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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덕 시인의 ‘감성 터치’] 더딘 길

세상에서 비행기가 제일 빠른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참 더디 가던 시절이었습니다.

벌써 세밑입니다. 북미 인디언 아라파호족이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른다는 11월도 갔습니다. 이제 정말 모두 다 사라지는 달입니다. 겨울 하늘이 쨍합니다. 마냥 푸르르던 게 엊그제만 같은데, 추수 끝난 겨울 논배미가 휑합니다. 없는 듯 묻혀있던 논둑이 제모습을 드러냈네요. 나릿나릿, 부드럽게 돌아가는 급할 것 하나 없는 논둑길을 갑니다. 곧게 뻗어 질러가는 세상 속에도 이렇게 더딘 길이 있었습니다. 쟁기를 끌던 누렁소의 순하디순한 등이, 논둑에 앉아 달게 새참을 먹던 그 시절이 잡힐 듯 눈에 선합니다. 부드럽게 마을을 감싼 뒷산 산등성이로 눈을 줍니다. 내년으로 가는 올해의 끝자락, 세상도 사람도 부드럽고 더뎠으면 좋겠습니다. 올려다본 하늘에 비행기 한 대 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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