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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백석초에 장학금 10억 원 기부한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폐교 위기에 놓인 모교 생각하니 마음 너무 아파"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최근 사회 지도층 인사의 사회에 대한 책임있는 행동이 지역 사회에서 화제가 됐다.

박승(84) 전 한국은행 총재는 이달 3일 모교인 김제 백석초등학교에 10억 원의 장학금을 기부했다.

그가 기부한 금액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위해 최소한의 생활비를 뺀 전 재산이다.

그는 40년 전의 약속을 지켰다고 했다. 또 ‘부는 원칙적으로 당대(當代)에 그쳐야 한다’는 자신의 평소 지론을 실천한 것이라고 했다.

이달 14일 서울 평창동 박 전 총재의 자택에서 만나 전 재산의 사회 환원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더불어 경제학자로서 뿐아니라 물론 금융·건설 분야의 전문가이기도 한 그는 최근의 부동산 논란 문제와 함께 코로나 19 이후의 경기 전망도 들려줬다.

 

-최근 모교에 전 재산을 기부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40년 전부터 생각한 것인데, 그 때 자식들(5남매)에게 ‘너희들 하고 싶은 만큼 교육은 시켜주겠다. 그런 다음엔 자립해라. 나의 재산은 너희에게 주지 않고 사회에 주겠다’고 선언했죠. 자식들도 동의해서 집안에선 오래전부터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죠.”

 

- 사회 환원을 결심하신 배경이 있습니까.

“자본주의 경제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는데, 잘못 가면 일부 계층이 부를 독점해서 국민 대중이 소외되는 등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부의 세습이 정착되면서 계층 이동이 막히게 됩니다. 그게 천민적 자본주의, 탐욕적 자본주의입니다.

그래서 ‘나만 잘 사는 자본주의가 아닌 함께 잘 사는 자본주의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경제학자로서 그런 방향으로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있어 몇 푼 안 되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겠다는 게 나의 기본 생각이었습니다.”

 

- 그런 인식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아마 어린 성장 과정이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농사일을 했습니다. 또 매일 왕복 14km를 걸어서 6년간 이리공고를 다닐 때는 농사일 때문에 결석하는 일도 많았고, 수험료를 못 내서 시험 못 본 일도 많았죠.

대학도 어렵게 다녔는데, 집에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등록만 해놓고 고향에 내려와서 농사일 하다가 시험 때 올라가서 친구들 노트보고 공부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런 현실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 개혁, 소위 자본주의 개혁에 대한 나의 사회관이 싹 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교와 대학도 있는데, 유독 초등학교에 전 재산을 기부한 배경이 있습니까.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데,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모교인 서울대는 내가 아니어도 도와줄 사람이 많아요. 이리공고는 7억을 기부했는데, 백석초등학교야말로 정말 내가 아니면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게 첫 번째 이유입니다.

더 큰 이유는 고향사랑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온갖 일을 했는데, 그 때 그 농촌의 어려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여름철 농민들의 땀 냄새와 흙냄새, 벼 냄새 등 3가지 냄새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래서 호를 푸를 청에 벼 도(청도·靑稻)로 내가 지었습니다.

그 같은 정서 속에서 교수나 장관을 지낸 후 고향을 가보니 어린 아이 울음소리가 끊긴지 오래고, 젊은이도 없었습니다. 마을 일대에 초등학교와 중학교·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없었요. 모교는 폐교위기에 처하고. 농촌이 죽은 거예요. 그게 아주 마음이 아팠습니다.”

 

-기부금 10억 원은 어떻게 정해진 것입니까.

“매년 백석초에 1000만 원씩을 지원하고 있는데,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죽어도 영원히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끝에 기금을 생각했습니다. 나이도 있고 해서 이번에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나와 집 사람의 저축 등을 합해서 여생을 사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생활비를 빼니까 10억 원 정도 되요. 그래서 그 것을 전부 기부하기로 했죠. 앞으로는 기부하고 싶어도 할 게 없습니다.(웃음)”

 

- 백석초에 대한 지원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그 때가 2000년대 초로 기억하는데, 교장 선생님이 ‘교훈석’을 세우고 싶다며 도움을 요청한 일이 있습니다. 흔쾌히 수락했죠. 그 때부터 시작됐는데, 그 뒤(2010년)로 도서관을 짓는데 5억 원을 지원했고, 매년 1000만 원씩을 따로 지원했죠.”

 

- 나름 보람을 느끼십니까.

