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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소해진 사회복지사
소해진 사회복지사

10년 전 서울 반지하에 살 때 일이다. 룸메이트와 둘이 살았는데 휴일 낮에 tv를 보고 있자니, 창문 너머로 시커먼 눈알이 들어왔다. 너무 놀라고 경악해서 ‘야!’하고 소리치자 어떤 남자가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집은 초록색 대문을 열고 여섯 계단 아래 현관문이 있었고 세탁기는 그 옆 안쪽에 놓여있었다. 늘 세탁기 안쪽 시커먼 공간이 무서웠다. 어느 날 둘이 외출했다가 현관문을 열었는데 세탁기 안쪽 공간에 남자가 숨어 있었다. 자동 반사적으로 크게 소리치자 남자는 잽싸게 도망갔다. 해가 지지 않은 오후였고 남자를 쫓아 달렸으나 잡을 수 없었다. 대신 목청 높여 ‘왜 남의 집에 들어오냐. 신고하겠다!’고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하였으나 몇 번의 순찰을 나왔을 뿐 검거되지 않았다.

연일 뉴스에 보도된 ‘신림동 강간 미수 CCTV 사건’은 혼자 사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일이다. 그녀가 들어가자마자 1초 차이로 문을 열려는 그의 행동은 공포를 넘어선 범죄의 현장이었다. 이후에도 10분간 집을 배회하고 휴대폰 조명으로 현관문 도어록 비밀번호까지 열려는 집요한 행동 속에서 그녀는 홀로 사투했다. 경찰은 피해자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지만, 6층에 있는 피해자의 집까지 올라가지 않고 건물 입구에서만 둘러보다가 철수했다. 이 사건이 화제가 된 것은 피해자가 직접 구해 트위터에 올린 CCTV 영상에 대한 강한 여론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경찰은 왜 피해자의 호소를 가볍게 여긴 것일까?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는 “이번 사건이 현행법상 중한 범죄가 아니기 때문에 경찰이 움직이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극심한 공포와 좌절은 범죄 그 자체보다 피해 사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사건 이후 가장 논쟁이 되었던 부분은 혐의 적용 부분이었다. 주거침입인가, 강간 미수인가? 이는 법 규정 자체보다 법 적용과 판단의 문제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성범죄로 인해 목숨을 잃고, 삶이 망가져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사실, 내가 궁금한 건 그 이후의 이야기다. 그녀는 그 집에서 살 수 있었을까? 휴식과 충전의 공간이었던 집은 위험한 공간이 되었을 것이다. 집으로 귀가할 때마다 누가 쫓아오진 않는지 잔뜩 긴장하게 되고, 잠금장치는 이중 삼중으로 강화하였을 것이고, 아마도 이사를 고려할 확률이 높다. 살 떨리는 공포와 위협의 시간을 홀로 다시 겪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어느새 그녀의 불행은 우리 모두의 불행이 된다. 여성 1인 가구에게 안전한 집이 있을까? 성범죄는 해마다 늘어나고, 경찰은 피해 사실을 가볍게 여기고, 사법부의 처벌은 미약하다.

다시 10년 전 그 사건으로 돌아가, 우리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경찰 신고 이후 직접적인 위험이 사라지자 폭발적인 분노가 치밀었다. A4 용지 20장에 그를 향한 분노와 저주의 언어를 주술처럼 적어 벽에 덕지덕지 붙여놓자, 공포에 눌린 에너지가 다르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주술이 통했는지 그 남성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안일한 공권력의 틈 사이에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 바로 당사자의 공포와 위협을 없는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함께 싸울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힘, 우리는 그 집을 떠나지 않고 계속 살 수 있었다.

/소해진 사회복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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