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집에 아무도 없지?”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방과 후에 여자 친구들 5~6명이 모여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내 친구 미영이는 ‘성 박사’로 유명했는데, 성적 호기심이 왕성하였던 우리는 미영이의 알 수 없는 농담에 웃어 젖혔다. 그 친구가 거실 비디오 위에 올려진 테이프 하나를 틀었다.(고 생각 하지만 나였을 확률이 높다.) 가족 중 누가 빌려놨는지 알 수 없지만 ‘아래층 여자와 위층 남자’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약간 호들갑스럽게 낄낄 거리다가 얼마 후 숨죽이며 관람하였다. 내 ‘야동’의 첫 시작이었다. 나중에서야 남성들의 세계에서는 이것은 ‘야동’ 축에도 못 낀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야동’을 본다. 볼 때마다 복잡한 기분이다. 심지어 내 손목을 자르고 싶다. 포르노 산업에서 소비되는 야동은 흔히 말하는 야한 영화 수준이 아니다. 집단 강간, 몰카(불법촬영동영상), 성매매, 아동 성폭력 등으로 얼룩져있다. 반인권적인 내용을 필터링하고 나름 안전한(?) 영상을 찾지만 촬영, 유통, 판매, 소비라는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최근 문화계에서 피해자의 용기 있는 미투로 알 수 있듯, 실상은 전혀 다르다. 성적 흥분의 주요 메커니즘은 여성이 재현되는 방식이다. 야동을 보면 그 나라의 성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포르노에서 여성들은 극도로 수동적이고 처음에 관계를 거부하다가, 모두 적극적으로 즐기는 설정이다.
한국은 포르노 제작이 불법이지만, 제작된 콘텐츠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일본과 유사한 패턴이다.
성적 욕망은 사회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여성이 재현되는 방식은 평소 현실 관계의 반영이다. 영상 속 재현되는 방식이 폭력적이고 차별적이라면, 그런 모습을 통해서만 성적으로 자극받는다면, 이것을 표현의 자유와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쁜 페미니스트’ 저자 록산 게이는 “우리는 억압이나 처벌의 공포 없이 자신을 표현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표현할 자유는 없다.”고 하였다. 한국 사회는 남성의 성적 욕망을 본성이라 간주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에 관대하다. 웹하드 업체 대표 양진호에 대한 분노의 시발점은 직원 갑질 때문이지, 불법 촬영 동영상이라는 여성에 대한 성범죄 때문은 아니었다. 승리 버닝썬 게이트, 장자연 씨의 죽음,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별장 성폭력 사건 또한 매한가지다. 하지만 ‘몰카’가 ‘불법촬영동영상’으로, ‘성접대’가 ‘성폭력’으로 언어화되고 범죄로 인식하게 된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이는 전적으로 피해 당사자의 폭로와 저항하는 여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부터 여성가족부에서 해외불법음란사이트 접속을 차단하였다. 속으로 안도했다. 못된 습관을 정부에서 시스템으로 견제해주니 감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라고, 정부의 방침을 비웃는 우회 접속 방법이 성행하고 있다. 내가 그들과 다른가?
나 또한 소비를 통해 공모했기 때문에 면죄부를 얻을 수 없다. 지금도 웹하드 사이트 ‘성인’ 카테고리를 완전히 지나치지 못하고 있다. 남성 중심 시선으로 여성을 몸으로 환원하고 성애화하는 게 자연스러워서 탈피하려고 노력 중이다. 다만 당사자들의 삶을 건, 발화에 어떤 식으로든지 수신해야 하지 않을까? 분명한 점은 성범죄자는 엄정히 처벌받아야 하고, 피해자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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