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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 유감

이강만 한화그룹 부사장
이강만 한화그룹 부사장

한 사람이 평생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기억할 수 있을까? 만 명, 천 명, 백 명?케빈 브록마이어의 소설 ‘로라시티’를 떠올리며 든 궁금증이다. 사람마다 뇌의 용량이나 기능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단언적으로 얼마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얼마 전 모 언론사 간부와 얘기던 중 그분 휴대폰에 저장된 연락처가 3천개가 넘는다고 해서 적잖이 놀랐다. 작년까지 2천개 남짓 연락처를 가지고도 늘 벅차하던 필자인지라 그 많은 분들을 어찌 다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기억까지는 모르겠지만 언론계 간부들은 대개 그 정도의 연락처는 가지고 있단다. 휴대폰 연락처에 저장된 분의 숫자가 천명이 될 때까지는 전화 발신자 이름이 뜰 경우 그가 누군지 거의 기억해냈는데, 그 이상을 넘긴 이후부터는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서도 누군지 헷갈려 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연락처를 새로 등록할 때 신체적 특징이나 간단한 약력 등을 추가로 입력하는 방법도 취해보았지만 역시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자신이 직접 저장한 이름이 뜨는데도 얼굴도 생각 안 나고 심지어는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도 누군지, 어디서 만난 분인지도 모르면 정말 당황스럽다. 그래서 말을 올리지도, 그렇다고 하대하지도 못하고 ‘아~’, ‘네~’라는 추임새를 연신 발하며 상대가 누군지 단서를 찾으려는 경우가 허다하다. 장황하게 이 이슈를 꺼내는 이유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울려대는 기억 저쪽의 발신자 이름과 아예 전화번호로만 뜨는 수신전화로 인한 곤혹스러움이 오롯이 필자 혼자만의 몫은 아닐 듯싶어서다.

연초에 휴대폰을 교체하면서 상당기간 피차 연락 안한 번호들은 아예 제외하고 가끔씩이라도 소통하는 600여명만 연락처에 입력해놓았다. 그런데 이제 입력 안된 분들로 인해 각종 해프닝이 생기고 있다. 백업리스트에도 없는 전화번호로, 회의나 부재중 걸려온 전화가 있다. 그냥 무시하면 대개는 더 이상 전화가 오지 않는다. 광고성 전화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이지만 콜백이 없는 경우 독촉 문자를 보내는 분이 있다. 그것도 본인 성함도 밝히지 않고 다정하게, 또는 하대조로 답신을 재촉하면서 말이다. 그냥 무시하려다가도 어떤 때는 조급증이 발동해 전화를 걸고 만다. 그러면 상대는 ‘춘향이 이도령이라도 만난 듯’ 반가이 자신을 소개한다. 스쳐가며 명함을 교환하거나 학연 지연으로 얽혀 있는, 알 듯도 모른 듯도 한 분들이다. 간단히 인사가 오가면 대뜸 용건을 얘기한다. 십중팔구 해결해주기 힘든 부탁이다. 세상이 분명 바뀌었지만 그분들은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세상 일은 모두 공명정대하게 처리되어야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지금 얘기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예외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믿는 부류다. 그분들이 오죽하면 그럴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가끔씩은 부아가 치민다. 좀더 지혜롭게, 그리고 상냥하게 대처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말이다.

불과 몇 달 사이에 휴대폰 연락처가 또 300개 늘었다.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기존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어렵거니와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않을 수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니 기억 못하는 분으로부터 연락을 받는 일은 앞으로도 불가피해 보인다. 이 사소하지만 중요한 문제를 어찌할까 고민했는데, 역시 과거에 한동안 사용했던 방법이 좋을 것 같다. 기억이 떠올려진 분이나 적어도 백업리스트에 포함된 번호이면 답신을 하는 것으로 말이다. 세상과는 끊임없이 소통하되, 번잡함에 끌려 다니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그래도 이런 방법이 옳은 것인지는 여전히 확신이 없다. 하지만 어찌하랴. 아직 할 일이 태산인데 선한 코스프레 하느라 에너지를 고갈시킬 순 없지 않은가?

다만 여전히 꺼림칙한 게 있다. ‘로라’의 ‘기억’ 덕분에 ‘시티’에서 평화롭고 안온하게 존재하는 사람들이 떠올라서다. 필자는 과연 전화발신자에게 어떤 존재일까? 기억되는 자, 아니면 기억 잘하는 자, 그도 저도 아닌 그냥 기억력 나쁜 자.

 

/이강만 한화그룹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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