“내 고향에 어린이가 뛰어놀고, 젊은이가 돌아오는 농촌이 됐으면 좋겠다는 게 나의 염원이었고, 그 염원으로 학교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완전히 그 단계는 아니지만 활력은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봅니다. 학교는 이제 입학경쟁이 심할 정도로 부근의 명문이 됐습니다. 폐교 위기에 있던 학교가 그렇게 된 것을 보고 아주 보람을 느꼈죠. 내 힘만으로 된 건 아니지만 내 뜻이 성공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부가 새로운 방식이어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기부를 하려고 보니까 방법이 문제예요. 예금을 해봐야 이자가 0.8% 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10억 원을 기부해도 1년에 약 800만원 밖에 안 나온단 말이예요. 그동안 매년 1000만 원씩 내왔는데, 이거 안 되겠다 싶어서 연구를 했어요.

그 중 가장 좋다고 판단한 게 은행의 영구채권입니다. 매 분기별로 연간 3.17%, 매분기에 약 900만원이 오는 거예요. 한 달에 300만 원 꼴이죠. 아주 훌륭하죠. 매년 1000만 원 주던 거에 비해 3배 이상이 되는 것이죠. 널리 알려서 많은 사람들이 (이 방식을) 이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 앞서 젊은이들이 돌아오는 고향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밝히셨는데, 갈수록 젊은이들이 빠져 나가 활력을 잃어가고 있는 전북의 미래는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전북은 가장 어려운 시기를 지나 이제는 활로를 찾는 단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전체를 보면 산업화 시대에 영남 중심 개발. 그 뒤 지금까지는 경기·충청 중심 개발이 이뤄졌어요. 그 다음은 파장이 전북으로 오는 게 틀림없습니다. 교통발전으로 인해 전북 지역도 1일 생활권이 됐기 때문에 앞으로 좋을 것으로 봅니다.”

특히 청정지역으로서의 생활 배경과 새만금 사업에 대한 전망을 결합해 본다면 앞으로의 전북은 상대적인 발전 속도가 빠를 수 있다고 봅니다.”

 

- 새만금 사업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전망하십니다.

“그렇죠. 그 전부터 새만금을 긍정적으로 봐왔습니다. 지금까지는 지지부진했는데, 그 것은 과거 정권이 새만금에 대해 소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현 정부가 적극 개발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에 새만금은 상당히 밝은 전망을 갖게 됐다고 봅니다. 새만금은 일종의 백지입니다. 이 백지에 그림을 어떻게 그릴 것이냐에 따라 전북의 미래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이처럼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땅은 새만금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20~30년 뒤에 전북은 상당히 활기찬 지역이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더불어 전북의 연기금 중심 금융도시 조성은 어떻게 보십니까.

“사실 저도 원했죠. 전주에서 국제 금융세미나가 열릴 때 기조 강연도 했어요. 그러나 서울과 부산, 전주가 삼각 편대를 유지하는 게 좋겠다는 게 전북도의 구상인데 반해 부산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며 반대하는 의견도 많습니다. 그래서 진행이 잘 안 되는 거 같아요. 시간을 갖고 접근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생각입니다.”

 

- 최근 집값이 폭등하는 등 부동산 문제가 심상치 않습니다.

“투기 수요 때문이에요. 내가 1988년 건설부 장관 하면서 일산 분당 등 신도시를 건설할 때는 우리나라 주택 보급률 56%였어요, 절대 공급부족입니다. 그 때 노태우전 대통령이 200만호 건설해야겠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주택 보급률이 100%가 넘어요. 집에 부족하지 않은 거예요. 지금 우리나라 집 부족은 다주택 소유자 때문입니다. 다주택 소유자가 소유한 주택이 우리나라 전체 주택 수의 60% 이상입니다. 만약 다주택 문제가 없다면 지금 집은 남고 집값도 완전히 안정되는 거예요.”

 

- 집값을 잡을 수 있는 대책은 무엇이라 보십니까.

“투기 수요가 생기는 원인은 주택 보유에 따른 비용인 보유세는 낮은 반면 주택에서 생기는 소득, 즉 집값 상승과 세수입은 높기 때문이에요. 집값 안정대책은 간단합니다. 보유세 인상입니다. 특히 다주택자의 보유비용을 높혀야 합니다. 이번 보유세 정책은 정부가 아주 잘 한 것입니다. 앞으로도 더 올려야 해요. 선진국 수준 가려면 현재보다 두 배 더 올려야 합니다.

