 매일 아침 눈 뜨는 일이 기다려진다는 팔복동 주민들. 젊은 사람은 다들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 삭막했던, 매연 많은 공단이었다. 이제는 숨을 쉬는, 진짜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을이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차츰 팔복동 금학천까지 두루 깨끗해지고, 길이 넓어졌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보라, 이것이 바로 진짜 꿈꾸는 예술놀이터이자, 예술과 더불어 사는 최고의 삶의 현장이 아닌가.
기적은 신만이 주는 것이 아니다. 변화를 불러오는 작은 생각이, 그 생각을 들고 찾아온 사람이 기적이다. 또한 기적을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이 또 다른 기적을 불러온다. 팔복예술공장과, 이곳을 드나드는 이들은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미 변화되었고, 변화되어가고 있는 개개인들 모두가 전주 팔복동의 큰 기적임을. 그 기적이 거시적인 흐름을 지금, 태풍처럼 몰아오고 있음을 말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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