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변호사
여당 대표가 전직 대통령 사면을 적절한 시기에 건의하겠다고 밝힌 뒤 한 차례 돌풍이 일었다. 배경에 대한 논란이 난무했지만, 아직 사면을 말할 때가 아니라는 대통령의 입장 표명에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깊은 고민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는 대통령의 말처럼 사면은 분명 다시 점화될 의제다.
헌법 교과서에는 사면권의 한계가 적혀 있다. 권력분립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국가이익과 국민화합 차원에서만 행사되어야 하며, 당리당략에 따라 정치적으로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기술되어있다. 헌법 교과서를 현실에 비추어 읽다보면 공허할 때가 많은데, 사면에 관해서는 교과서에조차 역대정권이 필요에 따라 무분별하게 시행해왔다고 적혀 있기에 공허함이 더했다. 아무래도 헌법학의 이론과 성과는 사면권에 지분이 없는 모양이다.
사면의 명분이 가진 논리적 타당성은 어떨까. 이번 사면 제안은 다음과 같은 3단 논리다. A) 코로나는 전쟁에 준하는 국난이다, B)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 통합이 필수적이다, C) 따라서 사면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 전직 대통령을 사면하면 국민통합이 이루어지고, ㉯ 그리하면 코로나가 극복된다는 전제가 참이어야 한다. 여기서 ‘코로나’를 ‘IMF 외환위기’로 바꾸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의 명분과 같아진다. 과연 위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해서 국민통합이 되었는지, 덕분에 외환위기가 극복되었는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다만, 저 정도 논리정합성을 수긍하는 포용력이라면 A) 올림픽위원인 이건희 회장을 사면하면 2018년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다, B) 그리하면 국가브랜드 및 국제외교 역량이 강화된다, C) 따라서 국익을 위해 이건희 회장을 사면해야 한다는 논리가 차라리 더 설득력 있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여당 대표는 사면 제안이 당리당략이 아닌 ‘소신’이라 발언했지만, 반대 여론을 맞이한 당 최고위는 ‘당사자의 반성’과 ‘국민적 공감대’가 우선이라 했다. 법 이론과 명분이 사면에 갖는 지분이 미미하다면 개인의 소신, 당사자의 반성, 국민의 공감 여론의 비중은 어떨까.
1997년 대선을 앞두고도 여당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건의했다. 당시 반대 여론은 55~74%, 찬성 여론은 33~40% 정도로 현재에 비해 결코 반대가 적지 않았으나, 김영삼 정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회만 되면 임기 내에 사면을 단행할 태세였다. ‘당사자의 반성’과 ‘국민적 공감대’는 없었지만,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는 모두 경쟁적으로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김대중 후보는 ‘화해는 사과해야 이뤄지는 것이지만 용서는 다르다. 반성하지 않는다고 우리도 똑같이 대응할 수는 없다’는 ‘소신’을 내세워 동서화합의 이미지를 선점하였으며, 마음이 급해진 이회창, 이인제 후보도 곧바로 사면을 건의하고 긴급 기자회견을 하는 등 상대의 화합 이미지를 희석시키려 했다.
우리 기억 속 사면은 늘 명목상 대주주인 주권자의 의지가 정치공학이라는 체에 걸러지고, 여론조사라는 반죽으로 짓이겨진 채 소신과 명분, 반성과 용서 등의 고명을 얹어 내어진 패스트푸드 같았다. 혹자는 추운 날씨에 촛불을 든 시민들이 만든 성과가 정치권에 의해 허물어지는 것을 방관하지 않으리라 전망하지만 더운 날씨에 최루탄과 맞선 시민들이 보는 앞에 3당 합당과 전, 노 사면이 이루어진 것 또한 우리 역사다. 언제고 다시 불거질 사면 논의를 통해 그 지분관계가 얼마나 변했는지 지켜볼 일이다. /박지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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