동시에 세제를 개편해서 지방세로 돼 있는 재산세와 취득세를 국세로 전환해 종합부동산세를 합해서 중앙정부가 강력하게 부동산을 다스려야 합니다. 지방에는 대신 다른 세원을 주면 됩니다.”

 

- 정부에서는 추가 주택공급 대책을 세우고 있는데,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요.

“흔히 서울 도심에 집을 많이 공급하라고 하는데 이건 소용없습니다. 집을 많이 짓는 것은 대책이 아니예요. 서울 도심에 집을 더 지어도 투기자가 다 가져가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은 집 부족문제가 아닙니다. 공급대책의 핵심은 공공임대 주택을 대규모로 공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의 주택수요를 이 것으로 흡수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선진국처럼 집을 살 필요 없이 세로, 말하자면 세 입주하는 주택 체제로 가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수색에 짓는 3기 신도시도 약 3분의 1 정도는 공공임대 주택 짓고, 강남 도심에 공급하는 신규 공급도 절반 이상은 공공임대 주택으로 공급하도록 하면 주택 공급문제는 해결이 될 것입니다.

지금 현재 부동산 정책의 핵심은 다주택자에 대한 보유세 강화를 통한 수요 대책, 즉 투기 수요 억제와 대규모 공공임대 주택 건설을 통한 공급대책 이 두 가지를 결합하면 됩니다.”

 

-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평가는.

“지금 잘 가고 있다고 보는데, 정도가 미약하지 않느냐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정부에도 건의했어요. ‘공공임대 주택만 해도 대규모로 해라. LH공사를 확대해서 공공임대 주택 전문 건설관리 기구를 만들어라’고요. 대규모 주택건설도 건설이지만 관리 체계가 강화돼야 합니다. 현재로선 안 됩니다.”

 

- 평소에도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이셨습니다.

“부동산 문제는 아주 단호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했던 탐욕적 자본주의, 이른바 천민적 자본주의의 본원이 부동산이라 보고 있습니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지, 이재(理財) 수단이 돼서는 안 됩니다. 지난 50년 동안 물가는 30배 올랐는데, 부동산 값은 3000배 올랐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빈부 격차의 씨앗이고, 빈부 세습의 근본입니다. 경제는 성장하는 데 국민생활은 더 어려워지는 이른바 빈곤화 성장의 근본 원인입니다.”

 

-현재의 정책으로 집값이 안정화될 수 있을 것 같나요.

“한 달 이내로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봅니다. 한 달 이내로 집값 떨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동산 정책은 더 세게 나가야 합니다.”

 

- 집값을 잡지 못하면.

“그러면 정말 위험합니다. 정권 내놔야지요.”

 

-더불어 코로나19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는데, 향후 경기 전망은.

“우리나라는 정상 경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 보다 관리를 잘 하고 있어요. 내년 이후에는 괜찮으리라고 봅니다. 경제 회복이 잘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어요.”

 

◇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1936년 김제 출생. 학계는 물론 국내 금융·건설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대표적인 경제원로.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여러 정권에서 기용됐다.

전두환 정부에서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노태우 정부 때는 대통령 경제수석과 건설부 장관, 김영삼 정부에서는 대한주택공사 이사장, 김대중 정부와 노문현 정부 때는 공적자금관리위원장과 한국은행 총재(2002∼2006)를 맡았다. 문재인 정부 때는 문재인 싱크탱크 자문위원장으로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는 스스로를 ‘진보적 실용주의’라고 했다.

현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해 큰 방향에선 같지만, 일부 정책은 의견을 달리한다.

정부의 최저임금과 주 52시간제에 대해 “방향은 옳지만,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선비적 문제 의식은 있는데 상인적 현실감각은 없다”는게 그의 지적이다.

김제 백석초-이리공고-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뉴욕 주립대 올바니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교 졸업 후 해군사관학교에 합격했으나,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어 입학을 포기하고 1년 간 농사일을 하면서 저축을 해 이듬해 서울대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1961년 한국은행 입행 후 한국은행 조사부 차장을 거쳐 사우디아라비아 한국경제고문단장(1974∼75)을 거쳐 1976년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로 전직, 2001년까지 강단에 섰다. 이때 집필한 ‘경제발전론’은 대학 교재로 널리 이용됐다.

현재 중앙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8년부터 하나금융그룹의 사회공헌위원장을 맡아 어린이집을 지어 지방자치단체에 기증하는 일, 결손 가정, 다문화 가정, 탈북자들을 돕는 일, 소외계층을 위한 자선사업 등을 하고 있다.

/대담=김준호 선임기자, 정리= 김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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