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매체들이 한사람의 상처에 관해 쉴 새 없이 이야기한다. 단독과 오보 사이를 달리며 누가 더 자극적인 언어를 뽑아내는지 겨루는 경주마 같은 언론이 그러했고 공감과 연대는 사라진 채 분노와 의심, 억측에 휩싸여 피해자라는 과녁을 조준한 화살 같은 SNS가 그러했다. 보고 있자면 턱 하고 숨이 막힌다. 2년 전 피해사실을 고백하던 그날의 기억이 소용돌이치며 가슴이 먹먹하고 뜨겁다. 여전히 의연하지 못한 나의 존재를 사유하며 혹 세상 어딘가 나와 비슷한 존재가 있다면 잔인하고 아픈 칠월을 잘 견뎌주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해보는 것이 살아있음을 감각하는 일이라고 말해도 괜찮을까. 이 지면을 빌어서.
나는 2018년 2월 공개 기자회견을 통해 극단대표의 성추행사실을 고발한 미투 생존자이다. 그 당시 얼굴을 공개한 피해자라는 이유로 ‘용기, 진정성, 이슈’ 등 다양한 말들이 쏟아져 나오며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내가 얼굴을 공개한 이유는 신뢰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다. 가해행위자로 지목한 대표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법적처벌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또 다른 피해자가 있을 확률이 높아 공론화가 필요했다. 또한 나는 직장이 아닌 개인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고 사업장의 수익은 생계를 꾸리는 데 충분했다. 또 평소 대화를 많이 하는 분위기 속에서 가족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의 피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미투를 적극 지지했다. 다시는 연극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적어도 미투로 인해 내 생계와 일상이 위협받지는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코 모든 피해자의 상황이 나와 같지는 않다. 또한 피해자가 만인 앞에 자신을 드러내서 그 많은 상황들을 견뎌야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상처에 훈수를 두며 쉽고 간편하게 피해자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싫습니다. 못합니다”를 하지 않은 이유를 몹시 궁금해 하면서도 그 요구가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근무 환경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저의에 대해서는 온갖 억측을 하지만 얼굴을 드러낸 이후 완전히 달라진 일상 속 고통을 감당할 피해자의 남은 삶이 어떤 것일지는 짐작하려 하지 않는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 마치 그의 삶에 어떤 지분이라도 있는 듯 믿을만한 증거를 운운하며 끝내는 한 죽음과 한 상처를 연관 짓고 책임을 묻고야 만다.
피해자가 나와 같은 직장인이고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며 사회적 일원으로 인정받아 안전하고 즐겁고 일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왜 떠올리지 못할까? 무엇이 우리의 상상력을 이토록 무력하게 만들었을까? 자 이제 내가 속한 공동체를 떠올려 보자. 공동체 일원 모두에게 “싫습니다. 못합니다”를 말할 자격이 주어지는가? 그 말을 한 어떤 사람도 결코 불이익이 없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 말을 단지 하나의 의견으로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가?
피해자를 의심하고 비난하는 방식으로는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피해사실에는 우리가 바꿔야할 많은 구조적 문제가 숨어있고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 누구도 거절에 거창한 용기가 필요 없게 되는 날, 우리 모두는 분명 조금 더 성숙해져 있을 것이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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